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장윤재 교수 설교] 생명의 샘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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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4:1-4, 갈라디아서 5:16-23, 요한복음 7:37-39a

설교문

얼마 전 유엔 산하 한 전문기구에서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한국인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한국의 행복지수는, 불행히도, 부자나라들이라는 OECD 38개국 중 33위로 최하위권이었습니다. 유튜브로 '먹방'을 즐기고,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한국인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 "배가 나와야 사장이지"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배부르게 먹는 게 모든 사람의 소원이던 때의 노래입니다. 지금 그 소원은 이루어진 것 같으나, 이젠 배부르게 먹는 걸 가장 경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식과 비만은 만병의 원인입니다.

'우리 시대의 역설'은 이것입니다. "소비는 많아졌으나 더 가난해졌습니다. 더 많이 사지만 기쁨은 줄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냅니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고,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납니다. 책은 너무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보고, 기도는 너무 드물게 합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약들은 더 많아졌는데, 행복은 더 느끼기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목이 마릅니다. 풍요 속에 목이 마릅니다. 부(富)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고 했지요. 누군가 "돈은 소금기가 있는 짠 바닷물과 같다" 했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이 마릅니다. "부자에겐 자식은 없고 상속자만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 속에 외롭습니다. 어떤 사람이 홀로 사막을 걷다가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외로워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그랬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영혼의 사막'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37-9a) 오늘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이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그들의 3대 명절입니다. 초막절은 원래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거친 광야에서 집 없는 나그네 되었을 때 머리 위에 지붕 없는 초막을 짓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명절 동안엔 이스라엘 어느 곳에나 초막이 들어섰습니다. 평평한 지붕 위에, 길거리에, 광장에, 정원에, 그리고 성전 뜰 안에까지 들어섰습니다.

절기 동안 사람들은 매일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제단의 주위를 행진했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 위에 붓습니다. 이때 이사야 12:3절, 곧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이 낭송됩니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 반석으로부터 솟아 나온 물에 대한 기억의 예식입니다.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식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예식이 진행되던 순간에 그것을 배경으로 울려 퍼진 음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마가 8:29, 누가 9:20)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모든 세대를 향한,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내어준 반석과 동일시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다]"(시편 105:41)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반석이라 초대교회는 고백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샘]'(시편 36:9)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생수의 근원'(예레미야 2:13, 17:13)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물에 대한 아름다운 예언이 있는데, 이 원천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요엘 3:18),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스가랴 14:8),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거대한] 강"(에스겔 47:5)이 되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에스겔 47:9) 나는 예언입니다. 유장(悠長)한 '생명의 강'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이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시편 36편 기자는 지치고 힘들 때 주의 날개 아래에 피하면 하나님께서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고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시편 36:8) 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이사야 44:1-4)

요한은 이 예언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며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어 메마른 자들이 시냇가의 버들 같이 피어나게 하는 분입니다. 수가 동네 야곱의 우물에서 생수를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한 4:10-11) 하셨습니다. 그리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는데 요한은 이것이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한 7:39a)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목이 마릅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이 메말랐고, 땅이 메말랐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메말랐고, 미래에 대한 꿈이 메말랐습니다. 우리가 목마르다는 걸 잘 아는 분들은 광고 제작자들입니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처럼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의 소비 지향적인 사회에서 모든 광고는 본질적으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젊음에 목마른 자, 날씬함에 목마른 자, 쾌락에 목마른 자 자기의 제품을 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공허한 약속과 거짓 광고에 지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달콤함 속에서 공허함을 맛본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유혹의 문화 속에서 어떠한 약속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내게로 와서 [진정한 생수를] 마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갈 때 그는 단지 목마름을 잠시 면할 음료를 주지 않으실 겁니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주실 겁니다.

성령강림의 절기입니다. 사실 교인들은 성령강림절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성령강림절을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성탄절처럼 카드를 주고받지도 않습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에서 잃어버린 절기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성령강림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마치 물 없는 수영장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영 자세와 방법을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물이 없는 수영장에서는 아무도 수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목마른 사람은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그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과 같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빈들에 마른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위에,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부어주시는 새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기쁨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소개하면서 그중의 두 번째는 '희락'(喜樂), 곧 '기쁨'이라 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외치신 그 초막절은 기쁨의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단지 광야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추수 감사의 기쁨을 누리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늦가을에 오는 초막절은 모든 수확을 거두어들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초막절은 가장 인기 있는 명절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 혹은 '우리의 기쁨의 계절'이라 불렀겠습니까. 넉넉한 자들만을 위한 절기가 아니었습니다. 과부과 나그네, 가난한 자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였습니다. 기쁨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기쁨입니다.

젊은 예비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새 수도원에 배치 받았습니다. 주어진 임무는 선임 수도사들의 성경 필사를 보조하는 일이었습니다. 유서 깊은 그 수도원은 수 세기에 걸쳐 경전을 필사하는 일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한 세대가 원본을 필사하면 그다음 세대가 그 필사본을 베껴 적고, 또 그다음 세대가 앞 세대의 필사본을 다시 베껴 적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돕던 예비 수도사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단어 하나라도 잘못 베껴 적는다면 나중 세대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계속 틀린 내용을 필사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신성한 원본을 매번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무도 현재의 필사본의 진위를 원본과 대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수도원장을 찾아가 이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방면의 전문가다. 오류가 발생할 리 없다. 하지만 그대의 의문도 일리가 있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지금쯤 원본과 필사본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수도원장은 원본이 소장된 지하 보관소로 내려갔습니다.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오후를 지나 저녁이 되어도 수도원장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젊은 수도사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지하 계단을 내려가 원본 보관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희미한 조명 아래 수도원장이 머리를 벽에 찧으며 울고 있는게 아닙니까. 젊은 수도자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뭐가 잘못되었나요?' 늙은 수도원장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원본에는 celibate(독신 생활을 하라)가 아니었어, celebrate(즐겁게 살아라)였어.'

혹 우리 중에도 도중에 '기쁨'이라는 단어를 '심각함'으로 잘못 베끼진 않았을까요? '웃음'이라는 단어를 '근엄함'으로 틀리게 적진 않았을까요? '감동'을 '무덤덤'으로, '행복'을 '소유'로 옮겨 적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우리 역시 잘못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기쁨이 없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머리만 작동할 뿐 가슴이 멈춘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죽이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뭔가를 보고 '아!' 경탄할 줄 아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뭘 봐도 그저 심드렁한 사람은 마음이 굳어진 사람이거나, 영혼의 샘이 말라버린 사람들일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부(富)를 결정하는 기준은 '얼마를 버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느끼고 감동하며 사는가'입니다. 풀벌레 하나, 꽃 한 송이, 저녁노을, 사소한 기쁨과 성취에도 놀라워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진짜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먼저 노래를 부르고 또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족 중 누가 아프거나 우울증에 걸리면 부족의 치료사가 찾아가 다음의 네 가지를 묻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사 선생님들처럼 '어디가 아프십니까?'가 아니라 이 네 가지 질문입니다. (1)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2)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3) 마지막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4)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 이 네 가지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오래전이라면 몸과 마음이 병드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루빨리 하라는 것이 그 부족의 처방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마태 6:6)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오래전이라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영혼이 목마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요한계시록 21: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마지막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강을 소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려 함이라"(요한 15:11) 하셨습니다. 이 기쁨을 내 안에 가진 사람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사야 58:11)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한 7:38) 하셨습니다. 단지 내가 그 생수의 강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수의 강이 우리를 통해 흐르고 또 흐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부드러운 물이 / 제 몸을 부수어 / 바위를 뚫고 물길을 내듯이 / 당신의 사랑을 / 단단한 고집과 편견을 깨뜨려 / 물처럼 그렇게 흐를 순 없을까 // 제 가슴 속에는 언제나 / 성령의 물이 출렁이는 / 사랑의 통로 // 갈한 영혼을 촉촉이 젖게 하시고 / 상한 심령에 생수를 뿌리시어 / 시든 생기를 깨어나게 하는 / 생명의 수로가 될 순 없을까 // 물처럼 낮은 곳만 찾아 흘러도 / 넓고 넓은 바다에 이르듯이 / 낮은 곳만 골라 딛고 더 나가도 // 영원한 당신 품에 이르게 하시고 / 어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 오늘도 내일도 여일하게 // 쉬임 없이 나의 갈 길 달려가면 / 마침내 영혼의 바다에 이르지 않겠나"(김소엽, <물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생명의 샘(히브리어 '마코르 하임')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넘치는 원천입니다. 이 생명의 샘에 모여 그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경험할 때 거기서 우리의 기쁨이 회복되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교회는 이렇게 생명의 원천(源泉)이신 하나님 앞에서 함께 기쁨의 잔치를 벌이며 찬양하고 노래하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목마른 자들은 다 여기 와서 영생의 물을 마시십시오. 여기에 좋은 샘 흐릅니다. "어린 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잖[습니다]." 이 샘물을 마시는 자,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속에서 생수가 솟아나 늘 풍성할 것입니다. 그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을]"(시편 1:3) 것입니다. 그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하나님의 유장한 생명의 강이 온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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