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3일, 9.19 남북군사합의가 사실상 파기됐다. 한반도에는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으며 또 다시 전쟁의 위기가 감돌고 있다. 위기의 순간이지만 근본으로 돌아가 남북관계, 특별히 북한 현대사를 찬찬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북한대학원의 구갑우 교수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에 "한반도 평화의 시각에서 본 북한 현대사"를 게재했다. 기사연 신승민 원장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3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주
1. 북한의 정의
우리가 북한(北韓, North Korea)이라 부르곤 하는 국가가 한반도 이북(以北)에 있다. 그의 정식명칭은 1948년 9월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 1948년 8월 수립된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은, 헌법 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부를 참칭하며 대한민국의 변란을 도모하는 반국가단체다.
북한은 2021년 1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에 있던 "당면목적"인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강성국가를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겠다는 구절을, "공화국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을 실현하"겠다는 구절로 대체했다.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지만, 과거처럼 남한을 '혁명'의 대상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헌법에 영토조항이 없는 북한에서 전국적 범위의 혁명을 규정한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은 남한의 국가적 실체를 부정하는 구절로 해석되어 왔다. 물론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의 후반에는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과 "평화통일"의 과업이 명문화되어 있다.
북한에서 남한을 비난할 때 북한의 "문장부호법"에서 "인용표"로 불리며 그 기능 가운데 하나로 소위, "이른바"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표현의 앞뒤에 사용하는 겹화살괄호를 사용하여 《대한민국》이라 부를 때, 북한이 한반도 두 국가론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2023년 7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미국과 《대한민국》 군부깡패"가 대표적 사례다. 사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남북합의문에서 서명주체를 언급할 때, 사용되곤 했다. 2017년 11월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직후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 국가제일주의"도 북한의 유사 표현인 "우리 민족제일주의"를 대체하며, 한반도 두 국가론의 길을 여는 담론이란 해석도 있다. 그러나 출연 빈도가 줄기는 했지만, 북한은 "우리 민족제일주의" 담론도 폐기하지는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은 북한의 변화와 달리 북한의 핵정책을 비판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북한(North Korea)'이란 용어를 대내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23년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남한과 북한이 경기를 할 경우에도, 방송국의 자막에는 대한민국 대 북한이 등장했다.
한국의 북쪽을 의미하는 북한은, 꼭두각시 정권을 의미하는 과거 '북괴'(北傀)보다는 순화된 표현이다. 한반도 북쪽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들의 난무는, 북한에 대한 정의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한국전쟁을 서로 합의에 잠시 중단하는 '정전체제'(armistice regime) 하에서 살고 있다. 즉 남한과 북한은 교전상대로 남아 있다. 정전협정에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때, 남북은 적에서 친구가 될 수 있다. 이 정전체제를 해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1991년 9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별도의 국가로 유엔에 가입했다. 남북관계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정의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한편 1991년 12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합의하면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의했다.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로 규정하는 근거가 1991년 12월의 합의서였다. 남북관계의 이 중층성이 북한에 대한 다양한 호칭을 생산하는 기제다.
2. 북한현대사의 기원
김정은 정권 하인 2016년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간행한 조선통사 (하)의 제1편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시작한다. 제1장은 "주체혁명의 위업"이다. "3.1인민봉기"를 언급하고 곧 1926년 6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죽음과 김일성이 아버지 김형직에게 두 자루의 권총을 "혁명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이 북한현대사의 첫 머리다. 1926년 10월 김일성이 결성 "당면과업"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최종목적"으로 하는, '탈식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북한현대사의 예정된 길의 시작이었다. 제1편 "근대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출발하여 제2편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위한 투쟁"을 거쳐 비로소 제3편 "항일혁명투쟁"이 등장하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력사적선언"으로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을 언급한 1987년 판 『조선통사 (하)』와 달리, 2016년 판 『조선통사 (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부터 북한 현대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1958년 판 『조선통사 (하)』 와 1964년에 출간된 『조선 로동당 력사 교재』에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이 목차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로동당 력사 교재』에서는 김일성이 1926년 김일성이 중국의 길림에 있는 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썼다. 북한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과거를 수정·동원하여 현재를 정당화하고 미래의 전망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가들은 역사와 신화 사이를 가로지르곤 한다. 역사 다시 쓰기와 신화 만들기의 사이에 위치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북한현대사의 기원으로 설정된 이유는, 1967년경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유일지배체제 만들기와 분리될 수 없다. 다른 한편 탈식민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목적론적 역사 쓰기에 부합하는 기원의 설정이다.
역사 서술의 '수령적 전환'이라 부름직한 이 다시 쓰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1982년 10월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1986년 5월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건설의 역사적 경험을 밝힌 글에서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조선에서 만들어진 첫 "참다운 공산주의혁명조직"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말년에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과정을 기술하고 있지만,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실재를 입증할 사료(史料)로는 1945년 서울에서 출간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언급한다. 1987년 판 『조선통사 (하)』는 이 책을 인용하며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실재를 증명하려 한다. 김정은 시대에도 10월이 되면 《ᄐ. ᄃ》를 조선로동당의 "뿌리"로 소환한다. 이때 겹화살기호는 북한의 맞춤법에 따르면 기관명임을 알리기 위해 사용된다.
북한판 역사 다시 쓰기의 효과는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다양한 반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책에서의 소멸이다. 《ᄐ. ᄃ》에서 시작하는 북한의 현대사는 수령 중심의 유일역사만을 기록하게 된다. 따라서 현대사의 영역에서 역사'들'이 있는 남한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의 공통기반이 마련되기 어렵게 된다.
3. 북한의 국가 만들기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연구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에 따르면, 한반도 북쪽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에 '소비에트적질서'를 도입하지 않으려 했다. 즉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북한에 공산당이 참여하는 친소정부 정도를 만드는 것이 1945년 9월경 소련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교장관 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민주임시정부를 결성하고 최고 5년 간 미소공동위원회가 이 정부를 "신탁통치" 또는 "후견"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자신들의 세력권 하에 두는 점령상태에서 이 합의가 실현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사회주의 정치세력을 제외한 남북의 정치세력 모두가 모스크바회의의 합의에 반대했다.
남과 북은 각각 독자적인 국가건설의 길을 갔다. 북한에서는 국가수립 이전인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고 1946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내각조직이었던 이 임시인민위원회에는 당시 북한에 있던 민주당과 신민당과 같은 각 정당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달리 표현하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통일전선체이기도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6월 8시간 노동제를 골자로 하는 "북조선 로동자, 사무원에 대한 로동법령", 7월 "북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 8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법령" 등을 제정하는 "민주개혁"을 실행했다.
1946년 8월에는 신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하여 "민주주의 조선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북조선로동당'이 만들어졌다. 북조선로동당은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공산당처럼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포함하는 그 깃발에 넣으면서 동시에 지식인을 의미하는 붓을 추가했다. 그리고 당 창건 이전인 1946년 7월부터 정규군을 만들기 시작했다. 군이 당의 군이 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차이이기도 했다. 1946년 11월 입법기관인 북조선인인민회의가 선거를 통해 조직되었고, 행정부로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48년 8월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의 구성을 위한 선거가 이루어졌고, 1948년 9월 주권의 집행기관인 내각을 가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가지는 국가가 수립되었다. 국가수립 직전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헌법에서 두 가지가 주목의 대상이었다. 첫째, 생산수단의 소유와 관련하여 국가, 협동단체는 물론 개인 자연인, 개인법인의 소유를 인정했다. 즉 1948년 9월의 시점에서 북한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완전히 금지된 사회주의국가가 아니었다. 둘째, 북한은 1948년 헌법에서 수도를 의미하는 "수부"(首府)를 서울로 정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에서 한반도의 북쪽지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는 조항을 통해 북한의 국가적 실체를 부정한 것처럼, 북한은 헌법의 수도 조항을 통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