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용서
정일근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
누군가 용서하며 울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
나는 바다에서 뭍으로 진화해 온
등 푸른 생선이었는지 몰라, 당신은
흰 살 고운 생선이었는지 몰라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눈물 받아
제 살에 푸르고 하얗게 섞어 주는 것이니
바다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고
용서받지 못할 사랑은 없으니
바다가 모든 것 다 받아 주듯이 용서하자
마침내 용서하는 날은
바다가 혼자서 울듯이 홀로 울자
시인(1958- )은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고 권한다. 왜 그는 용서를 생각하며 바다를 연상했을까? 문득 다가온 깨달음의 순간에 용서와 바다의 속성이 통했을 것이다. 그 순간에 마치 이질적인 광물들이 서로 용융하여 섞이듯이 용서와 바다는 하나가 되어 바다의 용서가 되었다. 바다가 보여줄 수 있는 용서의 속성은 무엇일까? 일단 바다는 시원(始原)의 세계이므로 용서할 일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이다. 용서 자체가 불필요하고 그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그 세계에서는 용서가 가능하다. "모든 것 다 받아"주니까. 바다가 선별적 선택의 장이 아니듯이 용서도 선별적 선택을 넘어서 "용서받지 못할 사랑"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그 본질적 속성이다. 그렇게 용서하지 못할 일까지도 용서하니까 울 수밖에 없다. 바다가 혼자서 우는 이유는 "모든 것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만물의 시원이므로 그 원천에서는 얽혔던 실타래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용서를 고민해본 터라면 그 고민의 실마리는 그 일의 원천에서 찾아야 하지 않던가? 그래서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고 시인은 말한다. 물론, 거기서 논리적인 해결 방책을 실제로 찾지 못할 수 있다. 거기에는 첫걸음의 순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바다로 가자는 것은 첫걸음의 순간으로 돌아가되 그 중간의 얽혔던 실타래와 같은 과정은 뛰어넘자는 뜻이다. 용서를 만물의 시원인 바다와 연관시킨 이유가 바로 시원으로의 비약을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그 비약은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것이 바다에 가서 울게 되는 이유이다. 사실, 바다는 그런 이유 때문에 늘 홀로 운다.
그렇다면, 바다의 속성을 배울 때 용서의 의의를 깨달을 수 있겠다. 그래서 "누군가 용서하며 울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 용서를 결정할 때 그 원한과 울분이 눈물을 만든다. 이 때문에 바다는 늘 운다. 왜 바다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가?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에서 뭍으로 진화해 온/ 등 푸른 생선이었는지 몰라, 당신은/ 흰 살 고운 생선이었는지 몰라." 나와 당신이 뭍으로 나와 진화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연원으로부터 나왔고, 서로 다르기는 하나 그 다름이 용서를 고민하게 할 일을 만들었음을 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원리와 용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선택에 인생을 맡기기에 인간은 너무나 인격적인 실체이다. 그 인격체의 고민이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을 만든다. 그날에 우리는 어머니에게로 달려갈 수 있다. 용서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만물의 시원으로서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눈물 받아/ 제 살에 푸르고 하얗게 섞어 주는 것이니" 다름을 포용할 때 용서해야 할 일도 사라진다. 그 일은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바다가 된다.
그래서 "바다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고/ 용서받지 못할 사랑은 없으니/ 바다가 모든 것 다 받아 주듯이 용서하자." 물론, 적자생존의 현장에서는 약육강식의 원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할 일들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용서는 그 현장과 그 원리를 초월할 때 가능하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시원의 세계로, 종교의 세계로 비약해야 한다. 비약은 현실에 대한 의도적 망각의 행위이다. 피해에 대한 논리적 해명과 상처에 대한 기억조차도 애써 잊어야 한다. 사람도 사랑도 잊으려는 과정에 울음을 삼키며 안 우는 듯이 울어야 한다. 죽을 것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끝에 바다가 있다. 그 "바다로 가자"는 말은 장소의 이동만큼이나 시간이 걸리고 달라진 세계를 맞이할 의지를 다져야 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바다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고/ 용서받지 못할 사랑은 없[는]" 세계이다. 왜냐하면, 그 "바다가 모든 것 다 받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란 바다처럼 "모든 것 다 받아 주[는]" 것이다. "모든 것"이란 사실상 용서할 수 없는 일까지 포함한다. 이는 서양 철학사에서 통념적인 사고를 해체해온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용서하다』(배지선 역 [이숲, 2019])에서 용서에 대한 통념을 깨트린 바를 환기한다. "궁극적 윤리는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것, 나아가 가장 근본적인 악마저도 용서하라고 명령할 겁니다. 불-가능을 실현하고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만 용서는 [...] '의미'를 획득할 수 있고 용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34-35). 그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가 제기하는 모순과 역리가 울게 만든다. 그러나 그 울음은 원한의 확인이 아니라 모순과 역리를 초월하는 비약의 증거이다. 그래서 "마침내 용서하는 날은/ 바다가 혼자서 울듯이 홀로 울자." 혼자 울 때 바다가 된다.
예수께서 바다의 용서를 가르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마18:22).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듯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은 그와 같이 용서할 수 없는 경우라도 용서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분도 그렇게 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용서의 비약에 대해 바울 사도가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베소서 2:3)였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생명을 바침으로써 그분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셨다. 십자가에서 홀로 우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생명의 은혜가 새로워지는 시원의 세계이며 모든 것을 다 받아 주는 바다와 같다. 용서는 그 바다에서 홀로 우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