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선한 능력으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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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미가 6:6-8, 베드로전서 3:8-12, 요한복음 10:10-15

설교문

언젠가 한 TV에서 <라이프 오브 사만다 Life of Samantha>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2019년, SBS 창사 특집 4부작) 사만다는 아프리카 드넓은 초원에서 혼자 새끼를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 치타입니다. 하지만 '치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강인함과는 거리가 먼 치타입니다. 세 마리 새끼들을 사자나 하이에나와 같은 천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심지어 같은 종족인 수컷 치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날마다 사투를 벌여야 하는 엄마입니다. 치타 세계에서는 수컷이 종족 번식만 하고 떠나고 이후 출산, 육아, 독립까지 모든 과정을 암컷 혼자 맡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새끼들은 때때로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는 먼 거리에서도 새끼들의 가녀린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 새끼를 찾아냅니다. 넓은 초원 위의 바람 소리, 수많은 다른 동물들의 울음소리 속에서도 어미는 신통하게도 자기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1절) 하셨습니다. 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14절) 말씀하셨습니다. 성서 전체에서 '선한 목자'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 이런 목자는 일찍이 이사야와 에스겔이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리라]"(40:10-11) 했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34:5)라고 한탄하면서, 그 이유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34:2) 때문이며 이제 주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어 좋은 꼴을 먹이실 거라 예언했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동방박사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 2:6)라고 이 예언을 확인하였고,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이르러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목자임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이 말씀은 당시 청중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는 누구도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선한 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은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목자가 죽으면 남은 양들을 누가 보호하라는 말이요?'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보였을 겁니다. 사실 구약성서에서도 목자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인 예수는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면서 양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구하는 '선한 목자'라는 요한의 고백은 성서 전체에서 매우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가짜 목자, 곧 '삯꾼'과 달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했습니다. 삯꾼이 누구입니까? 임금을 받으려 목자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는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삯꾼은 임금만 받으면 끝이기에 양에 대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라]."(12-13절) 이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1절) 하셨습니다. 이는 가정이 아닙니다. 실제로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머지않아 실제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고 했는데, 정말로 '끝까지', 곧 '죽기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구약성서가 목자인 하나님이 자기 양 떼인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신약성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기 양들을 위해 실제로 목숨을 내놓은 진정한 사랑의 목자임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양들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양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 목장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일축합니다. 양이 멍청하다고 하는 말은 소를 치는 카우보이에게서 시작된 말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양은 소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는 뒤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채찍으로 때려야 떼를 지어 앞으로 갑니다. 그런데 양들은 목자가 뒤에서 소리를 내면 그 목자에게 모여듭니다. 양들은 쫓겨가지 않고 인도되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입니다. 소는 몰아댈 수 있지만 양은 인도해야 합니다. 양은 그들이 신뢰하는 목자가 앞서가면서 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은 그 목자를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의 음성입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하셨습니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절) 말씀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싱글맘 사만다가 그 드넓은 들판 위의 바람 소리, 수많은 다른 동물들의 울음소리 속에서도 신통하게 자기 새끼들의 가녀린 울음소리를 알아듣는 것처럼,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 음성을 '안다' 했습니다. 성서에서 '안다'라는 말은 밖에서 떨어져 보아서 아는 게 아닙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요한 15:5) 있는 게 아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접목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서의 앎은 친밀함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14-1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요한 17:21)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성서의 앎은 친밀함입니다. 친근함입니다.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에서도 우리가 그것을 기도했습니다. "...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십시오. / 그러면 이 다음에도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까비르, <구도자의 노래> 종결구.)

자기의 양을 사랑하기에 그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이 목자의 마음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어떤 언어가 이 사랑의 마음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린 자녀 앞에서 이렇게 묻는 어느 부모의 마음 같다 할 것입니다. 한 작가의 글 <너를 안아도 될까?>를 읽어봅니다.

"너를 안아도 될까? / 네가 다 자라기 전에 한 번 더. /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 너의 신발끈을 한 번 더 내가 묶게 해 줘. / 언젠가는 너 스스로 묶겠지...// 네가 옷 입는 걸 도와줘도 될까?... / 네가 탄 수레를 끌어도 될까? / 내가 선물을 골라 줘도 될까? // 어느 날, 네가 나를 보살필 수도 있겠지. /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널 보살피게 해 줘. / 나는 네가 하는 모든 작은 일들의 / 일부가 되고 싶어. // 오늘 밤 내가 너의 머리를 감겨 줘도 될까? / 욕조에 장난감을 넣어도 될까? / 너의 작은 열 개 발가락을 세는 걸 도와줘도 될까? / 너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기 전에. // 네가 야구 팀에 들어가기 전에 / 너에게 한 번 더 공을 던져 줘도 될까? / 그리고 한 번 더 너의 곁에 서도 될까. / 네가 넘어지지 않게? ... // ... 너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주게 해 줘. / 네가 어리고, 아직 시간이 있을 동안. // 나는 그날이 올 걸 안다. / 네가 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할 날이... // 그러니까 내가 널 안아도 될까?/ 언젠가 너를 혼자서 걷겠지. / 나는 하루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 지금부터, 네가 다 자랐을 때까지."(브래드 앤더슨, <너를 안아도 될까?>)

부모는 자식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살리려는 존재입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사랑이신 하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 10:10)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생명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풍성히 얻게 하시러 예수께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카타콤은 로마제국의 무서운 박해를 피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예배하던 지하묘지입니다. 언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예배를 드렸고, 그 지하묘지의 벽에다가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3백 년이나 지하묘지에서 그리스도인들 예배드릴 때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바로 '선한 목자' 그림입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 아니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는 선한 목자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렸습니다.

사실 카타콤의 선한 목자 벽화들은 그리스-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양이나 송아지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목자의 모습은 그 시대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목자들을 양이나 송아지를 힘들게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을까요? 아테나 여신이나 양치기들의 신이라는 헤르메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양인 송아지를 신에게 바쳐 자기의 안위와 복락을 빌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카타콤의 기독교 벽화에서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분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그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스러웠던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이 되어 준 건 바로 이 '선한 목자'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단순한 취미나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한 희망의 노래이며 가장 절실한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이 죽기 전 약혼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1944년 12월 19일,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쓴 편지입니다. "내 사랑 마리아, 성탄절에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고, 이 편지를 통해 부모님과 형제자매,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이곳 새로운 형무소에서는 매우 적막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한순간도 내가 혼자라거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선한 능력이 아침에나 저녁에나 우리를 지켜줍니다. 오늘 우리는... 더욱 이 선한 능력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선한 능력으로... 오늘도 나는 억새처럼 강하게 살며 활짝 열린 가슴으로 새해를 맞으려 합니다." 이 편지에 동봉한 시가 하나 있었지요. 제목은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입니다. 이 시는 여러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교회의 찬송가 널리 불리는데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부릅니다. 실로 성서는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다]"(느헤미야 2:8)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에스라 8:18) 산다고 말합니다. 그 선한 능력이 오늘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서는 이 '선한능력으로' 우리에게 선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예레미야 6;16) 말씀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 6:8)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 5:29) 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도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6:19)라고 말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9, 21)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예배]를 기뻐하[신다]"(히브리서 13:16)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기자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위해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11, 9) 했습니다. 성서는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했다]"(요한3서 1:11)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에베소서 2:10, 새번역)라고 우리의 존재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가 그의 '선한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옳게 살고 선을 행하노라면 고난을 겪는 경우가 생깁니다. 선을 행할 때 세상은 그 행위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성서도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구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베드로전서 3:13-14a)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의를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 5:10) 하셨습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자는 수난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행복한 일로 보라고 말합니다. 가장 최고의 행복인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요? 지상에서 이 하늘의 말씀과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의 벽에 붙어 있는 한 시를 읽어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 자기중심적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푸십시오. //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십시오. //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 내일이면 잊혀질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십시오. //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십시오. //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십시오. //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십시오. //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십시오. /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십시오." 이 시의 제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이미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이 세상을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17) 했습니다. 선을 행하다 고난을 당하면 첫째로 우리 양심이 떳떳하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보상하시며, 셋째로 결국 그 고난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고난이 되고, 마지막 넷째로 마침내는 그 선이 악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은혜에 참여한 자"(빌립보서 1:7)라고 부릅니다. 누가 은혜에 참여한 자입니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빌립보서 1:10-11) 자입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선한 눈을 가진 자"(잠언 22:9)로, "입이 선한 자"(잠언 16:21)로, "자신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에베소서 4:28) 자로, 그렇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는]"(디모데전서 6:11) 은혜에 참여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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