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사상을 통해 우리의 삶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살피는 연재글이 「기독교사상」 최신호(5월)에 실려 눈길을 끌고 있다. "'공동존재'와 '테크네' 개념을 통해 보는 기술시대"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 임현진 연구교수(이화여대 여성신학연구소)는 신학이 아닌 철학에 기대 과확기술과 인공지능 시대를 진단하는 기획에 대해 "신학과 철학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한쪽을 다른 한쪽에 종속시키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철학적 사유는 신앙과 혼돈됨 없이 오히려 신앙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학은 철학에 종속되어 유사철학이 되거나 또는 철학과 적대관계에 있거나 하는 양극단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의 주체인 우리 자신이 처한 사상사적 위치와 비판적 시대정신을 일깨워주는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며 "이러한 철학의 역할을 통해 얻게 되는 측면을 외면한다면 신학은 기복신앙과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고 덧붙였다.
이어 임 교수는 하이데거의 에세이 『기술에 대한 논구』(1954)에 등장하는 두 용어 '공동존재'와 '테크네' 개념으로 오늘날 과학기술과 인공지능 시대를 조명했다. 먼저 '공동존재'(Mitsein)에 대해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동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임 교수는 이는 "각자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애매한 말이다. 누가 시키는 대로 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나의 선택을 거치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은 각자가 살아가는 삶이다"라며 "그런데 그 선택은 결국 대개 이미 남들에 의해 규정된 바를 따르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우리가 각자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공동존재'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설명도 보탰다. 임 교수는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이데거가 과학기술 자체를 반대하고 기술문명의 혜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며 "그보다는 삶을 지나치게 규정하는 수량적, 계산적, 정밀과학적인 사고 유형이 주된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되어 학문과 삶의 위기를 가져오는 시대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이데거 사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재자 개념에 대해서도 부연했다. 임 교수는 "이 '존재자'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이해하자면 '있는 것(사람)' 과 '~인 것(사람)'이 될 터인데, 가끔 이 말은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처럼 굳이 무엇이 있는지를 밝히지 않아도 재력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이것이 전혀 다른 뜻이라고도 볼 수도 없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 중심의 사고는 일상 속에서 우리 각자로 하여금 무엇이 이러하다를 결정케 하는 '남들'의 가치기준에 따라 주로 행해지는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며 "사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남들을 형성하는 한 일원이 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남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기에, 우선적으로 남들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한 후 안정감을 얻게 된다. '있는 사람들'이라는 우리말 표현에 전제되는 재력은 남들이 보증해주는 안정감을 얻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자의 주된 특성으로 자기 자신만의 삶을 물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돌이나 기계와 같은 사물 또는 다른 동식물 등의 생명체들과 다른 이러한 인간 존재 자각의 가능성은 죽음을 앞당겨 경험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에 임 교수는 "남들로 사는 나와 참 나로 사는 나의 가능성 사이에서 움직이는 구체적 사태에 각자 처해 있다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말 대신 '현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무엇보다도 이 현존재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각자 살아가지만 늘 남들을 바라보고 비교하고 남들이 원하면 나도 원하기도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며 "그러니까 단순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늘 구체적 상황에서 두 가능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이러한 공동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 같지만 사실 이는 오히려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어둠에 싸이고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며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많은 경우 그것이 본래적 내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본래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오히려 불안에 휩싸여 피하고 싶어 한다. 이 글의 첫 번째 키워드인 공동존재라는 말은 우선 대개 존재자 중심적 사고의 일상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드러내 밝히는 용어이다"라고 부연했다.
기술적인 것들의 근원을 가리키는 또 다른 하이데거의 용어 '테크네'의 어원에 대해서도 살폈다. 임 교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테크네의 의미는 예술작품과 수공예 등 모든 제작을 아우르는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의 일종이었다. 포이에시스는 시(詩)의 어원이다. 이는 '숨겨져 있던 것을 앞으로 끌어내어 놓는다'를 의미하는데, 또 한편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의 문자적 뜻인 '비은폐'라는 의미와도 통한다. 결국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학기술은 본래 인간의 제작을 통해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어 우리 앞으로 가져다 놓는 시적인 진리의 한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볼 때 과학기술과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시가 기술의 근원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임 교수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은 서구가 근대 이후 수학적이고 계산적인 정밀함에 우위를 부여하고 이에 과몰입하여 과학기술의 시적인 진리의 차원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 결과 기술은 오늘날 자연과 인간존재자 모두를 몰아세워 에너지 자원으로 비축해두고서 최종적 소모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적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라며 "이러한 기술을 통해 오늘날 비은폐로서의 진리는 그 포이에시스적 진리를 숨기고 가리는 것 자체로서의 '진리'가 되고, 수많은 기술적인 것들은 기술의 시원적 본질, 즉 시적인 차원을 숨기는 것으로서 나타난다"고 그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