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가복음서 10장 46-52절
[마틴 루터의 두 가지 업적]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을 때, 그것이 당시 일반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주고 사회의 대개혁을 일으키게 한 사건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시 성찬식에서 일반 교인들은 받을 수 없었던 잔을 모두에게 받도록 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사제들은 무식한 평신도들에게 주님의 신성하고 거룩한 피를 줄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는 자마다 심판이 임할 것(고전 11:29)이라는 바울 사도의 선언을 빌미 삼아 평신도에게는 포도주를 받게 하지 않았는데, 루터가 이러한 금기를 깨고 만인사제직에 입각하여 둘 다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징적 사건을 시작으로 이제 사제와 평신도 사이를 나누는 높은 장벽이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모두 허용한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1520년)이라는 논문에서 중세와는 전혀 다른 교회론을 말합니다. 가톨릭에서는 한 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이며, 주교의 안수를 통해 이어지는 사도의 직무는 신적인 능력으로 된 것이기에 인간이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터가 주창하는 개혁교회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목회자를 세우거나 해임하며,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직무를 위임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루터에게 '교회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황이라 하더라도 그 위에 설 수는 없고, 따라서 교황이 잘못하면 탄핵될 수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기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평등 정신을 회복합니다.
루터의 개혁을 통하여 이제 평신도들은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여러 직무를 담당하는 책임적 존재로 다시 서게 됩니다. 목회와 선교 사역에 있어 책임적 존재가 된 평신도들을 위해 루터가 해낸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당시 성경은 히에로무니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였는데, 라틴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5%에 불과했습니다. 루터의 번역으로 인해 사제들만 독점적으로 읽던 성서가 교인들 개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이제 교인들은 교회의 전통과 사제들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읽고 성서를 기준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전염병 페스트에 의해 2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게 되는데, 이때 사제들도 많이 죽었고, 이후 실력 없는 사제들이 강단에 서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없었을 때는 이런 실력 없는 사제들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성서를 제 눈으로 읽은 교인들 앞에서 자격 없는 사제들의 민낯이 전부 드러납니다. 누구나 성서를 읽게 되면서부터 교회의 잘못된 권위들은 전부 무너져 내리게 되고, 이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교인 각 개인은 자신의 신앙과 삶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거듭남을 위해 또 한 번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인들 각자가 성서를 바르게 제대로 보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교회 구성원 전체가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함께 발견할 때만이 교회는 살아나고 역동적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학 전문가로서 교인들을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2005년 풀타임 사역자로 목회를 시작했을 때, 첫번째 성서 공부를 "성서를 보는 눈"이라는 주제로 열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해서도 "성서를 보는 눈"이라는 주제로 12주 동안 성서배움마당을 열었고, 그것을 다시 15분짜리 영상 50개로 만들어서 우리 교회 유튜브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수요사경회에서 다시 신앙 특강으로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와 다른 시대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사실 전문가들에게 배워야 그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좋은 책과 영상들이 많아서 일반 신도들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성서가 전해 주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성서를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 이야기꾼들의 전략]
성경을 펴면 다양한 사건을 다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서를 직접 쓴 저자들도 있지만, 성경 이야기 내부에 등장하는 이야기꾼들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다양한 이야기꾼을 내세우고, 시간과 공간을 배치하고, 줄거리를 기가 막히게 짜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지혜, 보석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시각 장애인이 되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에는 이 이야기 말고도 또 하나의 시각장애인 치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8:22-26). 마가복음서 저자가 동일한 주제의 이야기를 두 개씩 병렬해 놓고 그 사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을 기막히게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시각 장애인을 고친 이야기 두 개 사이에 있는 이야기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 후에 집, 또는 회당, 바닷가와 여러 마을들에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일로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시고(3:1-6), 나중 고향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로 기적을 베푸실 수가 없었습니다.(6:1-5) 이후로 예수님은 다시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길을 떠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특별히 첫번째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이야기부터 두번째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를 고친 이야기까지는 가이사랴 빌립보로부터 가버나움과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긴 여정을 그립니다. 갈릴리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발생지이자 중심지였고,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곳입니다. 예수의 선교 여행은 영광에서 수난으로, 기적과 치유를 베푸는 것에서 모욕을 당하고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마가복음서는 16장 8절에서 끝나는데, 거기까지의 이야기만 보면 마가복음 내부의 독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실을 아무도 모릅니다.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이 겁에 질린 나머지 무덤에서 도망쳐 버렸고, 아무 말도 못했기 때문입니다.(16:8)
그래서 마가복음서는 비극의 복음서이고, 긴 서론이 붙은 수난과 죽음 이야기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고난과 수난의 현장에서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가가 밝혀지고,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가 드러납니다. 누가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인가? 누가 진정으로 눈을 뜬 자인가가 속속들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전염병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낯이 드러났듯이, 바로 고난과 수난의 현장에서 참된 믿음이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의 말씀은 누가 참된 제자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 오고, 그들을 고칠 때 예수님 곁에는 열둘이 있었습니다. 재야 지도자였던 세례 요한을 잃어버린 채 길을 잃은 유대 민중들을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먹일 때에도 열 둘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인기가 올라가고, 민중들의 메시아로 칭송 들을 때 제자들이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도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신적 형상을 입어 온몸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실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예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릴 때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인가? 기적과 치유, 사람을 살리고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은 동시에 좁은 길을 걸어야 하고, 권력에 저항하면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하고, 채찍을 맞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며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데, 영광의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같은 분인데, 과연 제자들 모두가 이런 예수 곁에 끝까지 남을 것인가?
시각 장애인들을 고친 두 개의 이야기 사이에는 세 번의 수난 예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첫번째 가르침에서,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가 흥분해서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를 꾸짖는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도 물러서지 않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영광과 성공, 승리의 쟁취를 바랐던 베드로는 바로 거기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땅에 온 이유가 섬기러 왔고, 그래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한심한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를 다투고 있습니다. 마지막 수난 예고를 한 이후에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찾아와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이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이때 바디매오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디매오는 다시 보게 되었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섭니다. 원래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예수가 가시는 길 위에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 수제자들 격에 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 영광의 길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수난의 길에서는 점점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급기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제자들은 전부 뿔뿔이 도망가고야 말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마가복음서는 바디매오를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자 '거지'라고 소개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정신적 무지를 뜻합니다. '거지'라는 것은 남에게 빌어먹고 산다는 말로,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누구나 인간은 건강한 몸과 올바른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길 원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때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데, 지금 바디매오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던 것을 보아서, 이전에는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볼 수 있던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될 때 어떨까요? 시각 장애인은 보지 못한다는 것 자체로 모든 일상에서 엄청난 불편함을 겪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이 겪는 가장 큰 모욕감과 수치심은 자신조차 자신이 보지 못하는데 남들은 모두 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남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 남의 모든 시선에 노출된 반면 자신은 스스로조차도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정보가 권력인 시대, 남들은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데, 나는 남의 정보는 물론 내 정보까지도 잘 모르고 있을 때,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독재국가에서 독재자는 언제든지 아무런 제한 없이 국민의 사생활을 전부 들여다보고 침해할 수 있는데, 국민 개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요?
평생 수치와 모욕, 장애로 인한 불편함과 고통을 당해 온 바디매오는 자신에게 한번 올까말까 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는 다급하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든 다윗 왕과 같이 모든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디매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최상의 존칭어로 예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습니다. 이렇게 바디매오는 쉽게 무시당할 수 있던 존재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소리를 지르지만, 주변 환경은 바디매오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런 장애물이나 훼방꾼을 만나게 되면 흔히 기가 죽고, 풀이 죽기 마련입니다. 혹시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더 주눅이 들고 "나는 안되는구나!" 하면서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과감하게 나서지 못하고 주춤주춤하다가 뒤로 물러서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디매오는 다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가 거지의 신분이었지만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는 뚝심과 꿋꿋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 해서 바디매오는 이제 훼방꾼들을 주춤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들의 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가 예수의 귀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훼방꾼들이 전부 바디매오를 돕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디매오가 예수를 불렀지만, 이제는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디매오의 열정은 상황을 바꾸었고, 이것은 바디매오가 새로 거듭나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을 때, 우리는 이제 주님께로 '아멘'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부름 받고 나선 자가 바로 제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알았습니다.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르게 답합니다. 인생을 대충 산 사람은 이런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을 때, 자신에게 가장 적실하게 필요한 그것을 답할 줄 아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그걸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딴 곳으로 가지 않고 예수를 따라 나섭니다. 그가 눈을 바로 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 중에 이름이 명시되는 사람은 바디매오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것도 밝힙니다. 왜일까요? 바로 이 사람이야말로 마가공동체가 바라본 참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결국 배신하고 마는 유다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바디매오가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고, 제대로 눈 뜬 사람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바디매오야말로 마가복음서를 산출해 낸 교회의 지도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우리 중에 일부는 "선생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를 선생님의 왼편이나 오른편에 앉혀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실로 한국의 많은 개신교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 위에 서지 않고, 길의 경계에서 한 발은 예수의 길에, 다른 한 발은 무당 종교 기복의 길에 걸쳐 놓고, 언제든 예수의 길에서 발을 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예수의 길이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 믿고 복 받고 편하게 지내려는 욕망의 길을 예수의 길로 알고 믿은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인들 모두가 "주님, 다시 보기 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보지 않겠다고 거부하지도 말고, 보지 못하면서 보았다고 우기지도 말고, 눈 뜨고 제대로 보면 피곤한 일이라고 게으름 피지도 말며, "주님! 다시 눈을 뜨고 싶습니다. 제대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 가시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좁은 길이라도 생명의 길로 걸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주셨기 때문에 감사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열매가 없으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추수감사주일의 깊은 의미는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것들이 각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삶과 생명 그 자체를 주셨다면 주님과 함께 겪는 기쁨도, 슬픔도, 영광도, 고난도, 성공도, 실패도 모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와 기적과 풍성함을 통해 복음을 맛보았다면 불의와 싸우다가 당하는 고난, 모욕, 박해를 통해서도 복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 길 모두가 복음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길가에 우두커니 서 계시지 마십시오. 길 위로 나아오십시오. 엉뚱한 길을 가지 말고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십시오. 그 길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다시 눈을 뜨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진리의 예수님! 늘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지켜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실 때 우리가 깨우쳐 알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때 용기 있게 따라가게 하소서. 어정쩡하게 구경꾼처럼 물러서 있지 않게 하소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고 살아갈 이유를 알고,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다면, 주님과 함께 고난도 겪고 주님과 함께 시련도 헤쳐 나가게 하여 주소서.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소서.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으로 늘 거듭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맑은 가을 하늘, 선선한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드립니다. 한 해를 지켜 주시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은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예배를 통해 주님의 따뜻한 빛을 쪼이니 지난 삶의 구김살들이 살살 펴지고, 주님의 자애로움과 미소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주신 선물에 만족하오니, 오늘 우리가 드린 예물을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돈이 맘몬신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올바로 봅시다. 제자답게 스승이신 예수의 길을 따라 갑시다. 좁고 험하다 하여도 참된 생명의 길로 걸어갑시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려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