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장윤재 교수 설교] "재 대신 화관을"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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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61:1-3, 로마서 8:26-28, 요한복음 16:5-8

설교문

체코의 프라하성에 가면 아담하고 예쁜 골목길이 있습니다. '황금소로'(Zlata Ulika)라 불리는 길입니다. 원래는 성에서 일하는 집사나 보초병들이 살던 곳인데, 이후 금세공사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소로라 불렸다 합니다. 현재는 성벽에 몇 채의 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22번 하늘색 집은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작업실로 유명합니다. 몇 년 전 체코 여행 중 거기에 가보았다가 그 집이 너무 작아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카프카는 인간 존재의 불안과 위기를 특유의 정서로 다룬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입니다. 그는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 초기부터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당시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은 체코인으로도 독일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자주 분노를 퍼부었고 아들이 문학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경멸했습니다. 아들은 매사에 군림하려 드는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평생 사회적 불안장애와 신경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 일입니다. 폐결핵을 앓던 카프카는 요양을 겸해 독일 베를린에서 지냈습니다. 하루는 도시 근교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린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벤치에 앉아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느냐 묻자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카프카는 소녀와 함께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나무 밑과 풀숲 그 어디에서도 인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카프카는 소녀에게 내일 다시 찾아보자고 달랬습니다.

다음 날도 인형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실망해서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소녀를 보다 못해 카프카가 말했습니다. "사실 너의 인형은 여행을 떠났어." 깜짝 놀란 소녀가 물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인형이 너에게 전해 달라며 편지를 보냈어." 소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카프카는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깜박 잊고 집에 놓고 왔어. 내일 꼭 가지고 올게." 소녀는 눈물을 매단 채 카프카를 바라보았습니다. 의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에 카프카는 미소로 화답하여 소녀와 헤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온 카프카는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인형 대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작품을 쓸 때처럼 정성을 다해 썼습니다. 카프카는 그 소녀를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임기응변으로 꾸며낸 이야기였지만 진실하게 쓰면 그 아이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녀의 상실감을 다른 차원의 상상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카프카는 편지를 들고 공원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랐습니다. 카프카가 대신 그 인형의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주었습니다. 인형은 자신이 왜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소녀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울지 마. 나는 슬픈 이유로 사라진 게 아니야. 잠시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인형은 자신의 모험에 대해 날마다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카프카와 소녀의 만남은 몇 주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인형은 카프카의 마음을 빌어 매일의 신나는 여행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편지가 거듭되면서 소녀의 마음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습니다. 며칠 후 소녀는 자신이 인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습니다. 대신 카프카가 들려주는 상상 속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3주가 지났을 때 소녀의 슬픔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카프카는 마침내 긴 여행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인형을 손에 들고 소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 인형은 카프카가 소녀를 위해 산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소녀는 놀라며 말했습니다. "내 인형과 전혀 안 닮았어요." 카프카는 인형이 쓴 또 다른 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내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어." 어린 소녀는 새 인형을 꼭 안고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카프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흔한 살, 너무도 이른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이제 어른이 된 소녀는 인형 속에서 카프카의 서명이 적힌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올 거야."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으로 날마다 그 베를린 공원을 함께 산책한 도라 디아만트의 책 <프란츠 카프카와의 생활>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올 거야."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고별담론'(요한 13:31-17:26)의 일부입니다. 지상을 떠나시는 예수께서 지상에 남겨두는 제자들을 향해 길게 당부하신 말씀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 중에 영(靈, spirit)에 대한 요한의 독특한 칭호인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나옵니다. 요한은 이 칭호를 네 번(14:16, 26, 15:26, 16:7)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옆에, 나란히'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부르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인'이 합쳐진 '파라칼레인'에서 유래했습니다. '옆에서 부르다'를 뜻하는 이 동사에서 명사 '파라클레토스'가 나왔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흔히 법정에서 조력자, 피고측 변호사로 부름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말이 우리말로는 '보혜사'(保惠師), 즉 지키고 돕는 자,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는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시면서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 16:5-8)

왜 이렇게 예수님은 비장(悲壯)하신 걸까요? 왜 이렇게 지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은 슬프면서도 꿋꿋하신 걸까요? 사랑하는 제자들이 극한의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요한 공동체는 유대 회당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 박해는 흔히 재판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의 재판이 아닙니다. 죄인은 이미 정해졌고, 태형과 투옥과 추방과 몰수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단자로 정죄를 받고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고 목숨마저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 80년 후반에 이르면 유대 회당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 대처하여 '이단자들을 정죄하는 축도'라 불리는 파문 결의를 했습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영원히 지워달라는 무서운 탄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억울한 내 사연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강한 소용돌이가 나의 삶 전체를 휩쓸어가는 경험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법정에 끌려나가 자신을 변호해야 했던 일은 없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이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법정에서의 조력자, 피고측의 변호인, 즉 지키고 보호하는 이인 보혜사입니다. 요한은 이 보혜사가 단지 변호인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불의를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검사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분이 내 '옆에, 나란히' 계신다면 나는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될까요.

보혜사라는 말 안에는 '위로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지상을 떠난 후 슬픔에 빠져 있는 초대 교회를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영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로마서 8:26) 분이라 했습니다. 이 영은 일찍이 구약성서 이사야의 아름다운 예언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이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이사야 61:1-3)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노래처럼 흘러나올 수 있을까요.

보혜사 성령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시는]"(새번역) 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죄를 지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을 때 재를 뒤집어쓰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까맣게 타버린 사람들에게 '화관'(華冠, crown of beauty)을 씌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화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프에르'는 성서에서 여자들의 장식품의 한 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신랑이 기쁨의 표시로 머리에 쓰는 것이었고, 또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머리에 썼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꽃바구니를 머리에 이었을까요.

신약성서에서는 이 화관(그리스어 '스테마', 사도행전 14:13)이 제사장의 머리에 두른 화환이나 제사장의 '지팡이'를 의미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다른 제사장들이 두 사람을 신으로 생각하여 가져온 제물 중에 이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슬퍼하는 자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신다는 말씀은 그 영이 캄캄한 우리 앞길에 '지팡이'(cane), 혹은 등불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It's You>라는 노래를 아시는지요. 가수 윤복희 씨가 불렀습니다. 그가 질병과 이혼으로 고통받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오빠 윤항기 목사가 지어준 노래입니다. 최근에는 가수 에일리 씨가 불렀고, 가수 소향 씨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앞서 읽은 이사야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으니]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셨다]"(새번역) 윤항기 목사는 영어로 된 가사에서 '화관'을 '지팡이'로 바꾸어 이렇게 노래 가사를 썼습니다.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하니? / 주님이 말씀하셨지 내가 너의 지팡이니까 나만 잡고 따라와 / 네가 사랑이 필요할 때 / 내가 바로 너의 사랑이 되어줄게 / 그러니까 웃고 나를 봐 / 누구나 이 길을 걸어가 / 그러니까 나를 믿고 어깨를 펴 / 여기서 멈출 수 없어 / 지금이 시작이고 이 길이야 이 길, 오직 하나뿐이야 / 우리 함께 이 험하고 아픈 세상을 같이 가자..." 이 노래에는 끝에 작은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라고 묻고 주님께서 위로해주신다고 말하던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답변입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 바로 여러분! (It's You)." 위로받던 우리가 회복되어 위로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언제가 배우 김혜자 씨가 제주도 배경의 TV 드라마를 찍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유명 배우가 왔다고 많은 사람이 촬영장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대본을 암기하고 있던 배우에게 커피를 사다주며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을 돕기 위해 30년 넘게 아프리카를 다니셨잖아요. 그런 노력이 대단한 일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 없지만,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 상황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세요? 기독교를 전파해서 아이들이 더 인간적으로 자라나는 세상이 되었나요?" 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습니다. 더 불편해지기 전에 누군가 그 질문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배우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나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도 아프리카가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아이가 아이를 낳고,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총을 들고 다른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매일 눈이 퉁퉁 부었어요. 내 안에 있는 것은 슬픔과 분노가 전부였습니다... 나는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그곳에 간 게 아니에요. 흙탕물을 마시고, 파리가 눈곱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고 말하는 건 폭력에 가까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하나님이 그 현장에 계신다면 '나를 믿고 구원받으라'라고 하시겠어요? 먹을 걸 주고 병을 치료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눈치도 없이 계속 물었습니다. "그럼 왜 아프리카에 계속 가시는 거예요?" 배우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곳 아이들과 여자들이 나를 좋아했어요... 아이들은 내가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얼굴을 만져 주면 행복해하고 영양실조로 잔뜩 부푼 배를 해 갖고도 나를 보고 웃었어요. 특히 어린 엄마들은 나와 함께 손잡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통역을 거쳐야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여자인 나와 여자인 그녀가 손을 잡고 앉아 서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좋은 거예요." 이 말을 하던 배우의 눈은 반짝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갔어요. 어떤 젊은 여자는 병에 걸려 치료도 받지 못하고 흙집 안에서 죽어 가다가 내가 가서 손잡아 주고 앉아 있으니까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어요. '감사해요'가. 나는 숨이 멎는 그녀의 손을 잡고 기도했어요. 이 여자를 꼭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라고. 꼭..." 반짝이던 배우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세상에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실은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지요... 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어서 그냥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예요...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여자들이 나를 만나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내가 그들을 치료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에요. 나는 단지 다가가서 '많이 아프겠구나. 그런데도 눈이 정말 예쁘구나. 영혼이 참 맑구나' 하고 말을 걸어 주고, 나에게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함께 앉아 있어 주었을 뿐이에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세상의 폭력에 대한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 축복의 순간들이 내가 느끼는 슬픔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일, 그것이 진정한 위로인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 소녀와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던 그 소녀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생의 말년에 카프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먼 길 여행을 떠난 인형의 우체부 역할을 하면서 상실감에 울고 있던 소녀를 위로했고, 그 아이는 치유되었습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올 거야." 작가는 소녀에게 이렇게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험한 지상에 남기고 먼 길을 떠나야 하시는 예수님은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고별담로 14-16장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또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하시는 주 여호와의 보혜사 성령이 오늘 여러분에게 내리시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이사야 61:1-3, 새번역) 하는 위로자가 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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