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김원호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음속에 자를 하나 넣고 다녔습니다.
돌을 만나면 돌을 재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재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재었습니다.
물 위에 비치는 구름을 보며
하늘의 높이까지 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지닌 자가
제일 정확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잰 것이 넘거나 처지는 것을 보면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확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가끔 나를 재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무관심한 체하려고 애썼습니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틀림없이 눈금이 잘못된 자일 거라고 내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도
내 자로 나를 잰 적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아직도 녹슨 자를 하나 갖고 있지만
아무것도 재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시인(1940- )은 우리의 자존심의 근간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부인할 것도 없이, 우리는 대개 다른 사람들을 폄하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할 때가 많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이 성과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지위나 재산도 그 전제를 강화한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비판이 습관인 사람도 있다. 이러한 성향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라는 자(尺)가 놓여 있다.
이 시가 읊고 있듯이, 우리 자신이라는 자는 돌을 재고, 나무를 재고, 사람을 잰다. 그렇게 자주 잴 버릇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잴 수 없는 하늘의 높이도 잴 수 있을 것 같이 여긴다. 급기야 우리는 자신의 자가 우주에서 "제일 정확한 자"라고까지 확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비판이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실수'한 것에 대해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다. 고작 다음번에 좀 더 정확한 비판을 하도록 신경 써야겠다는 것이 그 '실수'에 대한 반성의 내용이다. 그러는 한편, 누군가가 우리를 재게 되면, 우리는 "무관심한 체하려고" 애쓴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틀림없이 눈금이 잘못된 자일 거라고 내뱉[는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가 우주의 척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 척도에 대한 관념이 바뀐다고 암시한다. 마지막 연의 첫 행의 접속사, "그러면서"는 시간의 경과, 시행착오, 내면의 성찰 등을 암시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을 자아성찰의 능력을 지닌 존재로 믿고 있는 표시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번도/ 내 자로 나를 잰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스스로 부끄러워[지면서]" 그동안 자신 바깥의 존재를 재느라 바쁘게 활용되었던 자를 쓰지 않게 된다. 자가 녹슨 것을 알게 되어도 "아무것도 재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결심을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전처럼 남을 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대신 자신을 성찰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성찰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우주 안에서 우주를 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 자로 우주를 재었으니 그 우주는 우리만큼 편협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재단한 편협한 우주를 보거나 듣게 되는 사람들도 편협해진다.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 편협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비방했을 때 그 결과는 이와 같이 파괴적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당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7:1-2)라고 말씀하신 의도와 상통한다. 물론, 여기서의 비판은 '비방,' '정죄,' '저주'의 뜻이다. 즉,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저주하는 자, 저주받는 자, 저주를 듣는 자(독자 포함)를 모두 죽이는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셨는데, 그때는 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처럼 비판은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며 내면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분은 그들에게 율법의 정신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단순히 지적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으셨다. 비판자는 자기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실을 일러주셨다. 그러니까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비판의 내용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보아야 한다. "보라 네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4-5).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꺼내려고 시도하기란 드문 일이다.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눈에 들보가 들어있어서 정신적 맹인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비판은 자신의 자가 "제일 정확한 자"임을 입증하려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자기가 익숙한 관념이나 기준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자기성찰을 전제하는 행위여야 한다. 이것을 분별이라 일컫는다. 이것이 자존심을 진실하게 키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