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희망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1945- )은 별과 어둠의 관계를 통해 희망과 고난의 관계를 밝힌다. 역설적이다. 어두워야 별이 보이듯이 고난의 암울한 현장에서야 진실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대낮에도 별은 뜨나 인간의 눈에 띄지 않고, 하늘이 어두워질 때에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대낮에 별이 빛나지 않는 이유는 햇살이 더 강렬하기 때문인데, 이는 현실에 만족하거나 임박한 문제에 집중할 때 꿈이나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과 같다. 그 상태는 그 자체가 마치 명백하고 자명한 진리인 양 희망의 필요성조차 삭제해버린다. 희망이란 본질적으로 말해서 결핍이 만든다. 그리고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결핍은 고통을 초래한다. 고통은 결핍을 보완하기를 상황상 요구한다. 그때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고통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결핍이 삶의 함정이 되지 않도록 그 암울한 현실에 빛을 비춘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당연시하던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약점과 치부를 깨닫게 함으로써 새로운 자아에 눈을 뜨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난은 희망의 원천이자 새로운 발견의 통로이다.

별은 대낮에도 뜨지만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햇빛 아래서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별을 찾지 않을뿐더러 눈앞에 환하고 자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지내기에도 바쁘다.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당연하여 낯선 요소들을 일상화하고 사람들로 그 당연함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인다. 그렇게 사고가 습관화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사고의 내용이 된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흐제(Paul Bourget, 1852-1935)의 명제가 있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니까 사고는 현실을 닮게 된다. 자기가 옳게 살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별은 밤에 빛나니까 대낮에 현실을 밤처럼 낯설게 볼 수 있지 않은 한, 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별은 대낮에도 그것을 찾는 자에게나 보인다.

대낮에도 별을 찾는 자는 비현실적 공간을 사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긴다고 비정상적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일단, 당연하다는 시각 자체가 편견일 수 있는 데다 일상적인 일을 낯설게 보려는 시도까지 비정상으로 재단하면, 현실을 다각도로 고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선의 여지조차 억압하게 된다. 한편, 관점의 차원과는 달리 물리적으로 대낮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구름이 해를 가리듯 불가항력적으로 닥치는 고난이 그런 경우이다. 고난이란 육신적으로나 관계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나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때는 밤낮이 온통 어둡다. 좌절이나 권태는 별개로 하자. 그런 상태는 일종의 어두운 함정과 같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아예 고개를 들고자 하지 않으므로 그런 사람은 어둠에 익숙해져서 별빛을 필요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고난은 별빛을 찾게 한다.

어쩌면 고난과 별빛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고난이 닥쳐야 희망을 품고,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고난이 닥쳤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지칭한 "그 별"은 바로 암울한 현실에서 품게 된 희망을 가리킨다. 그렇게 보니까 어둠과 별은 고난과 희망의 역설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역설은 인생의 실존적 부담이다. 고난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피안에서 한가롭게 논평하는 듯이 들리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역설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진리인 사실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고난은 유의미한 인생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낮이 지나면 밤이 다가오고,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아침이 밝아오는 원리와도 같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의 굴레에 매여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변해야 한다. 그 변화의 과정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고난이다. 고난이 개입된 변화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으로 해명할 수 없다. 고난에 대해 자신의 전 존재를 투여하여 대응할 때, 그 반응의 결과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새로이 조형하게 된다. 자기만의 인생의 이야기를 쓰면서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 이야기의 내용이 번화하거나 야단스러울 수 있어도 고난을 실존적 부담으로 여기고 직면하는 순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처럼 진솔하게 된다. 그가 그 순간에 품게 된 "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여기서 "어둠 속"이란 암울한 현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공유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내면적 공간도 가리킨다. 그 공간에서 그는 "조용히" 고난과 희망의 역설을 성찰하고 실현하게 된다.

한편, "조용히"는 존재의 시간(the moment of being)이다. 그 시간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도 일러준다. 그 시간은 세상의 온갖 소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마음속 불안의 목소리도 숨죽이게 한다. 자신의 약점과 추한 모습까지 직면하면서 대낮의 평화롭고 안일했던 기억을 지운다. 그때 마음의 다른 한 켠은 현실적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온갖 수단을 동원하도록 자극하고 많은 이웃의 선의의 지혜를 끌어들이며, 자신의 경험과 계산이 꼬드기는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 고난의 종류나 정도에 따라 어떤 수단이나 지혜나 목소리는 어둠을 빠져나올 경로를 일러주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해서, 어둠 속에서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둠이란 외부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황이므로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살펴야 할 계기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는 "조용[해야]" 한다.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는 "그 별"은 공간적 개념이기보다 이상적 순간을 대변한다. 암울한 고난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비친 희망의 빛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현실의 장애를 돌파하거나 넘어설 동력과 방향을 제시한다. 그 자체가 최고의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고난이 먹구름처럼 이상을 가리기는 해도 그 사람은 자기에게 특화된 고난을 통해 그 이상에 도달한다. 고난은 당하는 사람 개인을 암울하게 하므로 그 어둠을 벗어날 희망도 그 사람 개인에게 특화되는 것이다. 특화된 희망은 자기의 내면의 목소리만이 알려줄 수 있다. 자기를 "조용히" 들여다볼 때 그 목소리가 들린다. 따라서 고난은 자신의 약점과 치부를 확인하고 그 결핍에 특화된 진실한 희망을 품게 하여 이상을 실현하게 하는 통로이다.

어둠 속에서 "그 별"을 발견한 사람으로 구약성경의 인물인 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아마도 그가 살아온 만큼 두꺼운 어둠의 장막을 졸지에 뒤집어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모든 이력을 완전히 뒤집는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의롭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당연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내와 친구들과 그 자신의 삶까지도 자기에게 항변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의 내면에 임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기 내면의 합리적인 대응까지도 거두고 그분의 목소리를 "조용히" 청종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욥기 40:4-5). 그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한 "그 별"은 마침내 그에게 고난의 원인과 우주 운행의 원리까지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 그가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임재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는 뜻이다. 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치부까지 "조용히" 확인함으로써 "그 별"이 자신의 참된 자아일 수도 있음을 알렸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희망이 아닐까?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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