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아레오바고 법정 한 가운데서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명기 6장 10-12절, 사도행전 17장 22-34절

설교문

[신명기 6장 10-12절 말씀 : 경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으셨던 신명기 6장 10절에서 12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당신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당신들이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당신들이 채우지 않았지만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이 있고, 당신들이 파지 않았지만 이미 파놓은 우물이 있고, 당신들이 심지 않았지만 이미 가꾸어 놓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으니, 당신들은 거기에서 마음껏 먹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될 때에, 당신들은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애급에서 나와 주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모세의 설교 중 일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텐데,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마음껏 먹고 즐기게 될 때, 주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이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에게 해 주신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지 않고 짓지 않고 키우지 않은 모든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터전을 주시고, 그 곳에서 온갖 식물과 동물이 자라게 하셨으며,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문명을 만들어내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 백성들이 거저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모세가 말한 경고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삶의 주체로 살게 하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속 사회 속에서 종교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은 지금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일구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하신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탄생과 여기에서 온갖 생명체들이 발생하는 전 과정을 보면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인류가 탄생하기 전 지구는 수십 억 년의 변화를 거쳐 왔고, 인류가 지구 전역에 등장했을 때 너무 많은 것들이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주어진 것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며, 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어가고 피조세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데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원래부터 자기의 것인 양 마음대로 씁니다.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발버둥치고, 비교와 경쟁 속에서 속임수도 쓰고 거짓말도 하고 싸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승자가 되면 소유의 권리를 갖게 된 것으로 확신하고 계속해서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던 땅에도 금을 그어가며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서 급기야 전쟁을 일으키고 땅따먹기에 핏대를 세웁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을 종교분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본질은 부동산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을 가지고 사이좋게 잘 나누어 쓰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은 인류는 더 많이 가지려는 아귀다툼 속에서 불안을 달고 살고, 낙오자가 될까 걱정하며, 정글 한복판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투쟁과 몸부림으로 지치고 쓰러집니다. 존재의 뿌리를 잃은 채 그저 떠돌이 부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주셨지만, 지금의 인류는 지구를 망치고,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주님 품으로 돌아올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전도(傳道)의 필요성]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 사람들은 주님께 소명을 받은 대로 다시 인류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전도(傳道)요,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선교(宣敎)가 다 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탐욕과 어리석음, 온갖 고통을 일으키는 죄악들을 없애고 모든 잘못된 것들을 고치고, 아프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어둠을 비추는 빛이어야 하고, 부패를 막는 소금이어야 하며,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이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혼탁한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삶의 깊은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진지한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다 그런 거지" 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신비로 가득 찬 우주와 자연을 보면서, 물질문명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지만 삶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고, 산업문명의 최정점에서 기후재앙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진정으로 자기 영혼을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모든 생명들과 함께 참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런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 효율성 중독, 승자독식, 이기주의, 편협한 자기중심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지만 그런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이들이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구성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테네 한 복판에 선 바울]

기원후 1세기 중반 우리와 비슷한 고민 속에서 매우 열정적인 삶을 불태웠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한복판에서 새롭게 건설되거나 재건되는 도시들을 돌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예수가 벌였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간 사람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를 받아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화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테네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당대 로마와 그리스 등 주변 세계는 다신들을 믿고 섬겼습니다. 매우 다양한 신들의 동상들과, 그 신들을 나타내는 온갖 상징들로 가득한 곳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그 중에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다소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울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갔는데, 바울은 거기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사도행전의 다른 설교와 매우 다릅니다. 유대 종교와 관련된 사항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언급하지도 않고, 구약성서도 인용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 명시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철학과 문화에 최대한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설교를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심정이 오늘 저의 심정입니다. 저마다 다른 신들을 섬기며 제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예배하고 있는지 마치 알지 못하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절규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아테네 시민들이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인간에게는 종교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식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 유한성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초월을 지향하고 시도하는 존재는 모두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입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전능한 존재를 찾거나 무한한 힘을 동경하고, 가장 확실한 참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저마다 찾아낸 '신'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고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대상이 아니라 일개의 사물이거나, 착각이나 환상에 불과할 경우 그런 종교들은 도리어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합니다. 가짜인데 진짜인 것처럼 꾸며대는 사이비 종교가 있고, 궁극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마치 궁극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유사 종교들이 있습니다.

한편 모름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언제든 불안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고 확실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맹목적 신념과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한 가지 결과에 수많은 원인이 작용할 수 있는데도 한 가지만 고집하거나,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고, 성공이라도 하면 스스로 도취되어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 인류는 진보하면서도 고통의 질곡에 갇혀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조차 예배하려는 심정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바울 사도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누가 무엇으로 인류에게 참된 하나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근거 없는 주장, 설득력 약한 외침이 아니라,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삶에서 빛과 희망이 되는 진리를 누가 선포할 수 있을까요? 종교인들이라면 바로 이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했던 것처럼 청중의 문화와 가치관, 철학과 삶의 양식을 알고 거기에 맞게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역자들은 세미나도 하고, 청년들을 비롯해 각 신도회 모임에서는 독서 모임도 하면서 지금 시대의 정신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의 선교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긍정과 부정, 거부와 수용, 경멸과 동정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 심판과 부활의 선포와 관련해서 더러는 비웃고 더러는 호기심을 표합니다. 바울은 떠났지만 몇몇은 신자가 되었다고 누가는 서술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모든 씨앗이 싹이 트고 잘 자라나서 많은 결실을 맺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100% 성공만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히 실패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21세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대에 맞는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지닌 소망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답변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벧전 3:15). 우리들의 신앙은 언제나 새롭게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교 신학은 바로 여기에 봉사하여야 합니다.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좌절하거나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의미와 진리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왜 그렇게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것일까요?

[1세기 로마제국에서의 바울]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는 노예제도에 의해서 세워지고 유지되던 사회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다수의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서 돌아가는 체제라면 로마의 경제는 노예들의 노동 없이는 하루도 지탱이 될 수 없었습니다. 노예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제국 초기인 1세기에 이탈리아 인구의 약 1/3인 200만~300만 명이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로마제국 전체로는 인구의 10%에 조금 못 미치는 500만~600만 명이 노예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노예가 담당한 일은 다양했습니다. 일부 노예는 부유한 로마 귀족의 저택에서 갖가지 가내 노동에 종사했지만, 집 밖에서 일을 한 노예도 많았습니다. 일부는 수공업장, 광산, 건축공사장 등에서 일했고 일부는 매춘에 종사했으며, 각별히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진 남성노예는 검투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적 능력이 남다르다고 평가된 노예는 교육이나 회계 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많은 노예들이 일한 분야는 농업부문이었는데, 로마 귀족들은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지에 노예를 투입해서 작물을 경작했습니다.

노예가 형성되는 계기는 다양했습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 채무를 갚지 못한 사람, 해적에게 붙들려 팔려온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지만 그 중에서 새로운 노예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고대 제국 중에서 유일하게 상비군을 두었던 로마는 언제든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서 5만 명이 넘는 한 정복지의 주민 전체를 한꺼번에 노예경매 상인에게 팔아넘겼고, 두 차례의 페니키아 전쟁을 통해서 약 30만 명에 이르는 노예를 새로 얻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로마제국이 정복을 이어가고 영토를 확장하는 한 노예공급은 순탄하게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에 능한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계속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군대를 무장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이 들고, 전쟁이 초래하는 경제 및 인적 손실이 따르고, 정복지를 유지 관리하는데 비용이 드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지, 또 반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 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 공화국 말년은 권력 투쟁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는데, 이런 때 정복전쟁은 더 큰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와 고대 그리스 마지막 왕족인 클레오파트라와의 동맹을 깨부수고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는 더 이상 정복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로마의 평화 즉 Pax Romana 시대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평화를 외치며 정복전쟁을 멈췄을 때, 미처 생각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로마 군단에 소속된 군인의 연봉이 2,200만원이라고 했을 때, 어린 소년 노예는 3,000만원, 일반 성인남녀 노예는 6,000만원, 숙련공 남자 노예는 2억원, 그리스어 가능 소년 노예는 2억원, 가무에 능한 여자 노예는 4억원, 연예인 수준 여자 노예는 6억원이었고, 귀족의 비서관급 노예는 25억원이었습니다. 전쟁 중단으로 노예 공급이 어렵게 되자 이전에도 결코 싸지 않았던 노예 가격이 더욱 더 급등하기 시작합니다. 노예 가격이 상승하자, 노예를 구할 수 없던 대농장, 수공업장, 건축공사장, 광산 등에서 파산이 이어지고, 로마의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대규모의 노예들이 방출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살 길을 찾아 대도시로 대거 유입해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존의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고자 애를 썼고, 당시 매우 유력했던 자치결사조직(콜레기아)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도 방출노예들의 유입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난민의 유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국제사회의 문제가 되듯이, 당시 대도시들에서는 방출노예들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습니다. 하급노동시장이 교란된 데다, 노예들은 불결하고 불경한 자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방출된 노예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작동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강성 바리새파계 순혈주의자들은 낯선 이방인과 방출 노예들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이런 방출노예들을 포함해서 하층민들과 여성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이들은 새롭게 생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합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당시 아무 것도 아닌 이들, 어떤 권리도 소유할 수 없는 이들이 절대로 차별당하지 않는 평등의 공동체를 꾸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21세기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아레오바고 법정에 서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고,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르면서, 또는 옳다고 확신하면서 모두 저마다의 신념 속에서 나름 잘 살아간다는 이들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맛본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하고, 그들에게 참된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려 줄 수 있는 능력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고, 제자들과 바울 사도가 이어간 참 생명과 평등의 공동체, 안전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도 세상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며, 늘 비틀거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때로 인격적 모욕을 당한 사람들도 와서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전도하기 어렵고, 선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씨를 뿌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고 재서술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023년 그렇게 하려고 여러분 모두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올해뿐 아니라 내년도 아니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1세기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21세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첨단 문명을 구가하는 오늘날 진정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존재의 뿌리이신 주님을 멀리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자초합니다. 주님! 우리를 주님의 선교 도구로 사용하시옵소서. 어디에 가든지 주님의 말씀과 향기를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우리 삶이 곧 예수님을 밝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으로 황혼의 노을을 만드시고, 지혜로 새벽의 문을 여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우리는 출세를 위해 힘을 구했지만, 주님은 순종을 배우도록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고자 건강을 원했지만, 주님은 그보다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행복을 위해 부귀를 청했지만 주님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만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를 갈구했지만, 주님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시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삶의 즐거움과 넉넉함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으나, 주님은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얻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이끄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정성을 드립니다. 받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드리오니, 우리에게 하늘의 참된 평화와 지혜를 내려 주소서. 우리가 날마다 모든 잘못을 고쳐 나가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들을 거뜬히 살게 하소서. 매일 매일 형제와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전합시다.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고,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현장이 됩시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언제나 선교의 일군으로 살아가려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3] 안디옥 학파를 반대한 것은 "민중의 종교 감정"이었다고 틸리히는 말했다

동방교회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함께 안디옥 학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학파의 결은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안디옥에서 처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2]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플라톤주의를 어떤 식으로 수용하였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 가운데서 배양되었다. 당시 철학은 단순한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었다. 폴 틸리히는 "고대가 끝날 무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