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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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28:10-19, 야고보서 4:8-10, 마태복음 5:8

설교문

성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아마 야곱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꼭 우리 이야기 같습니다. 야곱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에게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족장들 가운데 유리하게 '선택받기 위해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태어나기 전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 모두는 어떤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먼저 태어나기 위해 형의 발뒤꿈치를 잡아야 했습니다. 기회를 틈타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의 장점은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놓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축복하기 전엔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천사를 놓아주지 않았다가 불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집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을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니, 도망쳐야 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자 형 에서가 그를 죽이기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했습니다. 도망치는 길은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앞에는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해는 지고 밤이 왔습니다. 더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요. 바로 그때의 일입니다.

"꿈을 꾸었다. 그리고 보라,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리고 보라, 그 층계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리고 보라, 주님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참말 주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창세기 28:12-17)

'그리고 보라'(and look)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 히브리어 '베히네이'(vehinei)는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야곱은 정말 놀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리라곤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을 때, 가장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모든 걸 잃고 도망치던 중이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가장 외롭고 슬플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깊은 어둠에서 그를 붙드시고, 모든 악에서 그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은 꼭 야곱이 쓴 기도문 같습니다.

"혼자서 큰 밤을 건넙니다 / 내 지팡이는 사막에 던져두어도 / 향내 나는 상록수 / 거대한 지혜의 기둥나무 / 형형한 눈빛 대낮처럼 밝혀 / 키우시네 / 나를 붙드시네 // 살수록 쌓이는 / 내 남루를 덮으시려고 / 시험보다 깊고 너그럽게 하시려고 / 다만 악에서 건지시려고 / 나를 붙드시네 / 나를 건지시네."(이향아, <나를 붙드시네>)

살다가, 우리도 혼자서 큰 사막의 밤을 지나곤 합니다. 너무도 당연시되던 삶의 의미들이 흔들리곤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나는 뭐지?' 하는 허전함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삶이 자기를 상실한 채 껍데기 인생을 산 것 같아 허전함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거의 습관적으로 출근하던 직장인들은 갑자기 '내가 매일 이 짓을 반복해야 하나, 이 직장을 꼭 다녀야만 하나,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위기는 곧 잊어버리거나 무시해버리고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지만, 실직이나 이혼, 갑작스러운 건강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의미의 위기를 심각해집니다. 살다가, 종종 우리도 혼자서 큰 사막의 밤을 지나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야곱은 문자 그대로 또 은유적으로 어두운 '밤'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홀로 큰 밤을 건널 때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영혼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너무도 놀라 잠에서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세기 28:16)라고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새번역)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번역들은 문장의 섬세한 뉘앙스를 잘 잡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이곳에 계시다"라고 말한 다음에 야곱은 히브리어로 "베아노키 로 야다티"(ve'anokhi lo yadati)라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입니다. '나'가 두 번 나옵니다. 사실 앞의 '나'는 불필요합니다. 중복주어입니다. 왜 '나'가 두 번이나 나올까요?

한 학자(Pinchas Horowitz)가 멋진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분명히 이곳에 계시다"라는 것을 알게 되느냐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여기에 지금 현존하심을, 임재하심을 아십니까? 그의 대답은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에 의해서입니다.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라는 말의 뉘앙스는 '나의 무지'를 가리킵니다. '나의 어둠'을 가리킵니다. '나의 침묵'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나의 어둠을 통해서입니다. 나의 침묵을 통해서입니다. 나의 에고(ego)가 깨질 때입니다. 지독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I)를 넘어서 하나님이신 '당신'(Thou) 앞에 자신을 열 때입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분명히 여기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시인이 이렇게 묻고 답했습니다. "단단한 바위에 봄이 어떻게 / 정원을 만드는가 / 흙이 되라, 부서져라 /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니 / 너무 오랜 세월 그대는 돌투성이였다 / 다르게 해 보라/ 항복하라."(잘랄루딘 루미)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단단한 바윗덩어리였습니다. 돌투성이였습니다. 거기서 꽃이 피어날 리 없습니다. 흙이 되어야 합니다. 부서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그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꽃이 피어날 겁니다.

"아무런 열정도 / 마음의 갈등도 /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 그는 다만 /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미구엘 드 우나무노, <신을 믿는 것>)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갈등과 의심과 좌절 속에서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 영혼이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은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편 23편)를 지날 때입니다. 내가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경멸당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내가 그렇게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때가 내가 쓰고 있던 가면들이 벗겨지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발견할 때는 역설적으로 내가 가장 외롭다고 느낄 때입니다. 우리는 나의 어둠 가운데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를 붙드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추락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팔 안으로 추락합니다.

레너드 코언(Leonard N. Cohen)의 노래 "Anthem"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갈라진 틈이 있다. 갈라진 틈은 상처다. 그러나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틈은 빛의 통로가 된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어릴 적이나 젊은 시절에 받은 오래된 상처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많이 약해진 것이다.' '저는 큰 상처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어떻게 먼 과거의 상처들이 지금의 나를 약하게 만들 수 있죠?' 스승은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물병을 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손을 앞으로 뻗어 이 물병을 들고 있어 보라. 무거운가?' '아닙니다. 하나도 무겁지 않습니다.' 10분 후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거운가?' '조금 무겁지만 참을 만합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매우 무겁습니다.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문제는 물병의 무게가 아니다.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가이다.'

인생은 상처의 연속입니다. 흉터가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작은 물병들을 들고 오래 서 계시느라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런데 그 상처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영어 단어 '축복 blessing'의 어원이 프랑스어 '상처 입히다 blesser'에서 나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축복은 종종 상처를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아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아프고 외로울 때 단단한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중 수우족은 그래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기를 대신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누구에게 기도를 부탁하실 때는 저처럼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나 단순히 그가 성직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가장 힘들고 슬퍼 보이는 사람에게 부탁하십시오. 그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것입니다.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틈은 빛의 통로가 됩니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편 147:3)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이사야 30:26) "나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나를 고쳐 주[시는](이사야 30:17) 분입니다. 찢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으로 힘들 때,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우리에게 준 믿음의 유산이고 선물입니다. "신을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길을 잃게 하셨습니다. 참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그가 길을 잃게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길을 잃으셨다면 오늘 야곱과 함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어두움 속에 매장된 게 아니라 파종된 것입니다. 매장(埋葬)과 파종(播種)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깊음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물길을 찾아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야 말 것입니다. 세상이 매장한 것을 하나님은 파종으로 바꾸십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야곱은 자기의 어둠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비추고 있는 그 빛을 발견했습니다. 사실은 그 빛이 항상 자신을 비추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나는 그것을 모른다"라고 인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곳에 계시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마태복음 5:8)이라 하셨습니다. 야곱은 결국 마음이 청결, 곧 깨끗하였기에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까?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면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성결한 마음, 청결한 마음, 깨끗하고 가난한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떤 가면도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Coram Deo) 선다는 말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걸 위해 싸우면서 굳어진 나의 표피적 자아, 사회적 자아의 탈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나, '참나'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말입니다. 그때 빛은 우리에게 옵니다. 아니 태초부터 있었고, 언제나 나를 향해 비추고 있던 그 빛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그 빛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그 빛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이 빛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길을 내어 온다는 것을. 이 빛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에 우리에게 닿기 위해 놀라운 만큼 광대한 공간을 가로질러 왔다는 것을. 그리고 이 생명의 빛은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길 좋아한다는 것을. 잃어버린 것들, 무시당하는 것들, 외로운 것들, 위험에 처해 있거나 혹은 고통 속에 있는 것들을 찾아내 그 옆에 조용히 있어주길 좋아한다는 것을.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빛을 향해 몸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그 빛이 여러분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얼굴을 드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열고, 더 많이 열어 내 영혼의 그 수많은 틈으로 촉촉이 스며드는 그 빛을 꼭 껴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은총의 빛이 혼자서 큰 사막의 밤을 건너시는 분들을 붙드시고 모든 악에서 건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내 안의 어둠과 정직하게 대면하게 하소서. 살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무의미와 고독과 허무를 피하기 위해 온종일 바쁘게 살지만, 내 안의 어둠과 나의 어둠을 언제까지나 피하지 않게 하소서. 영혼을 일깨우는 음성, 반드시 나를 찾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직하게 나 자신과 대면하는 용기를 갖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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