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EMS(복음선교연대) 선교동역자로 한국에 파송된 이래로 한반도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신 도여수(루쯔 드레셔) 의장께서 18일 소천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은 도 선교동역자님을 추모하면서 그가 기사연의 '화해·평화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길잡이'(2024년 2월 출간 예정)에 기고한 수기를 공개했다. 다음은 도어수 의장의 기고문 중 일부다.- 편집자주
"한국/조선인들과 함께 한 여정"
도여수 (Lutz Drescher / 전 재한 독일교회 선교 동역자)
저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동역자(통상적으로 '선교사'라고 부르는)로 일하면서 저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1981년부터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인들의 투쟁과 그들이 19세기에 겪은 고통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왜 한국에 왔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제 삶과 믿음, 그리고 존재를 풍요롭게 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1987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대학은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현장이고 행동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장에 계셨습니다. 억압에 저항하는 곳, 또는 긍정의 힘이 표출되는 곳,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곳,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행동하는 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현장에 계신다는 기적을 깨달은 후, 저는 항상 그런 곳에 있고 싶었고 그런 곳이 생겨나는 것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90년대에 이르러 민중교회들은 자신들의 일과 신앙에 관한 작은 책자 『바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1992)을 발간하였습니다. 저는 민중교회 중 하나인 하계동 노원구 돼지 마을(양돈 마을)에 위치한 영은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도시 빈민가, 슬럼으로 그 당시 사람들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환경에서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오용식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고 있었는데 오목사님은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신도들도 적고 사례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목사님은 늘 "우리는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서로 돕고 그들의 소유물을 나누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삶의 여정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에게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 그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특권이었고 그들의 믿음과 삶은 오늘까지도 저에게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그곳 빈민가에서 온 몇몇 여성들과 성경 공부와 기도,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성경 구절을 읽고 묵상의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서로 통찰력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이 여성들 모두가 힘든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가 가득한 마음을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을 때, 저는 왜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깊은 영성을 보여주는, 기도에 뿌리를 둔 해방적 수행의 예입니다. 저는 한국인들의 기도 방식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웃으며 마음을 쏟습니다.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뻐서 소리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이 넓은 하나님에 대한 저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한국인들을 사랑합니다.
함께 울고 웃는 것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함께 웃고 울었기에 한국인들과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2016년 은퇴할 때까지 복음선교연대 (EMS, 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 동아시아 국장을 맡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2002년에는 EMS 독일교회 대표단의 첫 방북을 조직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핵, 인권, 이상한 지도력, 빈곤, 분단 등을 주로 언급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유사합니다. 북한은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진지하다면 북한은 우리가 가장 잘 알지 못하는 나라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북한처럼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2002년 5월 평양에 도착했을 때, 저는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북한에서 혼자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내원들은 우리 대표단에 항상 친절했고,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될지는 그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북한도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미 첫 방문에서 저는 이러한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문하면서 사람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 중에 북한 사망자가 남한 사망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즉, 북한은 250만 명, 남한은 100만 명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한국전쟁은 충격적인 경험이었고 이 트라우마는 아직 남과 북, 어디에서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는 저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는지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잊히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직전 파시스트 통치자에게 살해당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행위를 보는 것보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북한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남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랑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북에 살든 남에 살든 한국인(조선인)들을 사랑합니다.
항상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던 구절을 하나 더 인용합니다.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가 성경 구절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를 "네 이웃을 사랑하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과 같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했습니다. 5월이었는데,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나 독일 사람들처럼 공원 밖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면 울고, 행복하면 웃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밝은 미래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한반도에 희망과 꿈, 화해와 평화공존의 희망이 불붙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