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서 9장 30-41절
설교문
[요한복음서 9장]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 중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서 9장은 이 복음서를 만들어낸 교회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은 등장인물들이 계속해서 바뀌는 일곱 개의 연속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열네 번의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어떻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인식과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선천적 시각 장애인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통해 눈을 떴고, 그래서 예수님이 그저 유대인 남성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요,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주인공의 반대편에는 바리새파와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장애인과 병든 자들, 그리고 계명을 어긴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확신하고 있기에 오늘의 주인공과 예수를 모두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바리새파와 유대인들은 스스로 모세의 제자라고 여깁니다. 율법의 자녀와 믿음의 자녀들 사이에서 죄란 무엇이며, 누가 진정한 죄인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서 9장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오늘날 죄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왜 그리스도교는 죄에 주목하는지, 그리고 죄가 불러오는 고통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죄와 고통]
그리스도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지닌 사람을 만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제자들의 질문이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계속 "죄"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자들의 인식은 당대 사회의 인습을 반영하는데,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은 바로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에게 발생하는 고통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 때문에 받게 된 심판이나 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국어사전에서 "죄"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양심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양심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를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면, 이런 잘못된 행위들로 인해서 해를 입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신호등을 무시하면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이고,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먹지 않으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생기지요. 지나친 욕심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은 반드시 자신과 남에게 고통을 줍니다. 무지와 어리석음 또한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죄"에 민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행동들 곧 "죄"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없애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고통을 줄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도와 무관하게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마치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처럼 여겨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교정합니다.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 누구의 죄로 인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선천적 시각 장애인의 눈을 치유하심으로 그가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본래 주어진 충분한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는 것들에는 원인과 결과로 분석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어떤 것은 원인을 파악하여야 하고, 어떤 것은 당면한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해야 하고, 어떤 것은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즉 구원을 이뤄가는 것에 목표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능력을 발휘하셔서 시각 장애인의 눈을 바로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고통과 어려움 중에서 특별히 선천적 시각 장애인을 등장시킨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통의 상당수가 제대로 보느냐 못 보느냐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고 주변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70% 이상을 눈에 의존합니다. 그러니 보지 못하면 너무나 큰 불편과 고통 가운데 있게 됩니다. 무엇을 보려면 빛과 눈동자, 망막의 신경세포, 뇌로 가는 시신경들이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눈과 뇌의 신경세포들이 아직 정교하게 갖춰있지 못해서 잘 보지 못합니다. 2개월이 지나서야 시각을 통한 상호 교감이 가능합니다. 무언가를 보려면 첫째 조건은 빛입니다. 사물에 반사된 빛 입자는 눈동자 한 가운데 검은 구멍을 통과해서 망막에 도달하게 됩니다. 망막에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라는 미세한 수용기가 수백만개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들어오는 빛 입자를 받아들여서 뇌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 즉 전기로 바꾸어서 내보내지요. 이 전기 신호는 시신경을 타고 뇌로 이동합니다. 뇌는 그 신호를 받아 우리에게 실체를 보여 줍니다. 눈은 1초당 1천만 회의 신호를 뇌로 보냅니다. 전송 속도는 시속 435km에 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을 통해 1초당 천만개 이상의 정보를 얻게 되고, 그것을 뇌로 보내 처리하고, 또 뇌는 순식간에 온몸에 신호를 보내 우리가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 신비한데요.
날 때부터 보지 못한다면 이런 정보들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라고 하셨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관찰하는 데는 눈동자보다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마음속 악을 가리지 못한다. 속마음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속마음이 부정하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사람 말을 잘 들어보고 또 그 눈동자를 잘 살펴보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을까?"(孟子曰: "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 『孟子』 「離婁上」 15.)
이렇게 우리의 눈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눈의 맑고 흐림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도 되고 있기에 밝고 맑은 눈을 가지고 제대로 본다는 것을 모든 종교는 강조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심안(心眼), 즉 마음의 눈을 지니라고 얘기하고, 무지에 갇혀 있지 말고 눈을 뜨라는 개안(開眼)을 강조하기도 하지요.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안과 심안을 넘어 영안을 지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이 되었던, 마음의 눈이 되었든, 영의 눈이 되었든 간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만큼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했다는 것이 지니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오늘의 주인공은 남들이 보고 들려주는 말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는 대로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남들이 말하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 삶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남들에 의해 규정된 삶을 산다는 것만큼 부자유한 삶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실로 깊은 의미를 줍니다. 육체적 자유 뿐만아니라 정신적 자유까지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봐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겪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적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눈 뜬 자의 신앙고백]
예수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와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신앙고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라는 사람(11절)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17절)라는 인식이 생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절)이라는 확신 속에서 결국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된 사람의 아들(人子)이며, 마지막에 오실 구원자인 메시아(다니엘서 7:13-14의 인자)로 믿게 됩니다(38절).
오늘의 주인공이 눈을 뜨게 될 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씻고 눈이 밝아졌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 보내진 소명을 발견한 것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소명은 세상의 빛이었고, 이제 눈을 뜬 주인공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aposteles)라는 말이 바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눈을 뜨고 보냄을 받은 자로 거듭난 주인공은 이웃 사람들 앞에서, 바리새파 앞에서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차근차근히 그리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얘기합니다. 바리새파들에게 두 번째로 불려 나갔을 때, 그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중략~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사람처럼 다양한 논쟁과 삶의 경험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고백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스스로 도전하고 배우고 계속 신앙의 모험을 해야 합니다. 남이 떠먹여 주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물음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뜨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영적인 안목이 열리면 놀라운 세계가 또한 열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이들이 행하는 죄들]
설교 서두에서 오늘 이야기가 일곱 개의 연속적인 장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장면은 바로 예수께서 시각 장애인을 고친 것입니다. 둘째 장면은 동네 사람들, 이웃들이 눈 뜬 사람과 함께 대화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예전에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인가를 묻고, 시각 장애인이 눈 뜨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장면이지요. 셋째 장면은 안식일에 치유가 일어난 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주인공을 심문하는 장면이고, 넷째 장면은 바리새파와 유대인들이 주인공의 부모를 심문하는 장면입니다. 다섯째 장면은 바리새인이 주인공을 다시 불러서 두 번째로 심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다섯 번째 장면의 후반부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첫째와 둘째 장면에서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으나 이제는 눈을 뜨고 거듭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셋째 장면부터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들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바리새파와 유대인들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차근차근히 자신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선천적 장애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그래서 자신을 고친 예수는 예언자임이 분명하다고 매우 합리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안식일 법을 어겼으므로 죄인이라고 규정한(24절) 바리새파와 유대인들은 주인공의 말을 듣고서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를 소환하고, 다시 그를 불러 윽박지르면서 여러 번에 걸쳐 강압적 수사를 하고 결국은 그를 바깥으로 추방합니다.
바리새파가 주인공과 논쟁하면서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지금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이 가지고 있는 인습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모세의 참된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율법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행하는데 있어서는 최고라고 하는 자신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만감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주인공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그동안 해왔던 습관과 경험, 그리고 자신들이 옳다는 양보할 수 없는 확신 속에서 바로 이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주인공을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으로, 예수를 안식일을 어긴 죄인으로 낙인찍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발끈하지요. "우리도 눈먼 사람이란 말이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만의 덫]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을 양산하는 교만의 죄를 보게 됩니다. 신앙은 원래 한 개인에게 너무나도 강렬한 체험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그 체험이 하나의 절대적 기준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으로 남들을 규정하고 배제하기도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억지를 부리는 바리새파들이 바로 당대의 최고로 경건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오늘 예수의 치유 사건에 문제를 삼았던 이유도 십계명의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는 그들의 신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철저히 하려는 노력과 행동이 변질되고 왜곡되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수단이 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남들을 교정하려 시도할 때,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폭력이 되고 맙니다.
지금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이보다 기쁘고 신나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함께 축하해 주고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파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들의 독선적 신념 때문에 하나님이 주인공에게 드러내신 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파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멀었던 사람이 눈을 떴고,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그것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임에도 자신들의 신념 체계와 다르다는 이유로 결국 이 사람을 모욕하고 바깥으로 내쫓아내 버립니다. 잘못된 신념 체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잘하는 것이 바로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제일 못하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늘 말했지만, 자신이 본다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다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정말 새카맣게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지와 고집을 넘어서]
그리스도교가 죄에 주목하는 이유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바로 무지함과 고집이 고통을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지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제 눈으로 살펴야 주체적 신앙인으로 살 수 있고, 제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믿어야 참된 신앙고백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는 제 눈으로 본다고 할 때, 그것을 늘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 신앙이라고 믿었던 것이 혹시 독단과 독선, 자기 아집이 아니었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성찰을 하지 못하고 남을 규정하려고 할 때, 특히 남을 비난하고 그를 죄인이라고 말할 때 도리어 우리 자신이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늘 눈을 뜨기 위해 간절하게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눈을 이미 떴다고 믿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주님 만나는 날까지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무지와 고집을 넘어섭시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마십시오. 이미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길 위에서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걷는 사람의 머리에는 죄가 또아리를 틀 수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인데, 진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 눈을 열어 주소서. 무지의 어둠을 헤매는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춰 주소서. 눈을 떠서 진리를 향해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진리를 알고 만나서 자유를 얻게 하소서. 우리 눈으로 직접 주님을 보게 하시고, 주체적 신앙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의 교만을 없애 주소서. 이미 섰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시고, 남의 눈에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우리 눈의 들보를 보게 하소서. 보냄을 받은 자답게 낮 동안에 열심히 일하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일군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으로 황혼의 노을을 만드시고, 지혜로 새벽의 문을 여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우리는 출세를 위해 주님께 힘을 구했지만, 주님은 순종을 배우도록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고자 건강을 원했지만, 주님은 그보다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행복을 위해 부귀를 청했지만 주님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만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를 갈구했지만, 주님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시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삶의 즐거움과 넉넉함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으나, 주님은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받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정성을 드립니다. 받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드리오니, 이 땅에서 하늘 시민으로 살려는 우리에게 하늘의 참된 평화와 지혜를 내려 주소서. 우리가 날마다 잘못한 모든 것들을 고쳐 나가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들을 거뜬히 살아가게 하소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맘으로 형제와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눈을 뜨고 귀를 여십시오. 주님의 제자로 살아 가십시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추구하는 삶을 멈추지 마십시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죄를 극복하고 날마다 구원을 이루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