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숲에는
이상국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시인(1946- )은 소나무 숲을 "이 땅"의 시원(始原)으로서 모든 사람이 귀환하게 될 곳으로 본다. 어쩌면 숲은 대지의 여신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고향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머니 같은 귀소(歸巢)의 자리이다. 아마도 세상은 요란스러운 데다 소외와 비통과 이별이 이어지는 곳인 반면에 그 숲이 그 모든 애환을 흡인하는 듯 보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 흡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바깥 세계와 대비되면서 모든 사람의 회귀를 기다리는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가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맥락상 시인이 그 실체에게로 회귀하고 싶은 욕구를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결국, 숲과 일체가 될 그 존재는 숲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인가?
시인은 소나무 숲을 보았다. 그 숲은 세상살이의 일상적인 현장과는 떨어져 있다. 분리가 신비감을 조성한다. 그 속에 무언가 있을 듯이 여겨진다. "뭔가"란 실체를 알 수는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이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낮의 세계와 절연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를 만나려면 낮의 세계를 떠나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인격적 실체임을 암시하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그 기다림은 낮을 떠나는 행위를 그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저렇게"는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 모습은 간절한 만큼 조심스럽다. 마침 밤이 되면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숲의 짐승은 밤이 오기를 숨어서 기다리므로 밤이 왔을 때 얼마나 안도할까. 물론, 짐승이 "누군가"는 아닐 것이다. 기다림이 그만큼 간절했음을 짐승의 본능에 비겼을 뿐이다. 그 "누군가"는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존재이다. 숲에는 분명 그 바깥 세계를 떠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인격적 실체이기는 하나 기다림의 간절함을 의인화한 표현일 수도 있다. 간절하므로 그는 외친다. 외치는 만큼 바깥 세계로부터 탈출해야 할 당위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외침은 시각화할 정도로 강렬하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숲이 보이지 않는 횃불이자 들리지 않는 함성인 순간은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는]" 소망이 감각의 경계를 넘었음을 알린다. 함성의 흔들림이 그 경계가 허물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간절히 숲은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기다리는데, "모두"는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를 가리킨다. 그 초혼의 염이 간절한 만큼 숲은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세상에서 억울한 원한과 한스러움으로 고통당하는 상태까지 전 존재로 포용하고자 기다리는 듯하다. 아마도 그 모습은 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의 역전된 표현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간절한 순간에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숨조차 멈춘다. 울어도 눈물이 소리를 삼킨다.
그때는 죽음의 경계도 넘는다.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밤이 내린 숲은 죽음의 공간이어서 관계의 간극과 시간조차도 경계를 지운다. 그러나 그 시공간은 삭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은]" 화합의 터이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원한과 다치고 서러운 기억들이 없어지되 그들의 사회와 역사가 통합됨으로써 이해와 위로가 생성된다. 그 이유나 절차는 알 수 없어 신비하나, 모두가 다 만나는 순간과 공간에서는 원한도 억울함도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숲에는 정적이 감돈다. "밥 짓는 연기들"은 일상을 유지하고자 벌였던 매캐한 행위들을 통칭한다. 그 행위들로 원한과 억울함이 생겼으나 그것도 숲에서는 별일 없었던 듯이 흩어진다. 이로 보건대,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누군가"는 분명히 화합을 지향하는 존재일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면 그 존재를 만날 수 있다. 죽음의 유혹이다. 숲에는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이 견딜 수밖에 없었던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리킨다. 그 탈출의 욕구를 실행하지 못하고 여전히 원한과 한스러움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그 숲의 기다림은 죽음 같은 낮의 세계로부터의 죽음을 유혹한다. 그만큼 생명에의 열망이 간절하다. 그 간절함은 당사자만 안다. 따라서 "누군가"는 탈출의 욕구를 품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로 보건대, 시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의 문제를 성찰한 듯하다. "소나무 숲"과 그 바깥 세상 사이에서 깊고 간절하게 자신의 삶이 지향할 바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바깥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죄 없이 죽고 다치고 서러워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렇게 죽음의 지배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의 주체는 물론 나 자신이며 애환을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욕구의 결집체이다. 그 욕구는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찾고자 하는 생명에의 소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생명의 길일진대 선택해야 할 기준은 명백하다. 신앙생활에서도 기준의 선택은 명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영혼은 생명의 세계로부터 멀어진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경고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