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은
장옥관
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 허기 때문에
놓쳤던 안경알의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그 행복했던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
시인(1955- )은 "흐린 날은 잘 보인다"며 상투적 인식을 뒤집는다. 흐린 날은 시야가 문제다. 시력이 미치는 범위가 물리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그런 불가피한 조건이 인식의 상투성을 감지하게 한다. 일상을 낯설게 보게 한다. 그 과정의 종국은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역설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래서 "흐린 날은 잘 보인다"는 흐린 날은 잘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식의 상투성은 일종의 고정관념 혹은 편견을 연상시키므로 흐린 날은 고정관념이 역전되는 날이다. 고정관념은 일상을 투명하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투명성은 일상을 망막에 맺히게 하지 않으므로 일상을 무심결에 지나치도록 만든다.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계기로든 상투적 인식을 뒤집을 수 있다면 일상과 자신의 존재 의의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흐린 날에 무언가를 잘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낯설게 만든다. 배경이 흐려진다고 대상까지 흐려지겠는가? 흐려진다는 것은 시각적 조건의 변화이므로 우선 거리의 문제를 환기한다. 멀리 있으면 그 대상이 흐리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가까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보이는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과 그렇게 여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일단 망막에 상이 어린 상태인 반면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상이 어리지 않는다. 주목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시력은 물리적인 거리에 좌우되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인식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을 말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거리에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다. 심리적 거리 때문이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로는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이 먼저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물리적으로 시야를 가득 채운 풍경 때문에 그의 시선은 방충망에 주목하지 못했다. 분명 방충망을 통해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을 터인데 그것이 명백하게 압도적이면 가까이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방충망에 먼지가 끼었음에도 풍경이 또렷이 보인다. 이처럼 비가시(非可視)의 상태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한편으로, 내적 동기 때문에 가까운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 허기 때문에/ 놓쳤던 안경알의 지문." "눈 허기"가 발동하면 그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에 주목하지, 목적을 이루게 할 수단이나 매체는 눈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심리적 거리란 환경적 요인과 내적 동기의 영향을 받는다. 이는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요인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말이다. "흐린 날"은 일상적인 상황의 역전을 암시한다. 너무 밝은 날에는 "풍경"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눈 허기"를 "도무지 참을 수 없[게]" 되므로 모든 것이 투명해진다. 반면에, "흐린 날"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는 투명했던 것들이 낯설어진다. 마음에 비치지 않아서 못 보았던 "그 행복했던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도 보게 된다. "그 행복했던 날"에는 행복만이 보였고 확신에 찼을 때는 확신만 보였었다. 그날 식탁보에 쏟은 찻물의 얼룩이나 확신의 빛 뒤로 밀려나 있던 암울한 현실에는 눈을 주지 않았었다. "자잔한"은 '자잘한'의 경상도 방언인데,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싯구들 때문에 이 단어를 먼지나 지문처럼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장치처럼 여겨진다. 시의 의미를 깨달은 듯 자잘한 확신들에 사로잡혀서 시의 본래적 의미마저 투명하게 지나쳐버리지는 말라는 당부로도 들린다. 이와 같이 고정관념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허기처럼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그러나 "흐린 날"은 고정관념에 의해 "자잔한" 것들로 간주되었던 "사물의 뒷모습"을 보게 한다. 고정관념을 깨면 사물의 본 모습을 보고 포괄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우리가 날씨를 흐리게 하지는 못하므로 "흐린 날"은 고정관념을 흐리게 만들라는 지시로 볼 수 있다. 그 내적 지시에 따라 고정관념의 눈을 감게 되면 비로소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과 "사물의 뒷모습" 등 본질적 양태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그 본질적 양태란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 확인하게 된다. 어제 행복하게 "자잔한" 확신들에 사로잡혔던 모습이 사실은 그런 몰골이었다. 물론, "흐린 날"에 그러한 몰골을 확인하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으나 그것은 "비로소 보인" 고정관념의 몰골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환경이나 내적 동기와 상관없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에서도 고정관념은 타성을 형성한다. 타성은 관행을 합리화하고 그 '합리적' 기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게 한다.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발견하는 신앙의 역설적 구조를 놓치게 한다. 더욱이 "흐린 날"을 고난의 상징으로 본다면 고난의 시기에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본령인데, 타성은 그 본령을 간과하고 고정관념의 왕국에서 하나님처럼 살게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