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스바냐서 3장 1-5절, 2장 1-3절
설교문
[야훼의 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스바냐서는 "야훼의 날"이 다가온다는 것이 핵심 주제입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玄孫)으로 히스기야 왕이 바로 스바냐의 고조할아버지가 됩니다. 구약성서를 통틀어 스바냐서에서만 유일하게 예언자의 족보를 적으면서 스바냐의 가문을 명시하고 있는데(1장 1절), 이것은 스바냐가 일반 평민이 아니고, 왕족으로서 당시 국제 질서나 국내의 왕실 정치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바냐가 활약하던 당시 남부 러시아 출신의 기마민족이었던 스키타이 사람들이 코카서스 산맥(Caucasus Mountains)을 넘어 앗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침략해 왔고, 거기에서부터 기원전 627년에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애굽에 이르기까지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유다가 직접 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해변 지역에 사는 블레셋 족속이 공격을 당합니다. 국제 질서의 변동 속에서 스바냐는 야훼가 심판하시는 날의 도래를 생각하면서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백성에게 야훼의 날은 축제의 날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백성과 민족에게 야훼 하나님의 도래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훼의 날'이란 그것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생명의 날이 될 수도 있었고, 저주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야훼께서 오시는 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도성은 심판을 받을까요? 아니면 축제를 열게 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스바냐서 3장 말씀에 따르면 심판을 받을 확률이 너무나 높습니다. 스바냐 예언자는 예루살렘 도성의 잘못을 낱낱이 밝힙니다.
"망하고야 말 도성아, 반역하는 도성, 더러운 도성, 억압이나 일삼는 도성아,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는구나.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다. 재판관들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저녁 이리 떼다. 예언자들은 거만하며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제사장들은 성소나 더럽히며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는 공평하시어,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신다. 아침마다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래도 악한 자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3장 1-5절)
스바냐는 예루살렘을 더러운 도성, 하나님께 반역하는 도성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도시이면서도 주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하고 반역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일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스바냐는 정치적 지도자들, 종교적 지도자들 모두가 백성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이리 떼나 사자들처럼 마구마구 먹어 치운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언에도 악한 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악을 행합니다. 그러자 예언자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권면을 합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는 백성아!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세월이 겨처럼 날아가기 전에, 주님의 격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함께 모여라. ~ 중략 ~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올바로 살도록 힘쓰고, 겸손하게 살도록 애써라.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행여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2장 1b-3절)
스바냐는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도 화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올바로 살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살도록 애쓰라는 것입니다. 스바냐의 조언을 분석해 보면 심판을 면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으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명령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대를 살피고 우리의 신앙과 삶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야훼 하나님이 오신다면]
만약 수개월 내로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즉 야훼의 날이 우리 인류에게 도래한다면 과연 우리는 예언자로부터 어떤 소식을 듣게 될까요? 좋은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그런데 이미 나쁜 소식들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1일 에게해에서 발생한 사이클론 대니얼이 지중해를 건너 리비아를 덮쳐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였고, 리비아 동북부 전역이 해를 입었는데, 특히 데르나에서는 댐 2개가 연달아 붕괴하여 최소 1만 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20mm에 불과한 데르나 지역에 갑자기 하루 만에 이를 초과하는 400mm의 비가 내리자 제벨 아크다르 산지에서 발원하여 데르나에서 지중해와 합류하는 와디 데르나가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아마르 카다피 집권기에 와디 데르나에는 상류와 하류에 각각 하나씩 댐 두 개가 세워지는데, 이후 10여 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인해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번 홍수에 두 댐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자 데르나 시가지의 저지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극단적인 날씨들은 이미 인류에게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리비아와 같이 이런 위기를 감당할 만한 정부와 제도를 갖추지 않으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대형 참사들이 계속 생기게 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정부가 적절하게 기상 예보를 하고 사전에 대피 명령을 내렸다면,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세계 기상 기구가 홍수 발생 72시간 전에 모든 정부 당국에 이메일과 언론을 통해 이번 참사를 일으킨 사이클론 다니엘의 위력을 알렸는데도, 동서로 분열돼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리비아에서는 대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 세계가 나서서 돕고 있지만, 거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리비아는 이 홍수 재앙에서 회복되는데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북극권과 중위도를 나누는 제트기류를 약화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속한 중위도 지역에 폭염과 폭우, 극강 한파가 자주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극단적인 날씨 변화에 결코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리비아 홍수 직전에 모로코에서는 강도 6.8의 지진이 일어나 거의 3,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로코는 상대적으로 지진 안전지대여서 그동안 대비가 부족했는데, 이번에는 생각지 못한 강진이 발생했고, 그래서 피해가 더 컸습니다. 우리나라도 상대적으로 지진 안전지대로 여겨지지만, 2016년 경주에서는 5.8의 지진이, 다음 해는 포항에서 5.4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도권에서 발생한 지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자가 예전에 지진이 났던 지질과 지형 연구, 과거의 지진 사례를 연구하여 우리나라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진의 최대 규모를 6.5-7.0 정도로 예측하기도 합니다. 만약 서울 지역에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하면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와 수백조 원의 경제손실이 발생하며 규모 7.0 지진이 발생하면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와 수천조 원의 경제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위기 상황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100km 속력으로 달리는 차보다 200km나 300km로 달리는 차가 더 많은 사고가 날 확률이 높은 것과 같습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금 인류가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구 온도가 1도 오르는 것을 100km에 비유한다면 1.5도는 150km, 2도는 200km로 달리는 자동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재앙의 현실을 만든 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에 있습니다. 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과 같은 전능성을 얻으려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던 선악과를 따 먹었듯, 오늘날 인류가 더 잘 살고 편리하게 살고 더 큰 행복을 누리려고 탐욕을 부리면서 지구의 3분의 2 이상을 정복하고 개발하면서 이제 더 이상 지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생명체와의 공존을 기대하셨지만, 인간은 자신을 먼저 생각했고, 다른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고, 실제로 지구의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주님을 찾아라!"는 스바냐의 명령은 오늘 우리 인류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함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우리 인간은 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함부로 나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탄소 중립 즉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050년까지 이 목표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야말로 인류는 2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55% 줄이기로 했는데, 57%로 상향 조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문재인 정부 시절 2030년까지 40% 감축 목표를 세웠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서 탄소 중립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생에너지 발전량 목표를 30.2%에서 21.6%로 하향 조정하고, 오히려 원전 비중을 23.9%에서 32.4%로 상향했습니다. 40% 감축 목표를 위해서 매년 78조원의 재원이 필요하지만, 현 정부는 18조만을 배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소 중립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발전 시장의 96%에서 재생에너지가 화석 연료보다 싸졌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화석 연료가 더 쌉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4%에 드는 희귀한 나라입니다. 게다가 지금 전 세계는 재생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팔 수 없게 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업 경쟁력과 경제적 전망도 매우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스바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두 번째 명령은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다양한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인류는 서로 협력하고 올바른 길을 걸음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한 역사가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 중 하나인 맹자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늘이 내려 준 좋은 때라도 지형적 조건의 유리함에 미치지 못하고, 지형적 조건이 아무리 유리해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내성이 3리, 외성이 7리에 불과한 작은 성을 포위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내성까지 포위하고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하늘이 내려 준 좋은 때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좋은 때라도 지형적 조건의 유리함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곽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고, 해자가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단단하고 날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군량이 적은 것도 아닌데, 성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지형적 조건의 유리함이 사람들의 인화 단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경을 삼엄하게 단속한다고 백성을 가둘 수 없고, 높은 산과 낮은 골짜기의 험준함으로도 나라를 견고하게 만들지 못하며, 날카로운 병장기로도 천하에 위세를 떨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도를 얻은 사람에게는 도와주는 인가 많고, 도를 잃은 사람에겐 도와주는 이가 드문 법이다. 올바른 삶이 높은 경지에 오르는 사람에게는 천하 사람들이 모이고, 행악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은 피붙이마저도 떠나기 마련이다. 천하 사람들이 따르는 올바름을 가진 이가 피붙이마저 배반하는 사람과 전쟁을 하는 것이기에, 참된 사람은 싸우지 않을지언정, 싸운다면 반드시 이기는 법이다." <맹자, 공손추 하 1.>
인류 전체가 겪는 기후재앙 속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도덕성을 확보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사람들이 똘똘 뭉칠 때입니다. 스바냐 예언자가 올바로 살도록 힘쓰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하는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하고, 도덕적 절제력으로 폭력의 상황을 이겨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생사썰전에서 회복적 정의를 다루는데, 여러분 모두 참석하셔서 갈등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피해를 줄이며, 다시는 폭력의 상황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논의하시면 좋겠습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도덕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올바름을 보여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아야 희망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과 배움]
스바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마지막 명령은 겸손하게 살도록 애쓰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겸손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보다 남을 더 훌륭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신이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열심히 배웁니다. 변화에 민감합니다.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하려고 애를 씁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남신도회 주일이어서 남신도회가 예배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남신도들이 특별히 더 마음에 새겨야 하는 말씀은 바로 이 스바냐의 세 번째 명령입니다. 남성들은 경쟁에 민감합니다. 남을 지배하고, 언제나 우위에 서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섬기고 시중드는 일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밑에서 굴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접하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섬기러 왔다고 하시면서 고관대작들처럼 내리누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초고령화가 되고 있습니다. 인구 비율 중 65세 이상이 20% 넘는 사회를 초고령화 사회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는 2025년에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화 사회로 변하는데 7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영국은 50년이 걸렸고, 미국은 15년이 걸렸으며, 일본도 10년이 걸렸는데 우리나라가 가장 빠릅니다. 작년 통계로 65세 이상의 인구는 현재 901만 8천명 정도로 전체 인구 대비 17.5%입니다. 나라 전체로 보면 그렇지만 전라남도(24.5%), 경상북도(22.8%), 전라북도(22.4%) 강원도(22.1%), 부산(21.0%)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 들었습니다.
가구주가 65세 이상인 고령자 가구는 519만 5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24.1%로 집계됐고, 이 중 36%(187만 5000가구)가량은 1인 가구입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972만 4256가구로 전체 가구의 41.0%를 차지했습니다. 이 중 50대 이상 1인 가구는 모두 522만 9천 가구입니다. 일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 또한 급격하게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고독사는 80대보다 50대가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60대입니다. 그런데 5-60대에서는 특별히 남성의 고독사가 여성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보통 4배 많은데, 작년에 경우는 무려 5.3배가 높았습니다.
남성이 고독사에 굉장히 취약한 것인데, 이유는 남성이 건강관리와 가사 노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림에 미숙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사별 이후에 사회에 적응하는 속도가 느립니다. 이혼이나 실직 등 상실의 순간 새롭게 털고 일어나는 힘이 여성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도록 애쓰라는 스바냐의 명령은 모든 상황에서 배움의 자세와 유연함을 가지고 잘 적응하라는 말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스바냐 예언자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위기로 가득한 위험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찾으십시오. 내 삶의 한가운데 반드시 주님을 모시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듯,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단 둘만의 공간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찾을 때 모든 것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말씀에 순종하여 올바르게 살도록 힘쓰고 겸손하게 살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도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창조의 하나님! 주님 지으신 세계에는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금지된 선악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충분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끝 모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만족할 줄 모르고 자꾸 유혹에 넘어가고, 자기 생각에만 매몰되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깨우쳐 주소서. 우리가 주님을 찾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얼굴 앞에 우리를 세우게 하시고, 올바로 살아가도록, 겸손한 삶을 살도록 애쓰고 힘쓰게 하소서. 세상은 갈수록 위험 가득한 곳이 되어갑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를 주셔서, 이 위기들을 잘 넘기게 하시고,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에서 건져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고자 나온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분주한 삶 속에서도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며, 주님과 상의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가십시오.
* 축도
잔잔한 물결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흐르는 공기의 깊은 평안이 여러분에게,
고요한 땅의 깊은 평안이 여러분에게,
빛나는 별들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밤의 어두운 그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길 빕니다.
달과 별들이 항상 여러분을 비춰주며
평화의 아들, 그리스도의 깊은 평안이 여러분에게 영원히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