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세미한 소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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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열왕기상 19:11-13, 로마서 10:14-18, 마가복음 4:9

설교문

1970년대 그룹 중에 '카펜터스'(Carpenters)가 있었습니다. 맑고 편안한 목소리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친남매 그룹입니다. 대표곡으로는 빌보드 싱글 1위를 기록한 "Top Of the World"도 있지만 저는 1973년 발표된 "Yesterday Once More"라는 곡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 라디오를 듣곤 했었지 / 그 노래가 나오면 나는 따라 불렀고 / 내게 미소를 선사해 주었지 / 그땐 참 행복한 시절이었어 /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닌데 / 그 시절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 하지만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낸 친구처럼 / 내가 좋아했던 그 노래의 추억이 / 다시 살아나고 있어 / 그 노래 중 샬랄랄라~ 우우우우~ 하는 부분은 지금도 아름다워 / 노래 시작할 때 싱얼링얼링~ 이라고 부르는 부분도 좋지... /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디오가 밀려난 시대입니다. 아침에 전철을 타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습니다. 영상의 시대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을 압도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더 화려하고 웅장한 장면의 영화나 불꽃놀이 혹은 레이저쇼를 찾아다닙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는 설거지도 할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유튜브 '쇼츠'(shorts) 영상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성서의 맨 첫 책에 처음 인간들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창세기 2:17)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게 뭐가 나빠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게 하셨지? 선과 악의 차이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게 아닌가. 사실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기 전부터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라', 땅 위의 생물을 '다스리라', 그리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 등의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불순종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기 전부터 진실과 거짓 사이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성서를 보니,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은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세기 3:7)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들은 "벗었으므로 두려워"(창세기 3:10) 했다 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으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이 생겼다'라고 해야 맞지, 벗은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니요.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창세기 3:7, 새번역) 두려워하는 것과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유대교의 저명한 랍비이자 사상가 조너선 색스(Jonathan Sachs)가 한 가지 통찰을 주었습니다. 그는 구약성서 중에서 특히 '토라'라 불리는 모세 5경에 정통한 학자입니다. 그도 선악과 이야기는 자신에게 매우 불분명한 이야기였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다가 저명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책 『국화와 칼』을 읽고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잘 아시지만, 이 책은 일본이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이후 미국인들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음을 깨닫고 당시의 위대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들에 관해 설명해줄 것을 의뢰해 쓴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수치심의 문화'와 '죄의식의 문화' 사이의 차이였습니다.

저자는 인류에게 두 가지의 문화가 있는데, 하나는 '명예와 수치심의 문화'(culture of honor-and-shame)이고, 다른 하나는 '의로움과 죄의식의 문화'(culture of righteousness-and-guilt)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명예와 수치심을 강조하는 문화입니다. 수치심의 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는 명예입니다. 이와 달리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의로움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수치심은 내가 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스스로 자신이 나쁘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죄의식은 내가 양심이 스스로 요구하는 대로 살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타인 지향적이고, 죄의식은 내면 지향적입니다.

수치심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입니다. 혹은 '내가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인다고 상상하는가'입니다. 즉 자신의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이와 달리 죄의식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나 생각이 아니라 내 안의 양심의 소리가 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면화된 도덕적 명령들입니다. 그러니까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비록 나의 대중적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아도 나 자신이 내가 잘못한 줄 알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깨어서 번민합니다. 셰익스피어도 그랬지요. "나의 양심은 혀가 수천 개 / 각각의 혀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네 / 그 모든 이야기가 나를 악당이라고 단죄하고 있지." 양심은 어디를 가든 나를 따라다니며, 남들에게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없이 내 안에서 속삭입니다. 한마디로 죄의식의 문화는 '귀의 문화'(culture of the ear)입니다. 수치심의 문화는 '눈의 문화'(culture of the eye)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이제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를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온통 시각과 눈과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간교한 뱀은 이렇게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산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그 말을 듣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한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세기 3:6-7) 보십시오. 온통 시각과 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세기 2:25) 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숨으려 했습니다. 인간이 수치심을 느끼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은 숨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고 상상할 때 느끼는 감정이기에 수치심을 느끼면 사람은 가장 먼저 숨으려 합니다. 부끄러움을 덮고 가리려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그들이 한 맨 처음 행동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덮은 것이고 그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숨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세기 3:8)

우리는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는 있지요. 사람들이 모르게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버리고 은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는 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도망갈 곳은 없습니다. 숨는다고 해서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남의 눈에 띄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온통 내 안에서 들리는 어떤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보니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라고 물으시니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창세기 3:11, 공동번역)

에덴동산에서 처음 살았던 이 두 사람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귀'가 아니라 '눈'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눈을 따라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한 가지 지식을 얻었으나 그 지식은 잘못된 종류의 지식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수치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내면에서 호소하는 의로움에 관한 게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를 오고 가는 삶으로의 추락,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이 전하는 타락의 기사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니 내면의 도덕 명령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입니다. 교회 안에 시각적 요소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차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구약성서를 꿰뚫는 핵심 단어의 하나는 '쉐마'(Shema)입니다. 신명기에 무려 92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Shema)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저 어릴 적에 집에 '쉐마'라는 이름의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그 피아노를 참 좋아했는데, 이 좋은 이름의 피아노 회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쉐마, 즉 '들으라' 했습니다. '보아라'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오직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애굽기 20:4)가 십계명의 제2계명일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것을 거듭해서 강조한 이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의 일이지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의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그들이]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신명기 4:12) 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뿐만 아닙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사악한 왕비 이세벨을 피해 도망을 쳤을 때의 일이지요. 쫓기고 쫓기다 어느 동굴로 숨어들었는데 지치고 상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 장면이 성서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곁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11-13) 보십시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후 지진도 아니었습니다. 지진 후 일어난 불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불 이후에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세미한 소리, 다른 성서는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혹은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a gentle whisper)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 안에 계셨습니다. 성서는 거듭해서 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4) 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들리십니까? 들으십니까?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했습니다. 이 소리가,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들으십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들으십니까?

귀 기울임은 심오한 영적 행위입니다. 귀 기울임은 또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갈등의 대부분은 상대방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느끼는 서운한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종종 내가 다음에 말할 내용을 생각하느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감할 줄 모릅니다. 하지 않습니다. '여보, 305호 아줌마 좀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면, '내가 봐도 그래. 이상한 사람 같으니 자기 피곤하지 않게 상대하지 말아요' 하면 될 것을, '당신도 똑같아. 내가 겪어봐서 알아.. 그리고 나니까 이런 얘기 해주는 거야... 나는 객관적이거든!'이라고 말하는 남편은 정말 꼴 보기 싫습니다. 불편한 마음 그저 들어주고 알아주면 될 것을 말입니다.

공감은 듣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무엇을 알았다 할 때는 "I see"라고 말하지요. 아는 것도 시각적 은유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요즘엔 더 좋은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때는 "I see you"라고 하지 않고 "I hear you"라고 말합니다. '나는 너를 듣고 있어!'라는 말이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따뜻한 말이 또 있겠습니까. 사실 귀를 기울이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중심이며, 끝입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내가 열려있다는 것을, 내가 그를 존중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감정이 나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귀 기울임을 내가 그를 배려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거기서 사랑과 존경이 피어납니다. 귀 기울임은 그러므로 사랑의 전주곡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배우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학생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선생님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는 지도자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내 영혼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영혼의 고요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웬델 베리는 "모든 노래 중에서 / 최고의 노래는 / 고요 속에 들리는 / 새소리. / 하지만 먼저 / 그 고요를 들어야 한다"(웬델 베리, <최고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깊고 고요한 숲속에서 들리는 새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 노래를 들으려면 먼저 그 숲의 짙고 푸른 고요를 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삶이 소란하면 하나님이 들리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휘둘리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 안의 소음과 잡음과 씨름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먼저 고요를 들어야 합니다. 먼저 침묵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소리'입니다 성서 히브리어로 '콜 데마마 다카'(kol demama daka), 이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은 우리가 세심히 귀를 기울일 때만 들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외로움이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영어로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은 다릅니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고독은 주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입니다. 현대인은 이 고독을 잃었기에 외로움이 몸부림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잃었기에 외로움에 몸부림칩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메마른 땅이고 황무지입니다. 가도 가도 모래뿐이어서 볼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바르'이며, 지성소는 '드바르'입니다. '광야'와 '말씀'과 '성소'의 어근(語根)이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슴속에 광야의 고독이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고요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 고요가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세상의 소음과 내 안의 잡음과 남들의 눈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영혼의 라디오를 켜십시오. 눈을 감고 귀를 열어 내 영혼의 라디오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 안의 잡음과 씨름하지 말고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면 잡음이 사라집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3)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가복음 4:9)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입니다. 영혼의 소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그분의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a gentle whisper)를 듣고 생명과 진리의 길로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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