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아마추어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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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에스겔 37:1-6, 빌립보서 3:10-14, 요한복음 20:19-23

설교문

유대인의 신앙과 삶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 따르면, 인간을 창조하는 일은 천사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이외에 지구상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만들고 계셨습니다. 한 <탈무드 Sanhedrin 38b>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의 일을 묘사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거룩하신 분께서 사람을 창조하러 오셨을 때, 그분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물으셨다. '사람을 만드는 데 동의하는가?' 그들은 '주권자시여,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그러자 천사들은 답했다. (시편 8:5)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다시 말해, '사람이 창조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멸하셨다. 하나님은 두 번째 천사들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그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하나님은 그들도 멸하셨다. 하나님이 세 번째 무리의 천사들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답했다. '주권자시여,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천사들이 당신에게 사람을 창조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는 당신의 것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러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홍수 세대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바벨탑을 건축한 세대에 이르자 천사들이 하나님께 물었다. '첫 번째 천사들이 옳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사야 46:4) '너희가 늙을 때까지도 나는 변치 않고,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내가 참을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딜레마는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존재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탄생과 함께 우주는 자의식(自意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창조세계 전체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고 계셨습니다. 여러 대학 도서관 대출 1위를 달린다는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 균, 쇠>나 그의 <문명의 붕괴>를 읽어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인 존재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노아의 홍수 전에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기 6:5-6)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이 광활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현존(現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믿어주셨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 진정한 종교적 신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이상하고, 다루기 힘들고, 배은망덕하고, 종종 타락한 존재인 인간에게, 반은 땅의 먼지요 반은 하나님의 숨결이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희망을 두십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은 늘 용서하시고 우리가 넘어질 때 언제나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것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그날 그 부활절 저녁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요한복음 20:19-23)을 보면, 부활의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for the fear of the Jews)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제자들이 정말로 무서워했던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바위'라고 불릴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험한 골고다 길을 오르실 때 멀리서나마 뒤따라간 제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지쳐 쓰러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일도 제자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대신 장사를 지냈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러 올라간 이들은 제자라고 불리지도 못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철저하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데에도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베드로와 요한이 부리나케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바로 이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동참하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숨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그들 한가운데 오시어 "salom alekem!"(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두 번이나 반복된 예수님의 평화의 인사입니다. "salom alekem!"(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새로운 위임의 말씀, 곧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날 그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두 번에 걸친 따뜻한 평화의 인사와 곧바로 이어진 새로운 사명의 위임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야단과 질책이 쏟아져도 아무 할 말이 없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제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저는 이랬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 너 나와! 네 놈이 그러면 그렇지, 처음부터 네가 어떤 놈인 줄 알았다. 널 믿은 내가 바보다! 요한, 너도 나와. 너도 나를 무지 실망시켰어! 너희들 모두 그러고도 내 제자들이냐?...' 복음서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무서워서"가 숨어 있었다고 했지만, 그들은 그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부활하셨다고 전해 들은 예수님이 무서웠을 겁니다. 무슨 낯으로 그들이 주님의 얼굴을 다시 뵌다는 말입니까? 제자라는 자부심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없었을 겁니다. 정작 제자들이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은 그 다락방의 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 문이었을 겁니다. 그날 그 부활의 첫날, 제자들은 주님의 낯을 피해 세상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마디도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거꾸로 지나간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똑같이 제자들을 대하시고 품어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눈 녹듯 사라졌을 겁니다.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다시 살아났을 겁니다.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데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희망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할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모두 내쳐버려도 시원치 않을 제자들을 다시 믿어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하시며 새로운 소명을 주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특별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숨을 내뿜으셨다'(emphysao)라는 요한의 증언은 의미심장합니다. 성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숨'으로 표현한 곳을 딱 세 군데뿐입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2:7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그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을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스겔서 37장)에서, 패망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숨이 사방에서 불어와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 속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요한복음 20:22에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을 숨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새롭게 창조하실 때에만 엄격히 제한되어 쓰였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민족을 다시 일으키실 때, 그리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며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신비한 생명공동체인 교회를 지으실 때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부활절 저녁 이후에도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더 컸을 겁니다. 그는 낙향하여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거기 다시 숨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다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잡은 물고기로 함께 조반을 드시며 베드로에게 천천히 말을 건네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우리는 헤어진 연인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긴 했니?' 과거형입니다. 원망이 가득 묻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현재형입니다. 지금을 물으셨습니다. 이걸 물으실 때 주님은 그를 '베드로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직접 지어주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그의 신앙고백이 견고한 바위와 같아서 그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친히 붙여주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세 번을 부르셨습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절의 이름입니다.(요한 1;42) 예수님을 처음 만나 첫사랑에 빠졌을 때의 풋풋한 열정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하는 이름입니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운동경기에서 프로 선수, 즉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선수가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을 아시는지요. 라틴어 '아모르'(amour)가 어원입니다. 그 뜻은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마추어란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경기를, 일을,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기에 행동하는 자가 아마추어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명은 베드로의 아마추어 사랑을 상기시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풋풋하고 성실했던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도 아마추어 사랑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바보 같고, 순수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아마추어 사랑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도 바보 같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마추어 사랑을 노래합니다.

"주여, / 제가 천당에 들여보내 달라고 기도하면 / 당신의 반월도를 든 천사들을 보내셔서 / 천국의 문들을 제 앞에서 모두 닫아버리십시오. // 제가 만일 / 지옥이 무서워 당신을 사랑한다면 / 그 영원한 천 길 불길 속에 / 저를 던져버리십시오. // 그러나 주여, /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오직 / 당신 때문이라고 한다면 / 당신의 팔을 벌려 / 저를 맞아주십시오." 여러분의 사랑, 아직도 아마추어 사랑입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교 신앙이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다시 사신 그날 그 찬란한 부활절 새벽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따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믿어주신 그날 그 부활절 저녁에 완성되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로 낙향 베드로를 끝까지 찾아가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그날 아침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없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할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마지막 날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를 믿어주시고 긍정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지 못할 인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은,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우리 각자는 인생이라는 저마다의 노트에 날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깨끗이 지우고 다시 쓰고 싶은 문장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우개와 같은 분입니다. 2천 년 전 그날 그 부활절 저녁에 제자들의 부끄러움과 좌절을 깨끗이 지우시고 새 생명의 역사를 쓰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삶의 실패와 좌절과 부끄러움을 깨끗이 지우시고 다시 시작할 기회와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 자신에 대해 "No"라고 말합니다. '너는 틀렸어. 너는 실패했어. 이젠 가망 없어!'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Yes"라고 하십니다. '난 널 믿는다!' 정말이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말할 것처럼,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놓음으로써 우리를 창조적인 변화로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언제나 믿어주시고, 일으켜주시고, 새로운 소명 주시는 하나님의 풋풋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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