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잘 아는 타인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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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잠언 30:1, 7-9, 히브리서 13:12-15, 누가복음 16:19-25

설교문

'식사하셨어요?' 한국에서는 인사말입니다. 단순히 식사했는지 그 사실을 묻는 게 아닙니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웠던 시절, 안부를 묻던 배려의 인사입니다. 요즘도 그 습관이 남아 저는 여전히 이 인사를 나눕니다. 하지만 유튜브로 '먹방'을 즐기고,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요즘에는 와닿지 않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말합니다. "이제 더는 /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시인은 어느 심야식당에 앉아 과거를 회상합니다.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에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도 없이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습니다. 정말 국수 한 그릇 먹기 위해서 부대끼면서 줄을 서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섞여 앉아 함께 먹던 모르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시인이 뜬금없이 묻습니다.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궁금합니다 /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박소란, <심야식당>)

지금 시인은 어느 심야식당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그의 앞에도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 혼자 밥 먹는" 사람을 보며 시인은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모든 게 풍족해진 시대입니다. 한국에만 있다는 '먹방', 그저 모든 걸 다 먹어 치우는 이 '천박한 풍요'의 시대에 시인은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세심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따스한 마음으로 다가가 묻고 싶어 합니다. 진짜 행복한 밥을 먹고 있는지,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시인은 '고작' 그런 게 궁금합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유명한 『고백록』에서 당시 비극적 연극에 심취해 있던 자신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왜 나는 비극적 연극을 좋아할까? 그가 얻은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슬픈 감정을 반긴다. 사실 슬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예리한 분석입니다. 그가 이어 말합니다. "허구적 연극에 의해 발생하는 연민은 과연 실제적인가? 관객은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단지 슬픔을 느끼도록 초대되었을 뿐이다."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1,600년 전에 없었던 정보통신 기술이 비극적 연극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매일 각종 매체를 통해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슬픈 소식들을 접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비극을 구경하면서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을 돕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번 더 클릭해서, 혹은 채널을 돌려서 다른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화면에서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이내 채널을 돌려 다른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아프가니스탄 지진 현장을 보면서 국제사회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에 또 슬픔을 느끼지만 이내 다른 이야기로 클릭합니다. "관찰자의 입자에서 우리는 슬픈 감정을 반긴다. 사실 슬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우리는] 단지 슬픔을 느끼도록 초대되었을 뿐이다." 그 옛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어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누가 16:19-31)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그걸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이 불쑥 이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는 말은 그가 왕족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헌데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절망적으로 가난했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부자만 장사 되었습니다. 제대로 묻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거지는 죽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성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부자를 악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사로에게 음식 주는 것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와 같은 거지들이 있을 대문을 없애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왜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까? 성서는 단 한 글자 안에 그 답을 숨겨놓았습니다. 부자가 무어라 소리쳤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부자는 지금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가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치 그가 없는 것처럼, 그를 '그'라는 한마디 삼인칭으로 부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서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눈엔 나사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통당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나사로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자에게 나사로는 언제나 '그'였습니다. '너'가 아니라 '그'였습니다. 영원한 타자였습니다. 죽어서도 나사로는 '그'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고통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십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슬픔을 즐기지 말고 나사로의 얼굴을, 그의 눈동자를 보라고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대 위 배우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한 <심야식당>에서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하다고 한 그 시인은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잘 모르는 사람과 같이 앉아 다시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을 겁니다.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 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 테지요 /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 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만집니다 /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무엇입니까 //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박소란, <모르는 사이>)

오지랖이 넓다고 핀잔받을 시입니다. 모르는 사이, 그냥 '쿨'하게 모르는 척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시인이 이렇게 매일 7019번 버스를 타는 그 모르는 사람에게 오지랖 넓게 묻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풍요로운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시인의 눈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시립 은평병원"입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 휘휘한 공기"가 가득한 살벌한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혼자 밥을 먹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누구와도 소통 없이 홀로 길가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모르는 사이' 같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타자' 혹은 '잘 아는 타인'(a familiar stranger)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 사람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소중한 것을 드러내서라도 외롭고 슬픈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들 뒤에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기는 패스트푸드 뒤에는 공장식 농장에서 고통당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은폐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언젠가 노래하면서 '만약에 모든 도축장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아무도 육식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담장을 짓기 전에 나는 물어보았다. 내가 담장 안에 두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고, 담장 밖에 두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입니다. (프로스트, <담장 고치기 Mending Wall>) 우리의 담장 안과 밖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담장을 지을 때 담장 안에 두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고, 담장 밖에 두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대문이라는 담장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께서는 사실 당신이 바로 그 집 대문 밖에 있는 나사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우리의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태 25:40) 중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거지 나사로처럼 우리 앞에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던]"(마태 25:35-36) 사람들을 의인이라 부르시며 그들에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태 25:34)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예수께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말하며,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2-13)라고 촉구합니다. 나사로가 부자의 집 '대문 밖'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성문 밖' 혹은 '영문 밖' 곧 담장 밖에 계시니 우리가 그리로 나아가서 그를 만나 뵙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당하는 모든 생명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지요. "하느님을 찾았으나 뵈올 길 없고 / 영혼을 찾았으나 만날 길 없어 / 형제[자매]를 찾았더니 셋 다 만났네."(이해인, <좋은 이웃 되기>) 그렇습니다. 고통당하는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비의 참여하는 길입니다.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던 슈바이처 박사가 선교를 위한 모금을 하러 고향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선교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노벨평화상을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많은 기자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기차역에 나와 1등 칸 주위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슈바이처 박사는 3등 칸에서 내렸습니다. 한 기자가 3등 칸에 탄 이유를 물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답했습니다. "4등 칸이 없어서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마가복음 10:45) 하셨습니다. 슈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깊이 감동한 사람입니다. 이화의 설립자 스크랜튼 선생님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죽기까지 조선 땅에서 예수 사랑 실천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시편 113:5-7) 주시는 분이라 성서가 말합니다.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주고 도움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시는]"(시편 72:12, 공동번역) 분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믿는 욥은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욥기 30:25, 새번역) 했습니다. 바울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했습니다.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예수님 / 너무 쉽게, 알아듣기 쉽게 하신 말씀 // 감사하면서 살아라 / 기뻐하면서 살아라 / 용서하면서 살아라 // 그 말씀 너무 쉬워서 / 이천 년을 두고 저희들 아직도 /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나태주, <어리석음>) 이 시의 제목은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 말씀 너무 쉬워서" 우리는 그 말씀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이사야 42: ) 자비로운 예수께서는 아주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 12:29-31) 하시며 이렇게 아주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타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는 길이요, 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아주는 일입니다. 더 이상 슬픔을 관조하지 말고, 관객의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의 영문(진영) 밖에서 '지극히 작은 자 안'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세상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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