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정호승

제비꽃은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고

진달래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다 사라질 뿐이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되고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됩니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듯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시인(1950- )은 제목을 경구(警句)적으로 달았다. 처방적인 어조를 띠지는 않으나 교훈을 짐작하게 한다.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존재를 상징한다. 꽃들에게 남이란 다른 꽃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포함한다. 꽃들은 인간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이 서로 남인 것이 분명한 관계라면 서로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부러움은 서로 다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생기는 의식인가? 물론, 시인이 의도하는 서로 다름은 현격한 분리가 아니다. 시의 산문적인 어조는 이러한 의미를 다소 직설적으로 전한다. 그러나 경구가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그러나 사람들은 남을 부러워합니다'라는 말이 메아리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제비꽃은 자기가 진달래가 아닌 것을 안다. 진달래는 자기가 장미가 아닌 것을 안다. 그래서 서로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다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체들 사이라면 비교의식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제비꽃들끼리는 어떨까? 원래 부러움이라는 것이 경쟁할 만한 상대방에게서 촉발되는 의식이 아닌가? 꽃잎의 색조, 꽃술의 길이, 향기의 농담 등의 미세한 차이로부터 꽃이 피어난 자리, 벌이나 나비 혹은 사람들의 관심 등에 이르기까지 부러워하고자 하면 시기하거나 다툴 정도로까지 부러워할 만한 요소가 많다. 제비꽃은 진달래가 되려고 하지는 않지만, 제비꽃들 부류 중에서 진달래 같은 존재가 있다면 부러워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제비꽃, 진달래,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지만, 자기 동료는 부러워한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각성이 해법처럼 제시된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되고/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됩니다." 자기다움을 알고 그것에 맞게 "열심히 살다 사라질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게]" 된다. 마치 시인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말하고 있는 듯이 들린다. 그러나 정작 그의 눈에는 제비꽃, 진달래, 장미가 비교되고 있다. 서로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대상들 사이에 부러워할 소지가 전제되어 있다. 제비꽃은 진달래를 부러워할 만하고, 진달래는 장미를 부러워할 만한데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장미는 "결코"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고 진달래는 "결코" 제비꽃을 부러워하지 않는 상태이니까 계층의 다름조차 암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실상 서로 부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모순, 혹은, 위선이 아닌가?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비교하는 습성이 은연중에 드러났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은 그러한 조건을 안고 살고 있다. 식물처럼 한 곳에 고정되어 살지 않고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대상과 조건을 접하게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비교의 습성을 개발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어쩌면 비교는 생존을 위한 기능일 수도 있다. 그러한 조건을 전제한다면, 시인의 성찰은 소망과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의 아름다움은 나르시시즘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다움을 실현하면서 "열심히 살다 [미련 없이] 사라질"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자기다움에 충실하게 사는 일이 아름다운 삶이다. 그는 그렇게 살고자 한다.

그 삶의 아름다움이 바로 인간의 "쓸모"를 구현한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지 못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 없는 이유이다. 자신의 "쓸모," 혹은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 부러워하면서도 부럽지 않은 척하는 위선을 방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다양한 개체들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갖고서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은 꽃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인간 세계에도 제비꽃, 진달래, 장미 같은 존재가 있지만,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려 사는 것이 아름답다. 그리고 제비꽃의 부류 안에서도 진달래, 장미 같은 존재가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은 더 아름답다. 비교할 소지가 많은 영역 안에서 서로의 자기다움에 충실하게 살며 자신의 "쓸모"를 구현하는 것은 인내와 수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결실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동료 인간의 삶에 대한 공감은 바울 사도의 전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 그릇을 예로 들었으나 그도 인생의 "쓸모"를 구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 등은 외형적인 다름에 따라 귀천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들 가운데서도 천하게 취급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각자의 "쓸모"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쓸모"는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구현되는데, "이런 것"이란 "망령되고 헛된 말"(디모데후서 2:16)과 그로 인한 불경건과 불의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망령되고 헛된" 비교의식을 제지하고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는 것이 "쓸모"를 아름답게 구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라디아서 6:4-5). 자신의 "쓸모"를 구현할 때 명예는 자기의 것이 되고, 그 또한 남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게 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쓸모"의 모양과 그 결실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결실은 보람을 상대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절대적이다. 그래서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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