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종종 손꼽히는 것은 교회의 거창한 비전 선포 아래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능화되고 수단화되는 데서 오는 소외감이다. 이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며 세계 복음화를 꿈꾸는 것은 좋으나 그 과정에서 자칫 신자들이 전체라는 큰 그림을 작동하게 하는 기계적인 부품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신자 개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다뤄져야 할 생명인데 이들이 거대한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화 되어서 부품처럼 소모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성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교회는 역사의식이 뚜렷한 공동체인 경우가 많다. 확고한 하나님 나라 비전은 좋은데 양날검처럼 그만큼 신자들을 수단화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는 직선적이면서 환원주의적인 시간 이해를 근거로 하는데 이러한 시간 이해가 갖는 문제는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거나 미래로 돌려 희석시킴으로써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나사로의 부활사건에서 마르다가 보여주는 시간 인식도 이러한 직선적이며 환원주의적인 시간 이해를 반영한다. 마르다는 죽은 나사로라는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에 함몰되어 부활의 주님을 눈 앞에 두고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환원주의적 시간 이해가 갖는 함정, 즉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마르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마르다는 직선적인 시간 이해에 근거해 과거 또는 미래로 현실 시제인 현재를 규정하는 시간 이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거나 미래로 돌려 희석시킴으로써 현실 왜곡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에서 엿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시간 이해 또한 마르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환원주의적인 시간 이해는 인과율과 목적론을 낳는데 이것이 문제인 것은 불합리성과 무의미를 극복한다는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정죄와 기만이라는 역기능을 낳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겪는 비극적 사건을 자기 또는 타자의 잘못에서 찾는 폐쇄적인 인과율이나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져 사람을 수단화 하는 목적론이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역동적인 신앙 현실을 고착시키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병든 나사로가 비가역적 상태인 죽음에 이르자 돌이킬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친 것을 원망한다. 마르다의 현실 시제인 현재는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비극적 사건에 의해 억눌려져 있다.
그래도 마르다는 나사로의 죽음이 이미 종료된 사건이지만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는 믿음을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비극에 완전하 지배당하고 있는 마리아는 슬픔에 잠겨 주님이 찾기 전까지는 집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주님이 부르신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뒤늦게 일어나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소연을 한다.
과거에 사로잡힌 이러한 시간 이해는 당장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부활의 주님조차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비가역적인 상태인 과거의 사건마저 돌이킬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지만 그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르다의 현재가 과거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마르다나 마리아에게 현재는 과거가 이미 벌여낸 것을 그저 뒤치닥거리하는 부차적인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 이들이 현실 시제인 현재를 과거로 환원시켜 자기들 스스로 숙명론을 조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 앞에 슬픔에 잠겨 있는 마르다의 인과율적 시간 이해를 교정하고자 부활의 주님은 먼저 비가역적 상태가 되어버린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현재를 직시할 것을 당부한 주님 앞에서 마르다는 이번에는 현재를 미래로 환원시켜 부활사건을 미래 목적론적으로 새긴다. 이는 그러나 현재를 미래의 특정 시점, 즉 죽은 자가 부활하는 날을 위하여 수단화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과거 환원적인 인과율이든 미래 환원적인 목적론이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주님은 "나는(I am)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현재형까지 써가며 다시금 인과율의 저주에 이어 목적론의 기만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한다. 죽음이라는 비가역적 상태조차 되돌이킬 수 있는 주님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며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주님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 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다. 그렇게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되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과거의 기억을 오늘의 현실로 돌이켰으며 동시에 공수표나 기만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미래의 기대를 오늘의 현실로서 새겼다.
이처럼 주님은 직선적인 시간 의식으로 인해 시간의 앞과 뒤만 보고 있는 마르다의 시간 이해를 시간의 위와 아래를 볼 수 있는 현재적이며 공간적인 시간 이해로 교정해 주고 있다. 직선적인 시간관에 함몰되어 현재의 시간을 과거 혹은 미래로 환원시키는 시간 이해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입체적이며 공간적인 사건인 부활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죽은 자를 방불케 하는 한국교회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거 환원적인 인과율에 의해 교회 내 정죄 문화를 양산하거나 미래 환원적인 목적론에 의해 비전이란 큰 그림을 앞세워 사람을 기능화, 수단화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현실 시제인 현재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주님은 오늘도 죽은 나사로와 같은 절망적 상황을 맞이한 한국교회에 교권주의, 배금주의, 기복주의, 하이어라키 등 무덤의 돌을 가리키는 것들을 "옮겨 놓으라"며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의 용기 있는 결단과 적극적인 참여에서 비로소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나는 부활 사건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사건의 시제는 이처럼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