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마태복음서 25장 1-13절, 요한계시록 3장 1-6절

설교문

[신앙과 삶, 그리고 사회]

지금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1세기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 아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지켜내고 확보할 것인가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이고, 어떤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가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모든 일이 초월적 존재인 신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시절에는 어떤 신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모습도 완전히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신들도 결혼을 하는데, 웬만하면 강한 신과 결합하려고 누가 더 강한 신인가를 따지는 신화가 존재하는 사회는 신들의 이야기처럼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도 강력한 가문과 결혼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신들 사이에 계급이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다신론적 세계에서 기도는 했던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 신 저 신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소원을 빌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형태의 신앙은 대체로 자기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자기에게 올 수도 있는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한 명의 신 또는 다수의 신을 선택하고, 선택한 신들을 상황에 따라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아시기 때문에 신자의 기도 또한 제 욕망을 말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문대골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성공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신화와 신념들, 다른 세계관과 삶의 양태는 갈등을 빚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박해와 고난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들도 참된 신앙의 모습을 기준에 두고 칭찬을 듣기도 하고 꾸중도 받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각 교회마다 잘 하는 일과 못하는 일에 대해서 제법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교회들이 로마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동화정책에 맞서 싸우고 인내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고난 당한 일들, 그렇게 믿음을 지켜내며 서로 사랑한 일들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 신앙이 미적지근한 것, 발람이나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가고, 니골라당의 속임수에 걸려 넘어진 것 등에 대해서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사데 교회에 대한 충격적 평가]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사데 교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우리에게 자못 충격적입니다. 어떤 것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기가 매우 어려운데, 아무튼 계시록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는 이 평가는 사데 교회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더욱더 충격적입니다. "행위를 안다."고 하셨으니, 사데 교회는 분명 각종 사역들을 했을 텐데, 겨우 몇몇 교인들만이 자기들의 흰옷을 더럽히지 않았고, 대다수는 지금 이미 죽은 믿음이거나, 죽어가는 믿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저자는 지금 사데 교회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고, 이렇게 가다가는 하늘 생명책에 이름을 남길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큰 문제는 사데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이 보도하는 대로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아 있다는 이름"이 있다고들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저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야!"라고 제법 이름난 교회가 사데 교회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교회 교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 있다고 이름났다면 제법 괜찮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계시록 저자의 평가는 사뭇 다릅니다.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가득하다" "충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데 교인들 중에 "이 정도 믿음이면 충분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계시록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오히려 불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것이지요. "살아 있다고?, 사실 너희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충분하다고? 아직 한참 모자란 데." 요한계시록 저자의 편지는 분명히 사데 교회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데 교회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사데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은 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과,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닌다는 말 속에서 우리는 소수를 제외하고 사데 교회 전체가 로마제국의 이방문화에 물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데 지역은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가, 기원전 133년경에 로마에 귀속됩니다. 기원후 17년에 지진으로 몰락했으나,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적극적 지지와 후원 아래 도시가 재건되었기에, 사데의 시민들은 자기들을 "황제의 사데"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이 있었고, 금광 산업과 모직 산업, 상업이 발달한 인구 10만의 도시가 바로 사데였습니다. 즉 사데 또한 로마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 세계가 깊숙이 뿌리내린 도시였고, 아마도 사데 교회 소속 교인들은 다수가 이 문화에 동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소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키벨레 여신을 섬기는 남성 사제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었고, 여신을 위한 제단에서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다는 의미로 황소를 잡아 그 피로 자신의 옷을 적시곤 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흰 옷에 황소의 피를 바르는 것은 성결한 행위겠지만,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부정한 행위였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쓰는 계시록 저자가 자기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교인들이 있다고 할 때에는 분명 키벨레 여신의 제사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데 교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일곱영과 일곱별을 쥐신 주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분석해 보면 사실은 죽은 믿음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사데 교인들이 자신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방신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혼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상호 영향을 주면서 습합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드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사데 교회는 바로 이것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오늘 요한계시록 저자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화들짝 정신 차리게 합니다. 잘못하면서도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교파를 초월해서 교회의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장로를 선출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든지 장로를 선출할 때, 믿음의 본이 되고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 장로로 뽑히면 참으로 은혜로운 선출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다 아시듯이 한국 개신교의 장로는 대부분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이 됩니다. 젊은 여성 장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개신교 정신에 따르면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서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 장로, 청년을 대표하는 청년 장로가 나와야 마땅하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한국 장로교 교단 총회에 가보면 검은 양복을 입은 나이 많은 남성들로 가득한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성 총대가 전체 총대의 반이 넘고, 20% 정도가 청년 총대이고, 청년 자문 위원으로 100명 넘는 이들을 파송하는 미국 장로교회(PCUSA) 총회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또한 여성 50%, 청년 25% 수준의 할당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 개신교가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 어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유교적 가부장 사회이기 때문이고, 이 문화가 고스란히 교회에 들어와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개교회 입장에서 은혜롭게 장로 선출을 잘한 것이지만, 개신교 정신과 신앙의 평등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그래도 여성 장로님을 선출했지만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면 연령별로 장로가 선출될 수 있어야 하고, 어리고 젊더라도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신앙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 "한밤중의 외치는 소리"라고 달았습니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에는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해도 다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잡니다. 귀 밝은 사람 몇은 외치는 소리를 듣겠지만, 본인에게 직접적인 문제가 생기는 일이 아니라면 그 소리가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불이야!"라는 다급한 외침처럼 정말로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자던 사람도 깨워야 하고, 모두 시급히 행동해야 합니다. 자고 있었지만 깨어나야 할 때 깨어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나서도 또 제대로 위기를 모면하려면 긴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평소의 훈련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의 비유 말씀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얘기해 줍니다. 마태복음서 강해를 열심히 듣고 공부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마태복음서 24장 45절부터 25장 46절에는 마지막 날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4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 불리는 오늘의 본문 또한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야만 하는 종말론적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 내용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 들러리들의 행동에 나타나 있습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신부 대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 열 명의 신부 들러리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듭니다.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납니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자다가 깬 열 처녀가 이제 각자가 지닌 등불을 손질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는 그렇게 했다가는 둘 다 모자라기에 너희가 얼른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라고 조언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늦게 돌아온 처녀들이 "주님,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애원했지만 신랑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아주 매몰찬 답변이지요.

열 처녀의 비유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의 상황, 위기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열 처녀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횃불인데, 끝을 솜이나 천으로 둘둘 말아서 만든 나무 막대와 적실 기름을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25장 3절을 보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횃불을 준비하면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로 어리석거나, 너무 허술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을 아예 준비 안 한 것이 아니라, 신랑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해 여분의 기름을 준비 못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이것은 위기를 대비해 훨씬 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경고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비롯해 앞뒤에 나오는 4개의 연속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믿음의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다루기에, 오늘 비유도 문자 그대로 읽기보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 즉 알맞은 형식과 그에 따른 내용을 잘 갖추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횃불은 준비했지만 기름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듯이, 번듯한 교회 건물과 제도와 조직은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운용할 교인들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준비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사데 교회가 바로 그랬던 것이지요. 겉으로는 이름이 날만 한 곳처럼 보였는데, 막상 그 내부를 살펴보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실제로는 죽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지난 6월 24일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 한국인 5명, 모두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대형 참사들이 일어날 때마다, 후속 보도를 보면 겉으로는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실상은 반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는 종종 작은 화재들이 발생했음에도, 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리튬 배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화재에 취약하고, 한번 불이 붙으면 열 폭주로 인해 순식간에 고온 상태가 되는 데다가, 불산가스의 방출로 화재 진압이 어렵고, 또 특수한 소화기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아리셀 공장 화재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것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형 인명 피해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우리는 횃불은 준비하면서도 기름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인 처녀들을 비난하고, 한심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 또한 다양한 위기 상황을 예측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가를 되묻는다면 바로 우리가 어리석은 처녀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이 한마디는 우리 한국 교회에게도 해당됩니다. 실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면에서 살아 있다는 이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간신히 목숨만 남아 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위기 상황이지만, 이것을 넘어서고 극복하려는 준비는 너무 미약합니다. 변화된 세상에서 요청되는 것은 매우 세밀한 배려와 태도, 재난과 고난을 극복하는 참된 하늘의 지혜와 성숙한 신앙이건만, 다수의 한국교회는 과거에 해 오던 것에 익숙한 나머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잘 바뀌지도 않습니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서 불러도 과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교회가 아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믿음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은 있으나, 실상은 우상숭배만 하고 있다."

교역자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에서 찰스 테일러 교수의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책을 읽으면서 현대사회가 지니는 병증들에 대해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저자는 1990년대의 미국 사회가 미국인들을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삶으로 몰아가기에, 상호존중과 배려에 근거한 공동체적 삶은 자꾸 무너지고, 개개인은 상실감과 몰락의 느낌,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일들이 더욱 많아져만 갔다고 말합니다. 30년 전의 미국 사회 분석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매우 유사합니다. 지금 한국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근본적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어떤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난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날은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또한 살아 있다는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지난 코로나 전염병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그리스도교 전체가 깨달은 점 하나가 크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주일 예배를 중심으로만 형성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지향하는 생활신앙이 아니라, 주일에 한 번 교회 와서 예배하고 머무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다 한 것인 양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코로나로 주일 예배가 쉽지 않게 되자, 한국 교회는 큰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모든 교인이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 모여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베푸셨던 식탁과 기적으로 떠올리면서, 예수 운동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매우 중요한 의례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정기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성찰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강화해 줍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우리의 일상의 신앙과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예배 따로, 삶 따로가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서 명목상 그리스도인, 살아 있다는 이름만 있고 실제로 신앙의 내용은 제대로 담보하지 못하는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도덕성, 살아 있는 윤리적 인간, 살아 있는 참된 신앙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뉴스만 틀면 들려 오는 온갖 죄악 가득한 모습들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참된 삶을 보여 주는 자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현 정부가 하는 온갖 잘못과 추태들을 고발하고, 거부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확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급격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권력의 눈치를 보며 올바름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여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올바른 삶이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이 시대에 그래서 한밤중처럼 어두운 이때에 우리는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이 오실 길을 마련하며 광야의 소리로 존재했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복음을 굳게 지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강한 경고를 받은 사데 교회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원후 170년경 이 교회에서 멜리토 주교가 등장합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고 신학과 윤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하였으며, 구약 정경 목록의 확정에 기여를 하였고, 성경을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읽게 한 위대한 신앙인이 나온 것입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사데 교회는 계시록의 편지를 읽고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과 내일 어린이부 성경학교가 진행되는데, 이것을 준비하는 교사들과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마음이 흐뭇하고 자랑할만 합니다. 작지만 사랑과 헌신으로 똘똘 뭉친 단단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주님은 우리에게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자면 충분한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끝까지 노력하셔서 주님과 함께 흰 옷을 입고,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들이 가치 혼란의 이 시대에 주님을 올바로 섬긴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시인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 그 이름은 이름만 있는 이름이 아니라 실상 살아 있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사데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폐부를 찌르면서 들려 옵니다. 혹시 우리 또한 위선적 믿음을 지닌 것은 아닌지,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봅니다. 언제 어느 때에 갑자기 들이닥칠 일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는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되돌아봅니다. 주님 우리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이 시대를 이끌 참된 신앙의 내용을 준비하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는 살아 있다는 그 이름이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 길을 위해 한밤중에도 외치는 소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장마가 전국적으로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사고 소식도 들리고, 비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장마가 그치고 다시 일상을 회복할 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모두가 서로 돕는 마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게 하시고, 강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고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들의 골수를 꿰뚫는 주님 말씀을 통해 마음 깊은 곳을 바라봅니다. 우리들의 무지와 고집, 편견과 아집, 욕망과 헛된 망상을 바로 잡습니다. 매주 함께 드리는 예배가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예배가 되게 하시고, 이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며 일상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진리를 찾으며, 한밤중에도 목놓아 외치는 예언의 소리가 되십시오. 살아 있는 믿음으로 날마다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 축도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닌 것들을 굳건히 지켜주시고

거친 바다에서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육지에서도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주님의 편지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이끌어주시며

새 생명의 길을 개척하는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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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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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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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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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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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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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