베리타스

[설교] 하나되기, 거리두기, 열어놓기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입력 May 22, 2023 09:06 AM KST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아가서 5장 8-16절, 6장 4-12절

설교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흔히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부릅니다. 5월이 가정의 달이된 것은 1993년 UN이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International Day of Families)로 제정하고, 전 세계 국가들이 이날을 기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 날(21일) 등이 있고, 여기에 노동자의 날(1일), 스승의 날(15일) 등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화합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들이 많습니다.

가정은 모든 공동체의 기초요 토대이기 때문에, 예부터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家和萬事成)는 말이 있듯이, 가정의 화목은 그야말로 중요합니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패밀리'(family)는 원래 하인이나 노예를 뜻하는 라틴어 '파물루스'(famulus)에서 유래했습니다. 파물루스의 복수형 '파밀리아'(familia)는 가부장인 한 남자에게 속한 노예의 총 인원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영어 패밀리(family)는 '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들을 합성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정의 시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둘은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둘이 서로 다른 각자의 삶을 살아왔고, 만나기 전까지는 남남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부모 밑에서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며 자랐고, 그렇게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가정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모든 가정, 가족의 시작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남이었지만 사랑으로 함께 한 가정의 시작은 자녀와 손자 손녀들, 후손들을 통해 대를 이어가고, 또 다른 가족들이 형성되면서 큰 친족을 이룹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근친상간을 금했고, 족외혼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고 인류문명의 토대인 상호 교류 및 교환의 장치들을 개발했습니다. 즉 사랑으로 만난 이들의 공동체가 서로 다른 이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실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하면 가정이 위태로워지는 것이고,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도 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가정과 가족이 행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족을 "가면 갈수록 족쇄"의 줄임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가족이 갈수록 족쇄처럼 느껴진다면 이 노래를 부르기는 어렵겠지요. 가족 상담을 많이 하시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편안치 못한 가정의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가정이 어떤 지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렇다고 합니다. "우리 집은 허구한 날 싸우는 집이야" 그런데 놀라운 것은 허구한 날 싸우는 가족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만큼 또 화해도 하고, 용서도 하고 그런 것이지요.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 가정이 어떻게 더 단란하고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은 사이좋은 부부관계로부터]

가정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 관계입니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자라고, 나이 드신 부모 또한 자신의 장성한 자녀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따라서 부부 관계가 가정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함께 가정을 꾸리기로 마음먹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그야말로 정점에 이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가서의 본문은 서로를 애타게 찾고 있는 두 연인의 꿀 떨어지는 사랑 노래입니다.

5장의 구절은 첫눈에 반한 여인이 자신의 임에게 바치는 노래이지요. "나의 임은 깨끗한 살결에 혈색 좋은 미남이다. 만인 가운데 으뜸이다. 머리는 정금이고, 그의 두 눈은 흐르는 물가에 앉은 비둘기, 그의 두 볼은 향기 가득한 꽃밭, 그의 손은 가지런하고, 보석 박은 반지를 끼었다. 그의 허리는 청옥 입힌 상아처럼 미끈하며, 그의 두 다리는 순금 받침대 위에 선 대리석 기둥이다." 휘황찬란한 언어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도덕군자를 표현하면서 학문이나 기예 등을 열심히 닦는 것을 가리켜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원래 이 말도 한 여인이 강변을 거니는 멋진 남성을 보고 읊던 시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아! 그의 모습은 깎은 듯, 자른 듯, 쫀 듯, 간 듯 하구나!" 완전히 조각 미남이었다는 것이지요.

6장엔 또 다른 사랑 노래가 나오네요. 하와를 처음 본 아담이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이 사람도 똑같이 외칩니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훤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10절) 왕비가 예순 명이요, 후궁이 여든 명이요, 궁녀도 수없이 많다마는, 나의 비둘기,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8-9a)"

사랑하는 이에게 느끼는 감정과 탄사는 오늘 아가서의 주인공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들, 연인과의 추억이 있는 모든 사람이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정을 이루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경이로운 감탄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요?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인간이 결혼하고 나서는 달라지더라고요. 이제 저 인간, 꼴도 보기 싫어요." 분명 사랑했던 사람인데, 결혼하는 순간 "이 인간"이 되었다가, "저 인간"으로 최후를 맞게 되기도 합니다.

왜 어떤 부부는 살아가면 갈수록 더 사이가 좋아지고, 어떤 부부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요? 결혼생활이 2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부부 40쌍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이들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나왔습니다. 우선 사이좋은 부부들이 절대로 하지 않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싸우는 횟수나 길이가 다른 부부들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싸움의 여지를 잘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안 합니다. 보통 우리는 싸울 때 본능적으로 상대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을 콕 찌릅니다. 정곡을 찔러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사이좋은 부부는 아무리 감정이 격해져도 이를 악물고 인간적인 예의를 지킵니다. 선을 절대로 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배우자에 대한 뒷담화를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남편이나 아내의 흉을 보지 않습니다. 넷째는 싸우더라도 말끝을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다. 보통 싸움이 길어지고 확장되는 것은 말꼬리를 잡고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말꼬리를 잡다 보면 처음 싸우게 된 원인도 잊어버린 채 기분만 상하고 관계만 망가지지요. 사람이 화가 나면 감정이 격해져서 거친 언어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표현된 언어보다 그 사람의 속마음을 읽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는 깊은 욕구들을 알아차리고, 특별히 존중과 배려 받고자 하는 욕구에 민감해야 하는데, 화가 나고 싸울 때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사이좋은 부부도 화가 나면 싸우지만 절대 말꼬리를 잡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다섯째, 아무리 갈등 상황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한꺼번에 다 쏟지 않습니다. 감정 그 자체에는 생각이란 것이 없기에 감정이 북받치면 논리적 비약이 일어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튀어나옵니다. 일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더라도 감정을 조절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사이좋은 부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농담으로도 안 합니다. 말이 씨앗이 되는 경우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사이 좋은 부부가 꼭 하는 여섯 가지도 있습니다. 첫째 자기 배우자를 부르는 애칭이 있습니다. 허니, 자기, 귀염둥이, 깜찍이 등 삶의 재미와 유머를 녹아낸 애칭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상대의 기여를 인정합니다. 상대가 잘 하는 것, 도움을 준 것, 좋은 면들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칭찬합니다. 셋째 스킨십입니다. 나이 들어 스킨십이라니, 조금 망측하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겠지만, 만져야만 스킨십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의 눈길, 따뜻한 언어, 마주 앉은 식탁 등 다양한 접촉의 면을 늘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서로의 친구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경조사에 오가면서 또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내면서 상호간에 자주 교류합니다. 다섯째 매우 재미있는 현상인데, 한쪽이 말이 많고, 다른 쪽은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괜찮아!"입니다. '사랑해', '고마워'도 좋지만 '괜찮아'라는 말속에 담긴 인정과 수용력, 너른 품과 안정성이 이들 부부에게 가장 큰 편안함을 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 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배우자에게, 또는 가까운 사람에게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지 않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오늘 우리는 좋은 가정, 꿀 떨어지는 부부 관계, 소통 잘하는 부모자식 관계를 함께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역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는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연인 간의 사랑과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 다르고, 사제지간의 사랑과 친구 간의 우정 또한 그 결이 다릅니다. 보편적 인류애와 모든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 또한 대중가요 속 등장하는 사랑과는 층위와 분위기가 다르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사랑에 대해서 대체로 세 가지 용어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입니다.

흔히 에로스를 육체적 아름다움에 끌리는 감각적 본능에서 비롯된 사랑으로만 알고 있지만, 플라톤의 심포지온을 읽어보면 에로스는 완전을 향한 일관된 열정입니다. 우리는 늘 부족한 사람들인데, 그 부족함을 메꾸어 더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지요. 혼인생활을 비롯해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더 풍성하고 깊어지려면 우선 스스로 더 완전하고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에로스적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삶의 여러 조건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발현되지 못하고, 매우 일부분만 현실화됩니다. 분명히 더 나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도,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거나 추한 것에서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활발하고 능동적이고 자기주도적 성향의 여성이라도 조선시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태어난다면 본래의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로스적 사랑은 장애를 뚫고 환경을 극복하면서 원래의 자기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충동과 불굴의 의지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본 에로스적 사랑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되찾고자 하는 자기 완성의 추구입니다. 에로스적 사랑이 가정에서 꽃피운다면 각자가 지닌 개성이 존중되어 그 본래의 모습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 자녀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

필리아는 우리말로 하자면 "정(情)"에 가장 가까운 단어입니다. 정이 쌓이면 먼저 상대를 생각합니다.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먼저 챙기려고 하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를 설명하기를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바람이 쌍방적이면서도 그러한 상태를 쌍방이 인지하고 있는 품성상태'라 말합니다. 에로스가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면서 주로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면, 필리아는 내 앞에 서 있는 당신, 너를 생각하며 배려하고 헌신하는 인격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진실한 우정 속에서 필리아의 단면을 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지위 즉 왕의 아들의 지위를 존중합니다. 한편 요나단은 다윗의 능력과 그의 진실함을 인정해 줍니다. 그들의 동지애와 우정은 과도한 사울의 횡포 속에서 서로를 보호해 줍니다.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산다는 것, 즉 혼자 살지 않고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그 무엇이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야만 합니다. 서로 마주보며,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세상을 짊어지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서로 곁에서 함께 해 줄 때, 그 멍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랑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나의 완성을 위한 에로스나 상대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는 필리아를 넘어서 사랑 그 자체의 이유로 사랑하는, 그냥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상호-호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즉 주었기 때문에 받아야 하고,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주어야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그 어떤 조건 없이도 무조건 주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에로스와 필리아가 더 깊어지고 성숙하기 위해 우리는 아가페적 사랑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냥 사랑하겠다는 결단과 연습이 사랑 자체를 키우고 거기로부터 우리는 아가페를 느끼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되기, 거리두기, 열어놓기]

오늘 저는 설교 제목을 "하나되기, 거리두기, 열어놓기"라고 정했습니다. 이 단어들은 제가 생각하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또 다른 명칭이자 해석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커플 티도 사서 입고, 같은 취미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이 과정에서 자기만을 중심에 놓으려고 하면, 상대를 구속하려는 습성이 발생합니다. 사랑이 집착이 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부모의 자녀 사랑도 소유가 되고 집착이 되는 순간부터 잘못된 길로 가게 되고, 결국 자녀를 망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려는 사랑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은 바로 "거리두기"입니다. 숲속의 참나무와 삼나무가 서로의 그늘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적절한 거리두기 없이는 생명이 피어날 수 없습니다. 한 마음이 되고자 하고, 서로 맞추어 더불어 살아가고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만, 언제나 홀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서로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해지면 서로 허물이 없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허물없이 지내고 친숙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갈라지게 됩니다. 오래 사귀려면 반드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교회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은 땅덩이가 크니까 목회자가 다른 지역의 교회에 부임할 때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공항에 마중 나와 목회자의 짐을 들어주는 교인이 목회자를 떠나보낼 때도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끼리의 특별한 친밀함은 전체 공동체의 조화와 균형을 깨기도 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필리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뜻을 지닌 아가페를 "열어놓기"라고 재정의하고 싶습니다. 열어 놓는 것!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개방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잃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전부 기억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적절한 순간에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악을 선으로 갚으시고,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수용하는 능력이야말로 아가페 정신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과 사유가 경직될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도 생기 있게 살아가려면 낯선 것도 잘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공자도 나이 예순이 되었을 때 귀가 순하여서 그 어떤 소리도 거슬리지 않았다고 하고,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에서도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모든 것이 괜찮은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변할 필요도 없이,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받아 주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열어 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관계에서 이뤄야 할 최고의 단계입니다.

가정에서 부부나 자녀나 부모나 그 누구에게든 못마땅한 것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마땅하다는 판단은 결국 자신의 좁은 소견에서 온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아픈 상처와 불쾌한 감정 속에서 느껴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때로 거리를 두는 행위가 필요했고, 때로는 하나가 되어 치유하려는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사랑은 열어놓고 그 모두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성도 여러분! 전국의 신앙의 동지 여러분! 우리 모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 모든 것을 덮어주는 하늘처럼, 그 어떤 강도 내치지 않는 바다처럼 그렇게 받아들입시다. 꼭꼭 닫은 문이 아니라, 활짝 연 가슴으로 서로를 맞이합시다. 어떤 조건도 달지 맙시다. 서로가 그렇게 마음을 열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집니다. 열린 마음 속에서만이 하나님 나라도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 오월도 열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 행복한 가정의 달을 보내시고, 즐겁고 신나는 삶이 펼쳐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소중한 삶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기대어 살면서 긴 인생의 계절을 함께 겪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가족 구성원 한명 한명을 주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선물로 여기고 귀한 보물처럼 여기게 하여 주소서. 가족끼리는 속내를 털어놓고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특별히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속에서 한 마음이 되게 하시고, 때로 각자의 공간을 허락하면서도 늘 받아 주려는 마음을 지니게 하여 주소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아니라 더 큰 가족도 생각하게 하여 주소서. 신앙의 식구들, 겨레와 민족, 지구촌의 모든 인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 창조하신 한 가족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픈 곳에 마음이 쓰이고 관심이 가듯 이 시대에 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우리를 지켜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자녀로 담대하게 살겠다고 매 주일 다짐하지만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느새 흐트러진 우리들 자신을 보게 됩니다. 주님! 이 마음의 파도를 잔잔케 하소서. 몰아치는 광풍과 내리치는 폭풍을 진압하여 주소서. 주님 안에서 우리 영혼이 온전히 평화를 되찾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쉬시도록 우리 영혼이 고요함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오늘 주님 앞에 나올 때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을 드립니다. 이 감사의 예물 받아 주소서. 주님께 봉헌한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나는데 쓰이게 하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십시오. 괜찮다고 말해 주십시오. 넉넉한 마음으로 언제나 품어 주십시오.

* 축도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닌 것들을 굳건히 지켜주시고

거친 바다에서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육지에서도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서로 상대의 짐을 기꺼이 져 주고,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이끌어주시며

활짝 연 가슴으로 누구든지 맞이하는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피니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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