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전진하는 믿음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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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열왕기상 21장 4-7절,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설교문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인가?]

오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두아디라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장 깁니다. 편지의 서두에 주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와 같으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외형적 모습은 "불꽃 같은 눈"과 "놋쇠와 같은 발"로 묘사됩니다. 불꽃은 밝게 빛나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에 보면 악당이나 영웅들은 불꽃 같은 눈에서 레이저 빔(Laser Beam)을 쏘곤 하지요. 이처럼 불꽃 같은 눈은 분별의 지혜와 심판의 이미지가 동시에 있습니다. 놋쇠 같은 발은 우선 안정적으로 서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튼튼한 발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모든 죄악을 짓밟는 강한 힘을 상징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두아디라 교인들 역시 안팎으로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불의의 세력과 맞서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암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외형적 묘사에 이어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두아디라 지역의 수호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기원전 190년경에 로마에 편입된 도시인데, 다른 도시와 달리 규모가 작아서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은 없었습니다. 대신 황제를 위한 제단이 있었고, 이 제단에서 황제 숭배를 안내하는 사제들 정도가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제조업에 기반한 상업과 무역이 아주 활발했다는 것입니다. 온갖 구두 제작, 아마포 노동자, 염색공, 제철공업(청동제품), 구리 세공업자, 도공(옹기장이), 재단사, 가죽 노동자, 직물 상인,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제품들이 생산되고 가공되어 교역이 이루어졌기에 매우 많은 상인 조합들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상인 조합들이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이 있었는데, 바로 태양신 아폴론입니다. 아폴론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신들의 신으로 여겨지던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데, 제우스(Ζεύς)를 하나님(θεός)으로 생각했던 두아디라 시민들은 당연히 아폴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편지를 받는 두아디라 지역의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과연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되묻게 됩니다. 예수인가? 아니면 아폴론인가? 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폴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한다면, 이제 그 사람은 두아디라의 상인 조합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실 당장 생계에 큰 타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도화된 로마제국의 문화에 편입되어 이방신을 숭배하게 되는 순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를 담보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이런 상황들은 초대 교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서 1장 1절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 첫 구절을 통해 자신의 책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며, 그가 그리스도이시고, 그의 가르침과 삶 그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며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하는 내용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가 쓰일 당시 로마제국의 모든 로마 시민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복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모두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네로 황제가 죽고 난 다음 혼란한 로마제국의 상황을 평정하여 구원을 가져다 준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라는 것이지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로 등극한 것은 온 천하에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고 로마의 시인들은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운 책입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온서적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22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초대 교회의 모든 교인은 '황제'와 '하나님', '로마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누구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투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 또한 누구를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을 향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자연과학이 만개한 17세기 이후 세속 문화의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자신의 욕망 실현을 제1순위로 추구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다양한 욕망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그 1순위는 당연히 돈입니다. 작년에 포항공대와 캐나다·독일 공동 연구팀의 연구에 의하면 2030년 9월이 되면 북극의 얼음이 다 녹는다는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북극해가 녹으면 해류가 바뀌어서 어떤 기상이변이 생길는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고, 그것은 아마도 인류 전체를 큰 환란 속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업과 국가들은 이런 재난보다도 북극의 얼음이 녹았을 때, 열리는 북극항로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북극을 통해 교역을 하면 해운 물류 비용이 엄청나게 절감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아닌 것이 서 있고, 그것을 숭상하고 따르는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확실한 마음의 결단을 하고, 고난의 삶을 자처했습니다. 오늘날도 다양한 방식의 우상들이 넘쳐나고, 사실은 많은 교인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할 때 그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고, 주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가만히 관찰해서 분석해 보면,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우상 중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7월에 함께 읽을 책으로 추천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본회퍼 목사님은 '인간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타인을 사랑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추구하며, 그를 자유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매인 자로서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타인을 소유하고 정복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타인을 압도하여 저항할 수 없게 만들며 지배하고자 합니다. ~ 중략 ~ 인간적인 사랑은 타인을 갈망하며, 타인과의 교제와 그의 사랑을 구하지만, 타인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마치 섬기는 듯이 보이는 곳에서조차, 그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영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사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참된 사귐을 위해 참되지 못한 사귐을 중단하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을 반대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본질상 욕망이며, 따라서 인간적인 공동체를 열망합니다. ~ 중략 ~ 인간적인 사랑은 사심 없이 섬기는 진실한 영적인 사랑을 만나면 개인적인 미움으로 변해 버립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목적'인 동시에 '업적'이자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며, 모든 것을 그 아래 굴복시키려 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돌보며 양육하고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며, 그 외에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주 잠깐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영적인 사랑에서 타락해 인간적인 사랑으로 변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영적인 사랑을 위해 반드시 나와 타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사귀라고 하십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예리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참된 신앙의 결단을 하고,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사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칭찬]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19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두아디라 교회가 하는 행위 즉 사역이 훌륭하고, 그것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칭찬입니다. 두아디라 교인의 행위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사랑은 섬김이라는 구체적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고, 믿음은 아폴론을 섬기는 두아디라 상인 조합에 들지 않기에 생기는 온갖 어려움을 참아내면서 끝까지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자발적으로 섬기는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배운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 세상의 모든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구원받아 자유로운 존재가 된 우리는 모든 존재를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섬김에로의 자유로 한걸음 나아간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이미 다 해 보셨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위해 해 주고 싶은 것은 참 많아집니다. 즉 섬김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서로 섬기게 된 현상은 철저한 계급 질서로 운영되는 로마제국 사회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고, 또 세상 질서를 도리어 어지럽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고귀한 신분이고, 돈과 힘을 가진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명예를 얻었고, 아랫사람은 수치스럽더라도 윗사람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굴복함으로써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시하는 자와 따르는 자, 존중을 받아 마땅한 사람과 천시받아 마땅한 사람이 권력의 크기에 따라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 모두가 존중받고, 모두가 서로 섬기는 사회를 꿈꾸고 실행하는 것은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최고의 정치제도로 여기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만인 평등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종종 위협을 받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 돈이 많은 자들, 남들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나온 자들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 밑에 두려는 유혹에 쉽게 굴복합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고, 모두가 존중받아 마땅한 세상보다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칭찬, 섬김과 인내로 드러나는 사랑과 믿음의 행위는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 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소중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책망]

그런데 이렇게 날로 진보하던 교회도 책망을 받습니다. 예언자를 자처하면서 주님의 종을 미혹하게 만들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이세벨을 용납한 행위 때문입니다. 아마도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여성이 들어왔고, 자기가 예언자라며 교인들을 꼬드겨 아폴론 신전에 바쳐지는 제물들을 먹어도 좋으며, 아폴론을 수호신으로 여기는 상인 조합에 가입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가르친 듯 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주님은 그 여성이 회개하지 않고 있기에, 그를 병상에 던지고, 여인의 유혹에 넘어간 이들에게는 큰 환난을 당하게 하며, 이세벨 같은 짓을 일삼는 이들, 그녀의 자녀로 생각하는 이들은 반드시 죽게 하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로마제국의 세속적 문화에 동화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엄격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 여성을 이세벨로 부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세벨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선 이세벨은 아합 왕의 부인입니다.(왕상 16:29-33) 다윗과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은 아합왕이 다스리던 시절에 가장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합왕이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한 후 그녀의 악행을 고발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자리에 자기 정원을 꾸미고 싶었던 아합왕은 여러 제안을 하면서 나봇에게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지만,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따르던 나봇은 아합왕에게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힙니다. 아합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마구 어기는 왕이라는 불명예를 얻기 싫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속앓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이방 출신 왕비 이세벨은 건달 두 명을 섭외하여 나봇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만든 후, 그를 죽여버리고 땅을 뺏어서 아합왕에게 줍니다.

왕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이세벨의 입장에서 보면 아합이 한심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모든 사람은 그의 백성이라는 신앙 전통에 있는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뺏는 것이 어렵지만,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속앓이하는 아합이 더 못난 인간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봇을 모함해 죽인 후 그의 포도원을 왕의 정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강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서 자기 수하에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두고 번영이라는 이름 아래 북이스라엘에 제국문화를 전파하려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열두지파가 서로 협력하여 오직 한 분의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 평등하게 살고자 했던 이스라엘 신앙 전통에서 이런 제국주의 동화정책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나봇이 포도원을 잃은 것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되고 빈부의 차이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소수만이 행복하고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됩니다. 소수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다수의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인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그 힘을 이용해서 더욱 교묘하게 자신들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거기에 걸림돌이 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하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철저하게 이세벨을 물리치라고 얘기합니다. 두아디라의 상인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와 로마의 상업 문화는 부유한 자들만이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 섬기며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세벨의 말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예수님과 더불어서 온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계22:16)

두아디라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오늘 본문이 인류가 만들 세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의 유혹과 대별되고 있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권세를 받은 자는 쇠지팡이로 온 민족을 다스릴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매우 강력한 힘의 비유로 오늘 성경은 예언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강조 용법인데, 바로 사랑과 정의를 담보한 힘이 혐오와 불의에 기댄 힘을 물리쳐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믿음으로]

오늘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시간이 흐를수록 전진하는 믿음, 성숙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칭찬을 들었던 에베소 교회도 처음 사랑을 잃고 말았는데, 작은 도시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온 세상을 다스릴 권세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에 들어가 있기도 한 "생명"과 "사랑"의 가치는 영원토록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일 뿐만 아니라, 기후재앙과 상호 불신, 적대적 혐오감이 가득한 21세기, 이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과 사랑의 힘을 가지고 더 전진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물론 그 권세는 섬김의 사랑과 인내하는 믿음 속에서만 작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전진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려 할 때에 역시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세벨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내세우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세속적 욕망의 문화에 젖는 것이지요. 놀랍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진실하게 본받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따라 교회를 키우고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교회도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면 성장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인데, 본말을 뒤바꿔서 제 몸집 부풀리기에만 혈안이 된 교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교회의 변화는 교인 개개인의 올바른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 어느 교회보다 교육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신앙 영상들을 만들며 꾸준히 공부 모임을 진행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왜곡된 신앙,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신앙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진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전진하는 믿음은 나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믿음의 형제자매를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전진하는 믿음은 바다처럼 넉넉한 믿음입니다. 구체적 섬김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지평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영적 전쟁에서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은 사람에게 "샛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샛별은 금성입니다. 금성은 밤하늘에 나타나는 시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녁 무렵에 나타나는 금성을 '장경성'(長庚星), 또는 '개밥바라기'라고 부릅니다. 개밥을 줄 무렵에 떠오른다 하여 '개밥바라기'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입니다. 샛별이라는 명칭은 새벽 무렵에 떠오르는 금성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빛나는 샛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진하는 믿음은 어둠을 이기고 새벽에 떠오르는 빛나는 샛별과 같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품을 때 가능합니다. 샛별을 간직한 자에게는 어떤 어둠도 어둠일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말씀이길 빕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샛별을 간직하여 영원히 빛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구체적인 섬김과 인내 속에서 점점 더 자라나게 하소서. 사랑하면 할수록 넘치는 사랑이 되게 하시고, 오래 참고 견디면서 더 단단한 믿음으로 서게 하소서. 세상의 물결이 거세고, 주님을 거스르는 풍랑이 우리를 덮칠 때,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어둠을 이기고 새벽을 밝히는 샛별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샛별이신 주님 예수만을 간직하게 하소서. 기후 위기와 전쟁으로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더 사랑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을 내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주님이 승리하신 날, 작은 부활절의 아침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주님의 따뜻한 빛을 쪼이니 지난 삶의 구김살들이 살살 펴지고, 주님의 자애로움과 미소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과 아픈 상처들이 치유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안개가 걷히고, 믿음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주님만으로 충분하오니, 우리가 드린 예물을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돈이 맘몬신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주님의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보다 앞서서 나아가십시오. 어둠 속 빛나는 샛별이신 주님 예수를 마음에 간직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축도

지금은 산 자에게 사랑을, 죽은 이에게는 평화를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 애틋한 위로가 사랑과 지혜의 영,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따라 빛을 밝히며 앞서 나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거룩한 영을 힘입어 주님의 자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 위에, 주님을 기다리며 구원을 소망하는 모든 생명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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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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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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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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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