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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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58:1-5, 디모데후서 3:1-5, 마태복음 6:16-18

설교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세 가지 종교적 의무를 지켜야 했습니다. 기도, 금식, 구제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도와 금식과 구제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종교 행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는 이 세 가지 종교적 의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에 대해 예수께서 공통으로 하신 말씀은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입니다.

당시 스스로 경건하고 의롭다 여긴 종교지도자들은 구제할 때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시끌벅적하게 했습니다. 사람 많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보이며 금식했습니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는데, 그 이유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장날이 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우 신랄(辛辣)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보다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위선은 예수께서 가장 역겨워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걸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5,16절)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라는 뜻입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 이사야 58장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혹은 기도의 응답을 바랄 때, 혹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금식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나라가 아예 망한 다음에는 날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본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을 담은 신앙 행위입니다. 가장 금욕적으로 절제하는 최상의 예배 행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거룩한 행위가 허물과 죄가 되었다고 이사야 예언자가 외칩니다.(1절)

이사야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과 죄를 일삼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기를 좋아하며 공의를 행하는 '척'하는 모습을 고발합니다.(2절) 이어서 금식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보시지도 않고, 알아주시지도 않느냐고 항변하며 금식하는 날에도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 것을 폭로합니다.(3절)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도 법정에서 소송하고 주먹질하는 폭력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비판합니다.(4절) 이사야는 이런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5절)

어느 가정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이제 아흔이 넘으신 아버지의 졸수연(卒壽宴)을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자녀들을 기르신 아버지가 장수의 복까지 누렸으니 얼마나 기쁘고 축하할 일입니까. 자녀들은 힘을 모아 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요리를 화려하게 준비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문정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구순 잔치의 모양새가 조금 이상합니다. 자녀들은 초대한 지인들에게 생일잔치의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정작 늙으신 아버지는 생일상 한가운데 초라하게 앉아서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 게 아닙니까. 알고 보니 아흔이 넘으신 아버지는 일찍이 치매가 와서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과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자녀의 지인들이 아버지께 와서 인사를 드리자 옆에 있던 큰아들이 웃긴다는 듯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아, 그럴 필요 없어요! 이 노인데 치매라서 말해도 못 알아들어.'

아흔 살 생일을 맞은 아버지는 낯설고 두려운 이 잔치가 끝나면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녀들은 벌써부터 누가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셔드릴까 귀찮은 일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눈치싸움 중입니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생일잔치입니까? 자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여 이리도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단 말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요? 만일 아버지가 젊은 시절의 아버지로 되돌아온다면 자녀들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을까요? '이런 잔치 다시는 하지 말라! 왜 생일로 아버지를 모욕하느냐? 무엇이 중한지 다 잊어버린 자녀들아!'

이사야서 첫 장엔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이사야 1:11-15,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이 금식을 계속하는 이유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종교적 만족감을 느끼고, 사람들 앞에서 영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며, 종교적 행위를 통해 세속적 유익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구순 잔치에 덩그러니 앉아 계신 아버지와 같이, 이스라엘은 화려한 금식의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냉대(冷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척, 하나님을 알기 좋아하는 척, 공의를 행하는 척, 깨끗한 척, 거룩한 척했으나 사실은 하나님 앞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인정받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던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보이나 신앙의 능력은 상실한 자들 말입니다.

'사막 교부(敎父)와 교모(敎母)'(Desert Father and Mother)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시 교회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일반 '교부'(Church Father)와 달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막으로 들어갔던 이들입니다.

로마제국에서 300년 가까이 지속되던 기독교 박해는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식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박해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공인한 '제국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시민이면 누구나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환경이 바뀌자 교회의 체질과 속성도 바뀌었습니다. 지하 묘지에 숨어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귀족들이 제공한 화려한 저택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배 참석자들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여성과 노예가 줄어든 대신 귀족과 부자가 늘어났습니다.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의 의복도 화려하게 변했습니다. 기독교의 빈곤의 시대가 가고 풍요의 시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 와중에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디옥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로마 교회가 서로 경쟁했습니다. 극심한 교리 논쟁이 벌어지며 교회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해받던 시대에는 없었던 현상입니다. 이 때 홀연히 도시를 떠나 사막과 광야로 들어간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사막과 광야로 들어간 기독교인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들어갔다면 새로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믿음의 궁극적 목표인 '그리스도의 완전'(perfectio Christi)을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사막과 광야 혹은 산속에 움막을 짓거나 동굴 속에서 수십 년간 은둔(隱遁)해 살며 오로지 기도와 묵상, 노동과 청빈(淸貧)을 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서 기도의 능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도시 교회의 교인들이 사막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막에서 회복된 십자가의 영성(靈性)이 다시 도시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풍요와 안락의 시대에 소멸될 뻔 했던 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집트 선교사로 일하다 들어온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을 만나 본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여러 번 있다고 했습니다. 만나보니 어떤 분들이냐 물었습니다. 즉각 "눈이 맑았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라는 말도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눈은 사막 밤하늘의 별빛처럼 맑았다 합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합니다.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 눈에서는 내면의 감정이 저절로 흘러 내비칩니다. 맹자는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어둡다" 했습니다. 입을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눈동자는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원어는 '가르디아'인데 사람의 생각이나 의지, 이해나 판단, 그리고 정신이나 양심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담긴 어떤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은 모든 행동과 실천의 시작이 거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하면서 '마음부터' 사랑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유명한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사실 유대인들의 세 가지 종교적 의무인 기도, 금식, 구제도 여기서 나온 겁니다. 기도는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금식은 '뜻을 다하는' 것이며, 구제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부터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명기 34:7, 새번역) 했습니다. 그는 눈빛이 맑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맑았기에 눈빛이 맑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출애굽기 33:11, 새번역)라고 성서가 기록합니다. 진실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빈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 그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청결한 마음, 바로 거기서 경건의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은 맑고 깊어야 합니다. 눈빛이 맑고 깊으려면 내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욕심을 자꾸 비워내야 합니다. 불안은 자꾸 덜어내야 합니다. 불의한 생각을 자꾸 잘라내야 합니다.

어릴 적 밥 먹기 전이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손 씻고 와라."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엔 거르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발 닦고 양치질해라." 그때마다 어린 나는 "손 깨끗해서 안 씻어도 돼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별로 한 것 없어 괜찮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누칠해 거품을 내다보면 언제나 시커먼 땟국물이 흘러내리곤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마음에 더러움이 쌓이고 쌓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베드로전서 3:4,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속 사람, 곧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단장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얼굴을 화장하고 방은 열심히 꾸미면서 마음은 방관할까요? 혹 우리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속 사람을 단장하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을 '키질'해야 합니다. 키질이란 곡식을 까부를 때 하는 행동입니다. 추수한 곡식을 키에 올려놓고 키질을 하면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집니다. 알곡은 키 위에 남고 쭉정이나 검불은 키 아래로 떨어집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타고난 좋은 성품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음을 키질한 결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내 마음을 키질해서 알곡과 섞여 있는 쭉정이와 검불을 걷어내야 합니다. 매일 손과 발을 닦듯이 우리의 마음도 날마다 닦고 닦아서 청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 그 깨끗한 마음에서 경건의 능력이 나옵니다. 믿음의 힘, 신앙의 능력이 나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 2:13) 말씀했습니다. 내 겉의 옷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회개와 경건의 모습은 그렇게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마음을 찢으라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요엘 선지자의 말처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함부로 회개했다고, 함부로 용서받았다고,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회개, 용서, 사랑이 너무 값어치가 떨어졌습니다. 회개했다고, 용서받았다고, 사랑한다고 함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개와 용서와 사랑이 진정한 회개와 용서와 사랑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회개했다고, 용서받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때 114 전화번호 안내 멘트가 이것이었지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교환원은 정말로 나를 사랑했을까요? 사랑을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사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 없는 말과 사랑 없는 행동입니다. 사랑의 겉모습은 있으나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은 그 이유 때문 아닙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 그 말은 단지 그를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사랑은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던가요. 저는 결혼할 때 당연히 제 아내를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기가 태어났고, 어느 날 아내와 아기가 나란히 누워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아, 내가 저 두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없이 그 사랑이 진정이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는, 이렇게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때에는 옷을 찢는 겉모양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진정한 회개의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예배와 기도, 경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의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빈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닙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마태 6:6)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태 6:17)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와 같은 종교적 행위는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진심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4, 6, 18)라고 예수님은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닦고 또 닦아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그 믿음의 능력으로 나 자신과 내 가정과 그리고 일터를 맑고 깨끗하게 만드십시오. 마음이 청결해 눈빛이 맑은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큰 은총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에베소서 1:4)라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를 실천하며 이 세상에 경건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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