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20:11-18
설교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하나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울까요. "아름다움의 어원은 앓음다음"이라고 한 시인(박재삼)은 말했습니다.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지요. 도스토옙스키는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톨스토이도 말했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다."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울다가, 또 울다가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습니다. "왜 우느냐"라고 천사들이 물었지만,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는 마리아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울먹였습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슬픔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도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상실감, 그것은 남겨진 이에게 너무도 큰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영적 고통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뒤에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뒤로 돌아섰을 때 그분이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예수님을 몰라볼 수 있습니까. 한평생 그만 바라보고 따라온 마리아가 아닙니까.
눈물 때문이었을 겁니다.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마저 잃어버린 줄 알고 충격과 비통에 휩싸인 마리아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예수님이 물어도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만 알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도대체 무거운 시신을 혼자 힘으로 어찌 옮기겠다는 말인가요. 무모할 정도로 마리아는 간절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던 마리아에게 주님은 "마리아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퍼뜩 정신이 든 마리아가 히브리말로 외쳤습니다. "라부니!"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습니다. 스승이 "마리아야"라고 제자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그분의 목소리가 마리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닿았습니다. 그의 영혼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졌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한국의 어느 시인(김춘수, <꽃>)의 말처럼, 마리아는 그때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이사야 49:1)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요한 10:3, 14)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그의 이름을 호명하셨을 때 마리아는 자기의 슬픔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고통의 감옥에서 문을 열고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그의 아픔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의 어둠 밖으로 그를 불러내셨습니다.
부활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사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부활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마리아처럼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 어둠 밖으로, 내 슬픔 밖으로 나를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능력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메 무 하프투."(Μή μου ἅπτου) 어떤 성경은 "나를 만지지 말[아]라"(개역한글, 현대인의 성경), 혹은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새번역), 즉 "Touch me not"(KJV)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나를 붙들지 말라"(개역개정), 즉 "Do not hold on to me"(NIV)로 번역하는 게 좋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주님의 거절은 냉정하게 들립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너무도 사랑했기에 누구보다 더 깊이 절망했던 마리아 옆에 머물러 계시면 안 되는 걸까요. 잠시라도 머물러 계시면 안 되는 걸까요.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찬송가 442장 3절) 120년에 지어진 찬송가입니다.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마리아는 그분을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주님은 마리아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만남이 영원한 함께함이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기 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거절은 냉정하게 들리나 과거의 주님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 편히 머물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세상 끝에 가서나 이루어질 희망사항 따위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죽음 이전으로의 복귀가 아닙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잠시 살아났다가 다시 죽음을 맞이할 일시적 소생(resuscitation)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을 멸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임의 권세를 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집착하고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부활은 나누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고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하신 예수님은 곧이어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빈 무덤까지 숨차게 달려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실망하여 각각 자기의 집으로 돌아간 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예수 부활의 소식이 세상에 알린 최초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떠난 적이 없습니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찬송가 442장 후렴) 마리아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환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노래는 우리의 간증이 되었고 우리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쁨을 노래합시다. 우리의 간증을 찬송합시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합시다. 먼저 찬양대가 부르고 또 함께 노래합시다. 나를 나의 어둠 밖으로, 나를 나의 슬픔 밖으로 나를 불러내셔서 영원한 생명, 참 생명 안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