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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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3:23-28, 빌립보서 3:10-14, 마가복음 10:35-38

설교문

어느 시인(서정홍)이 <기도>라는 시를 이렇게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 교회에 앉아서 기도를 한다. / 가만히 앉아서 / 맨날 무엇을 달라고 저러는지 / 하느님도 머리가 아프시겠다 / 저 많은 기도 / 다 들어주시려면."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런저런 소원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달라고 졸라서 하나님도 머리가 아프신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는 걸까요.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도가 막히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까?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신명기 3:25, 공동번역) 모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한 기도입니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가슴 아픈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게, 아니 가혹하게 모세의 기도를 뿌리치셨습니다. 새번역 성서는 이 기도를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한글은 조사 하나로 어감(語感)이 확 바뀝니다. 하지만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공동번역의 섬세한 번역이 마음에 더 울림을 줍니다.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남들 다 건너가는데 나도 좀 끼워달라는 애처로운 기도입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명기 3:23-27)

모세는 이집트에서 수백 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탈출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고 이제 요르단을 건너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모세는 자기도 요르단을 건너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모세가 누구입니까? 그 해방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이런 모세는 성서는 18번이나 '하나님의 종'이라 불렀습니다. 여호수아는 겨우 2번입니다. 모세가 사망했을 때도 성서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명기 34:10)라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그리도 냉정하게 거절하신 걸까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이 신(Shin) 광야의 가데스(Kadesh)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민수기 20장에 그 일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또 "모세와 다투[었다]"(3절) 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4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8절a) 하셨습니다. 모세는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고 회중을 반석 앞에 모은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어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10절) 그리고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11절) 물이 솟아 나와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지 못하리라."(12절)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본문이 난해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첫째로, 백성들에게 화를 참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10절)라고 불같이 화를 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언어폭력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령하[라]"(8절) 하셨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11절) 친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하지만 바위를 치라는 뜻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애초에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셋째로 모세와 아론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10절)라고 말해서 마치 자기들이 그 권능을 가진 것처럼 행세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12절, 새번역)라고 하시며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모세가 산 위에 오래 머물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출애굽기 32:1-6) 산 위에 있던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때 모세의 손에는 역사상 가장 거룩한 물건, 곧 하나님께서 친히 조각하고 새긴 두 개의 석판이 들려 있었습니다. 산기슭에 이르러 사람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돌며 춤추는 것을 본 모세는 급기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거룩한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출애굽기 32:15-19) 요즘으로 말하면 화를 참지 못하여 물건을 집어던지고 부수는 폭력적인 행동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백성은 언제나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백성들은 늘 음식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다베라(Taberah)라 불리는 광야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민수기 11장이 기록하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울면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든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4-6절)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노예의 기억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건 오직 음식뿐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들을 빼내는 것보다 노예들에게서 이집트를 빼내는 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모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그들의 불평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는 말의 다른 번역은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만나밖에 없다니"(공동번역) "입맛마저 떨어졌다"(새번역)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음식이 없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날마다 신선한 만나를 내려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불평한 것은 이제 그 만나가 지긋지긋하고, 지겹고, 입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이 마음은 요즘 말로 "뭘 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은 안 해주면 불만은 또 그렇게 많더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셨습니다.(10절) 그런데 모세는 분노할 힘도 없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국 상태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탄원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인간의 절망 가운데 이보다 더 깊은 것이 과연 있을까요. "어찌하여 이 종에게 이런 꼴을 보이십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의 눈 밖에 났으며, 이 백성을 모두 저에게 지워주시는 겁니까? 이 백성이 모두 제 뱃속에서 생겼습니까? 제가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이 백성을 품고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어디에서 이 백성이 다 먹을 만큼 고기를 얻어주란 말씀입니까? 저에게 먹을 고기를 내라고 아우성입니다.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진정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민수기 11:11-15, 공동번역) 저도 살다 이런 기도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위로하셨습니다. 70명의 장로를 모아 지도력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하여 모세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메추라기로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신 광야의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이 또다시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수기 20:5)라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거기서 참다못한 모세는 무언가를 잘못했고, 비록 하나님은 바위에서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는 해주셨지만, 모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기 20:12, 새번역)

도대체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모세가 화를 참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입니다. 백성들이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의 분노가 올바른 반응이었는지 모르나, 물이 없어 백성들이 목말라 부르짖을 때의 분노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데스에서 이렇게 분노하게 된 이유는 그 사건이 기록된 민수기 20장의 맨 첫 구절에 단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아, 그랬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모세가 갓난아기 때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을 떠내려갈 때에 끝까지 따라가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거두는 것을 보고서 그 아기의 유모를 찾겠다고 용감히 말해 결국 모세의 친어머니와 모세를 다시 만나게 해준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자신이 이집트의 왕자인 줄 알고 살던 모세에게 그가 본래 누구인지 말해준 사람, 그리고 출애굽의 모든 여정에서 모세에게 힘과 용기와 영감이 되어준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한마디로, 미리암이 없었다면 모세도 없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의지하던 미리암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누이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인간적 기초가 다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러 또다시 "이곳에는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불평했을 때 그 바위 곁에 서 있던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누이를 잃은 슬픔에 그 누구의 위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심지어 하나님이 말씀도 귀에 잘 들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처럼 질그릇 한 조각, 풀잎 하나, 시드는 꽃 한 송이, 그리고 한 줌의 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나 인간의 운명은 덧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물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누구에게든 들어가지 못할 땅이 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을 멀찍이나마 바라보기 위해 느보산에 오르는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의 하나입니다.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요르단 강 건너 저 아름다운 땅, 저 풍요한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라며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본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모압 땅에서 죽어 모압의 한 골짜기에 장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다" 했습니다.(신명기 34:1-12)

인간은 필멸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최고의 단계에서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우리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피조물입니다. 정신은 젊어도 육체는 늙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이라는 선물이 이 땅에서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압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습니다. 들어가지 못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도달하지 못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생이라도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사실 요르단 저편에서의 모세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됩니다. 가장 위대한 인간조차도 실수를 저질렀고, 성공한 만큼 실패했고, 암울한 절망의 순간과 어두운 영혼의 밤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가 완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수를 통해 배웠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실패만이 줄 수 있는 고귀한 선물, 곧 겸손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면서도 끝까지 이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자신은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도착하도록 도왔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한 행동이 무엇이었을까요? 만약에 제가 모세였다면 저는 다 때려치우고 칩거했을 겁니다. '어디 나 없이 저들이 잘되나 한번 봅시다'라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토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오경, 즉 모세가 썼다는 다섯 개의 책 중 맨 마지막 책인 신명기의 첫 구절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지 40년째가 되는 해 11월 1일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그들에게 다 선포하였는데... 모세는 요단강 동쪽 그곳 모압 땅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신명기 1:3-5, 현대인의 성경)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그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모세는 해방자이고 예언자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다음 세대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후 '모쉐 라베누'(Moshe Rabbenu), 즉 '우리의 선생 모세'라고 불렸습니다.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모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신 그 땅에 들어갈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도전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며, 노예가 아니라 자유며, 고난이 아니라 풍요의 유혹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주신 것으로 기뻐하라고 거듭, 거듭 말했습니다. 그것이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 즉 '다시(거듭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우리의 선생 모세'의 가르침을 담은 신명기의 맨 마지막 장은 이렇게 모세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그의 나이 120세였으나 그는 눈도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다."(신명기 34:7) 이 구절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은 어르신들에게 '백스무 살까지 사십시오'가 축복의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단순한 건강기록이 아닙니다. 모세의 나이가 백스무 살 고령이었으나 그때까지도 건강했다는 보도가 아닙니다. 백스무 살에도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새번역) 했습니다. 앞의 문장이 뒤의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모세의 눈이 빛을 잃지 않았기에 그의 기력이 정정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모세가 여전히 젊은 날의 이상, 정의를 향한 열정, 자유에 대한 책임을 늙어서도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기력이 정정하였다는 말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을 포기하고, 냉소적이 되고, 환멸감에 사로잡히고, 낙심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저 편안한 잠자리 속으로 온순하게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 여전히 자기 주위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보면서 자기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나이 백스무 살에 이르러 뒤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앞을 내다봤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은 늙어갈 수 있지만 백스무 살까지 그의 영혼은 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화(老化)는 우리의 눈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을 때 시작합니다. 저것은 벽이라고 그 앞에 멈출 때 시작합니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열 한 살짜리 고아 소년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의 킹스크로스 기차역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기차역에 가보니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던 그 벽 속으로 해리가 성큼 발을 내딛자 벽 속에는 마법학교행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승강장 위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장면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벽(壁)이란 이곳과 저곳을 차단함으로써 그 존재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벽이 없으면 문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벽은 문"입니다. 인생에도 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내 앞에 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그 벽은 벽이 아닙니다. 그 벽은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십니다. 플랜A가 인간의 계획이라면 플랜B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는 건너지 못할 요르단강이 있습니다. 들어가지 못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 과업을 완성하는 일은 당신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인물인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계속해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자매]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0-14) 모세를 보니 바울이 보이고, 바울을 들으니 모세가 이해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모세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습니다. /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입니다."(나짐 히크메트, 감옥에서 쓴 시 <진정한 여행>) 저 것은 벽이다 여겼을 때 우리 앞에 새 문을 열어주시기를,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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