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박기평)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는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미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하고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시인(1957- )은 암울하고 억압적이던 노동 현실을 몸으로 견디며 투쟁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그의 시 세계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날선 도전보다 인간의 본질과 신앙에 대한 성찰에로 전향했다. 이 시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느린걸음, 2015)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전에 그가 환기했던 기계나 부속품으로 취급되는 암울한 노동현장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누구든 견뎌야 하는 실존적 조건의 고통스러움을 그 경계선에서 돌아온 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미 죽음 같은 현실을 경험했으나 그럼에도 절망을 부추기지 않고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소망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와 있는 현실로 여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런 사람은 "푸른 희망의 사람"이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결말을 기다릴 때 자주 한숨을 쉰다. 한숨을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직'이라는 말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급기야 절망의 기운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만 바라보면서, 겨울의 추위에 떨고만 있으면서, 막막한 현실에만 집중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답안과 햇봄과 미래가 아예 오지 않는 양 눈을 감아버려서는 안 된다. 절망의 경계선에서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안다.
'이미' 문제 속에 답이 들어 있고, 햇봄이 겨울 속에 들어차 있으며, 미래도 현실 속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아직'의 덫에 걸려 절망하게 된다. 절망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그 사실을 "보아[!]"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타이른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우리 곁에 미래가 이미 온 것처럼 여기며 품고 기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는 기다림 자체 때문에 지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미래를 바란다면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기다리는 '이미'의 세계는 공상이나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의 권고는 치열한 체험의 체에 걸러져 응축된 현실적 지혜의 정수(精髓)이다. 그는 '아직'과 '이미'의 사이를 망각하거나 비약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하[는]"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심어놓았다. '아직'의 시간을 인내할 때, "아직 오지 않는 좋은 세상"을 이미 온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라고 설득한다. 이 지혜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수를 합리화할 변명을 고안하지 않으며, 실패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도 북돋우어준다. 만일 이런 감동과 용기로 현실을 살아간다면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1950년대에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확립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시에는 우리가 지침으로 삼아야 할 신앙생활의 원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인 '이미'의 세계를 제시받았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의 선포가 현실에서 '아직' 구현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의 고통 앞에서 힘들어하며 탈출을 꿈꾼다. 그 와중에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을 기대하는 것이 유토피아적 도피라는 비판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대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갇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미'와 '아직' 사이가 바로 믿음의 세계라고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 확인하며,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보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인데, 이것을 신앙의 선조들이 이미 증명해보였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히 공상이나 환상의 작용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체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자유의지에 따라 '아직'의 시간에 '이미'를 살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미'의 세계에서 '아직'의 시간을 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과 역전된 방향의 삶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죄와 육신의 정욕 때문에 그 형상이 훼손되고, 현실적 조건 때문에 영적인 진실을 감지할 영혼의 능력이 약화된 상태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믿으면서 아직 아득해 보이는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 그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하고/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푸른 희망의 사람"이 되는 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