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 사람을 가졌는가?"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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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9:23-24, 로마서 12:15-18, 요한복음 15:12-14

이문재 시인이 <농담>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런 농담 하나 했습니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그윽한 풍경이나 /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후략)"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저 목사도 농담한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디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이 음식 같이 먹어야 하는데... 다음엔 꼭 같이 와야지!' 어제저녁 바로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제 생각이 났던지 혼자 다 못 먹고 저 먹으라 싸 왔더군요. "그윽한 풍경이나 /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두 주 전 주일예배에서 함께 드린 공동의 기도가 지난 두 주 동안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인 것 같아서 꺼내 보고 또 거내 보았습니다. 김재진 님의 <또 한 번의 기도>가 기억나십니까? "내가 /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 더 외롭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 내가 /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 듯한 /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이 되지 않게 하소서. /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져도 / 눈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소로 남으며 / 내게 기대는 그 누군가에게 / 그 자리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 고마운 존재가 되게 하소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 자신은 스스로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혹 나는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더 외롭게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 나는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 듯한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은 아닙니까? 순간을 살다 가는 게 인생인데 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남을까요, 아니면 '눈물'로 남을까요?

미국 원주민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그리고,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겠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것 같습니다. 울면서 태어나 웃으면서 가는 게 행복한 인생일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축복과 웃음 속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비통과 눈물 속에 떠나는 삶이 위대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해인 님의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순간을 만났어도 / 잊지 못하고 /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 매순간을 만났어도 / 잊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 내가 필요로 할 때, 날 찾는 / 사람도 있고, / 내가 필요로 할 때, / 곁에 없는 사람도 있다. // 내가 좋은 날에 / 함께 했던 / 사람도 있고, / 내가 힘들 때 / 나를 떠난 사람도 있다... /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 보고 싶은 사람이고, /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 외로움은 누군가가 / 채워줄 수 있지만, / 그리움은 / 그 사람이 아니면 / 채울 수가 없다."

외로움보다 더 아픈 게 그리움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누군가 곁에 있으면 덜어낼 수 있는 외로움보다 더 아프고 시린 것 같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으로 함께 읽은 함석헌 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바로 이 짙은 그리움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글입니다. '한국의 간디'로 불린 평화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 글은 지금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기념비로 세워져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나' / 일러 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한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이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아니오, 가지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많고, 세 사람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그런 진정한 친구 하나 있는지 저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보지 않으면 늘 보고 싶은 사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늘 든든한 사람,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한 사람, 무슨 이야기도 마음의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습니까?

지난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화가 이중섭 선생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화가의 여러 작품에서 감명을 받았지만 특히 그가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은지화(銀紙畵)들을 여러 점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든 게 귀하던 시절, 화가는 그림 그릴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겼지요. 그 그림들 앞에서 문득 시인 구상 선생과 화가 이중섭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구상 시인이 병치레하느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구상은 이중섭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 다녀갔는데 유독 이중섭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상 선생은 기다리다 못해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늦게서야 화가가 시인을 찾아왔습니다. 구상 선생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나무랐습니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올 때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이중섭은 말끝을 흐리면서 손에 들고 온 무언가를 구상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게 뭔가?" "풀어보게, 실은 이것 때문에 이렇게 늦었네. 내 정성일세." 구상은 이중섭이 내민 꾸러미를 풀어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천도복숭아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이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구상은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과일 하나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이중섭이 과일 대신 과일 그림을 그려 오느라고 늦게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래 알았네, 내 이 복숭아 먹고 빨리 일어나겠네." 구상은 이중섭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셨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 곁에 계셨습니다. 갈릴리를 돌아다니실 때도 동전 하나 지니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으냐 말아야 하느냐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그 세금으로 바치는 동전 하나 보여달라고 하셨다(마태 22:16-22)라는 기사는 그분이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 8:22)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외롭고, 슬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돼주셨습니다. 성서는 그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어...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빌립보서 2:6-8, 현대인의 성경)하셨다고 말합니다. 함석헌 선생이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나' / 일러 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사실 나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사형 길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다."(요한 15:12-14, 새번역) 그대, 이 사람을 가졌습니까?

그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은 그대 '그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는 물음은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지에 관한 물음입니다.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는가만 묻지 마시고 나는 그런 친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를 내놓기는커녕 더욱 꽉 움켜쥐고 주위를 제대로 쳐다본 적 없었으니 당연한 노릇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대, 누구에겐가 진정한 친구입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 물어보지도 않는다. /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느 시인이 개탄합니다.(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그게 사랑이라고 강변하며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 노력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면서 구제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느껴도 될만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은 병적인 자부심으로 흘렀습니다.

나만큼 의로운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 나만큼 똑똑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 나만큼 헌신적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 그들의 자부심(自負心), 곧 스스로 능력이나 가치를 믿고 자랑으로 여기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 대한 멸시(蔑視)로 흘렀습니다. 남들은 다 하찮게 보이며 깔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니 더는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에게 할 이야기는 있었지만 들을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백이 더는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자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다 비난하고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들의 법관을 자처했습니다. 경건의 옷을 입고 사람들의 삶을 판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정 기준은 늘 자의적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옳다 하고 불리하면 틀리다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갈라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인과 죄인을, 남자와 여자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낙인을 찍어 매장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요즘 말로 엘리트들입니다. 그들은 학식과 열정과 경건의 모습을 다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감(共感, empathy)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대신 냉담(冷淡, apathy)했습니다. 차가웠습니다. 자기 의로움이라는 폐쇄회로 안에 갇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에는 자기 생각으로, 권위로, 경험으로,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 다른 이들의 목을 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목을 조릅니다. 이보다 더 악마적인 일이 있을까요?

예쁜 말만 쓰던 나태주 시인이 비수(匕首) 같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사탄은 있는가>입니다. "사탄은 있는가?... 사탄은 있다 / 아주 무서운 모습이거나 징그러운 모습이 아니고 / 아주 예쁘고 상냥하고 안쓰럽기까지 한다는 데에 / 문제가 있다 / 그래서 사탄이 사탄이다... // 가끔은 가족의 일원으로 오고 / 정다운 친구나 이웃으로 오고 / 애인의 모습으로도 온다 // 올 때는 모른다 / 와서 머물 때도 모른다 / 그가 떠난 뒤 한참 만에 아차, 하면서 / 깨닫게 된다 / 그래 바로 네가 사탄이었구나!... // 보다 현명한 사람은 / 두 번째 사탄이 다가올 때 / 그것을 알아본다 / 유일한 방법은 피하는 길이다 / 숨는 것이다 ... //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 사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 나의 가족에게 친구나 이웃에게 / 심지어 애인에게 사탄으로 /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무서운 일이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 더 외롭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 듯한 /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입니까?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질 때] / [미소가 아니라] 눈물로 남는" 존재는 아닙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 존재입니까?

"예수는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시인"이라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들, 가슴으로 만난 이들, 존체 자체로 만난 이들은 자기 속에 있는 꽃을 피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고기 잡던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고, 아홉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성 프란체스코는 모든 인간의 영혼 속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게 생긴 송충이도 있다고 했습니다. 송충이는 징그럽고 무섭지요. 그런데 이 송충이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송충이에게 날개가 돋아서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고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영혼에 다가가 그들 안에 있는 나비의 유충에게 '사랑한다'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으신 그의 값없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가슴으로, 인격으로, 온 존재로 예수와 만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시인입니다. 차가운 영혼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시인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프란체스코가 클라라를 불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의 깊은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코는 클라라에게 잠시 떨어져 있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클라라가 힘겹게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프란체스코는 '여름이 와서 장미꽃이 필 때'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산야에 별안간 오색찬란한 수천 송이 꽃들이 피어나는 게 아닙니까. 클라라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허리를 굽혀 장미꽃 다발을 만들어 프란체스코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꽃이 피어납니다. 눈 덮인 산야에 수천 송이 꽃들이 피어납니다. 사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사랑에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겉으로 쓰고 있는 가면을 한 겹만 벗겨내면 그 안엔 사랑에 굶주려 파리해진 영혼이 보입니다. 송충이 같은 유충이 보입니다. 그러나 시들어버린 눈, 정감 없는 말씨, 거부하는 몸짓에는 지레 주눅이 들어 피어보지도 못한 채 안으로만 움츠리고 있는 꽃이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꽃 말입니다. 나비가 되고 싶은 유충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사랑의 시인 예수님을 따라 나도 모든 존재에게 다가가 그들 안에 있는 꽃에게, 그들 안에 있는 나비의 유충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 수 없을까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예레미야 9: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5-18)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 위해 진실하고 날 보는 자 위해서 정결하고... 저 원수도 내 참된 친구 삼고 남 주면서 행한 일 일으[며] 늘 온유 겸손하여 늘 섬기며 기쁘게"(찬송가 465장) 사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가까이 있어도 늘 그리운 마음이 사랑이라고 하는군요. 내가 기쁠 때 찾아가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슬플 때 찾아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라고도 하는군요.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상상 속에 있는 것은 / 언제나 멀어서 / 아름답지 // 그러나 내가 / 오늘도 가까이 / 안아야 할 행복은 // 바로 앞의 산 / 바로 앞의 바다 / 바로 앞의 내 마음 / 바로 앞의 그 사람 // 놓치지 말자 / 보내지 말자."(이해인, <가까운 행복>) 여러분, 그런 사람을 가졌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나의 친구라고 하신 그분을 여러분은 가졌습니까?

"그가 무슨 교회에 다녔는가보다는 / 그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였는가로, / 그가 어떤 교리를 가졌는가보다는 / 그가 진정 이웃의 진실한 벗이 되어주었는가로 / 한 사람의 인생은 평가되나니. // 그가 세상을 떠날 때 / 신문에 쓰이는 평가보다는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애도하는지, / 인생의 평가는 이런 것이니라."(작자 미상, <한 사람의 인생은>) 울면서 태어나 웃으면서 가는 게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생이 모든 영혼을 시인으로 만드시는 사랑의 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참 친구 삼아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져도 / 눈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소로 남으며 / 내게 기대는 그 누군가에게 / 그 자리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 고마운 존재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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