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은 왜 침묵하고 있을까. 과거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 민중교회에 몸 담았던 한 목회자가 상념에 잠겼다. 이 목회자는 한 때 ‘민주화 운동’ ‘평화 통일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며 사회 운동을 주도했던 진보 기독교가 현재에 이르러 대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것에 “민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를 달성하면서 시대를 선도해 나갔던 진보 기독교가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고, 위를 보면서부터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됐고, 결론적으로 교세 약화까지 가져왔다는 분석이었다. 보다 근원적으론 진보 기독교 사회 운동에 ‘신앙’이 중심이 되지 못했던 점도 지적했다.
▲ 16일 이수교회 담임목사실에서 권영종 목사(기장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뼈라도 깎듯이 엄숙하고 냉정한 잣대로 진보 기독교 운동을 돌아봤다 ⓒ김정현 기자 |
15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권영종 목사(이수교회)를 만났다. 교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와 함께 진보 기독교 사회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했다. 그는 인터뷰 중 편한 말만 골라 하지 않았다. 진보 기독교계 인사가 듣기엔 다소 거부감이 생길지도 모르는 불편한 말도 거침 없이 내뱉었다. 자신의 뼈라도 깎듯이 엄숙하고 냉정한 잣대로 진보 기독교 운동을 돌아본 것이다.
상·하층부로 분화돼 나타난 진보 기독교 사회 운동
권 목사는 과거 진보 기독교의 사회 운동을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눠 평가했다. 상층부 운동은 말 그대로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었고, 하층부 운동은 사회 안전망에서 유리된 소위 빈민들과 함께하는 운동이었다. 두갈래로 분화된 진보 기독교 운동의 목표는 ‘인권 개선’으로 같았지만, 그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상층부 운동이 정치 투쟁, 권력 투쟁의 성향을 보였다면 하층부 운동은 목회자들이 바닥에 둥지를 트고, 빈민들과 함께 뒹굴며 삶의 실질적 개선에 힘썼다.
민주화 운동 시절 상층부와 하층부의 교류는 비교적 원활했다. 소통의 매개 역할을 했던 민중교회 덕분이었다. 특히 민중교회를 지탱하는 ‘민중신학’은 신앙이란 이름으로 이들의 결속을 다졌다. 하지만 권영종 목사는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 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운동의 성격은 명망가 중심으로 돌아섰다”며 그 결과 대중운동이 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제가 볼 때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은 교회 운동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운동들은 교회 조직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대중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 운동에 있어 진보 기독교는 일부 명망가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사실 십자가를 메고, 그 역할을 하신 것이죠. 그것도 말하자면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봐요”
‘통일 운동’ 시절 진보 기독교는 스스로의 바닥 운동에 의지했다기 보다 한총련 등 사회 학생운동을 지지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이었다. 진보 기독교 내부의 바닥 운동의 상실. 이는 결국 ‘통일 운동’에 진보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감퇴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일각에선 반공 이데올로기의 벽도 ‘통일 운동’의 장애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이에 대한 권 목사의 의견을 물었다.
“한국전쟁을 경함한 사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밖에 없고, 북에 대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고.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나 운동의 법칙이 변증법적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가정해 본다면 정반 합의 원리에 따랐어야 합니다. 찬성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구심점을 찾아서 극복하는게 역사인데,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통일 운동을 못했다?” 이건 무책임한 말이죠”
▲ ‘통일 운동’에 있어 진보 기독교 운동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원인을 물었다. 권영종 목사는 진보 기독교 운동 지도자들이 찬성측과 반대측 모두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해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김정현 기자 |
찬성측과 반대측.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당시 진보 기독교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의 간디나, 마틴 루터킹 역시 숱한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런 장애물들을 극복해 가지 않았느냐”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같은)역사적 장애물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런 운동권의 리더십의 부재나 비전·가치의 부재가 더 컸다고 본다”고 했다.
진보 기독교 통일운동의 실질적 업적은…“남북 교류의 물꼬 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기독교는 남북 6.15 공동선언의 초안이라고 할 만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88선언)’을 일궈내는 등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며 통일 운동을 주도했다.
진보 기독교 ‘통일 운동’의 실질적 성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권영종 목사는 “남북관계에서 경제적 협력의 규모가 많이 달라졌고, 금강산이 열렸고, 평양이 열렸고, 개성이 열렸고, 개성공단에 이뤄졌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며 “(남북간 경제협력 등)정주영 회장이 시작했지만, 그 이전에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진보 기독교의 통일 운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일 운동’이 다소 위축됐다고 하지만 진보 기독교는 성경적, 민족적, 세계적 과제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 왔다. 그렇다면 현재 진보 기독교는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을까?
“우리 교단과 NCCK는 매년 평양에서 성가제를 하며 남북 기독교인들 간 교류를 해왔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성찬도 같이 하고 서로 밥도 먹는 그런 교류를 해 온거죠. 기장에선 국수 한그릇 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보·보수 기독교 대북지원…북측과 ‘신뢰 쌓기’ 전제 해야
‘국수 한그릇 나누기 운동’은 권 목사의 아이디어로 기장의 대북 지원 활동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옛날 시골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가져다 주는 쌀로 생활했는데 이것을 역으로 북에 굶주린 동포들을 위해 교회에서 쌀 한 됫박씩을 주자는 의미에서 이 운동이 전개됐고, 3년째 계속되고 있다.
▲ 권영종 목사가 기장이 3년째 벌이고 있는 ‘국수 한 그릇 나누기 운동’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권 목사는 기장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교단의 대북 지원 활동을 총괄하고 있다. 권영종 목사 옆에 ‘국수 한 그릇 나누기 운동’에 사용되는 가마솥 저금통이 놓여있다 ⓒ김정현 기자 |
‘쌀 한됫박’ 마련을 돕기 위해 편의상 쌀 가마솥 모양의 저금통도 만들었다. 동전이 남을 때 마다 동포들이 먹을 국수 한 그릇을 생각하며 저금을 하자는 것이다. 이 역시 권 목사의 생각이었다. 기장은 이런 교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정기적으로 북에 밀가루를 보내고 있다. 최근 들어선 진보 기독교 뿐만 아니라 보수 기독교, NGO 단체도 ‘대북 인도적 지원’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며 대북 지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권 목사는 무분별한 물적 지원만으론 통일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전망을 내놨다. 물적 지원은 북측 사람들하고 신뢰를 쌓는다는 전제 조건 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통일운동’이 ‘신앙운동’에서 비롯돼야 한다고도 했다.
“일반 시민운동의 중심은 도덕성입니다. 이 도덕성이 타격을 받으면 시민운동은 자연히 와해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운동은 신앙입니다. 기독교 운동은 일반 시민운동과 비교해 볼 때 똑같은 운동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신앙’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분명히 다릅니다. 이 신앙운동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한국교회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진보, 보수를 떠나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 목사는 기도 없는 지원, 연대 등은 결국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만을 위한 길로 가고 만다고 지적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마음으로 북한 주민들을 섬기고, 국수 한 그릇 나누는 진심으로 신앙의 차원에서 북한에 다가가야 합니다. 각 교회 새벽기도회 제단에서 성도들이 북한 주민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말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때 통일 운동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듯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교회의 신앙적 지원도 필요한 거죠”
미래 진보 기독교 사회 운동 중심에 ‘신앙’ 있어야
권영종 목사는 미래 기독교의 사회 운동에 ‘신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과거 70, 80년대 진보 기독교의 사회 운동엔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기 보단 주변에서 도움을 준 정도로 평가했다. 아울러 ‘신앙’이 진보 기독교 활동의 중심에 있지 않았기에 보수, 진보 기독교 교세의 불균형이 심화됐다고도 분석했다. 진보 기독교의 사회 운동이 철저히 ‘신앙’에 의존했더라면 교세가 지금처럼 약화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보수 기독교는 시대에 편승하면서 굉장히 세가 커졌어요. 그때 특혜를 누린 교회들이 거의 대부분 지금의 대형교회들이 된거죠. 하지만 진보 교회들이 사회 운동을 하다보니 교회 내적인 선교활동을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진정 통일 운동이 신앙 운동에서 비롯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운동의 당사자들은 신앙 운동이라고 하겠죠. 그러나 제가 봤을 땐 운동의 핵심 부분엔 신앙이 쏙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단지 신앙은 주변에서 운동에 도움을 주는 역할. 그 정도에 그쳤던 것입니다. 신앙이 중심에 있지 않았기에 (선교적 측면에서)보수 기독교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진보 기독교가 ‘신앙’을 중심으로 한 사회 운동으로 뻗어 갔더라면 보수 기독교에 비해 사회와의 접촉점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선교적 측면으로도 큰 효과를 거둘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다.
▲ 권영종 목사는 향후 대북 지원 활동으로 북한이 자급자족 할 수 있는 풍력발전소, 공장 등 기초시설을 구축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현 기자 |
교단의 대북 지원 활동을 총괄하고 있는 권영종 목사는 향후 유럽 교회와 함께 북한에 풍력발전소를 세워주고, 국수 공장을 세워주며 나아가 병원과 공장까지 지어 줄 계획을 짜고 있다. 이밖에도 양로원, 고아원 등 북한 주민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사업들을 계획하고 있다. 권영종 목사는 “북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기초시설을 지어주는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며 “한번 지원하고 생색내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들이 먹고, 살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권영종 목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최근에 자신이 꾼 꿈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이런 꿈을 꿨어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조그만 교회들이 띄엄띄엄 있더라고요. 들어가니 삐적 마른 성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로 예배를 인도하고 나니 어느 성도가 또 다른 교회로 절 인도하는 거에요. 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들이 절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권 목사의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 날이 곧 오지 않겠어요?”
1980년대 고려대학교에서 한신대학교 신학과로 편입, 동대학교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권 목사는 1988년 안양에 ‘우리교회’를 개척, 1996년까지 민중교회 목회를 8년간 지속했다. 목회를 하는 이 8년 동안 그에게 주어진 사례비는 없었다. 있다해도 안 받았다. 철저하게 민중의 고통과 하나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중운동을 시작한 그는 노동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가출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실질적 인권 개선에 힘썼고, 자칫 구전으로 전승되다 사라질 것을 염려해 민중교회 역사를 정리, 집필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3년전 기장의 평화 통일위원회(기장 평통위)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는 민중운동을 북한 동포들에게까지 확대해 ‘국수 한 그릇 나누기 운동’ 등 다양한 대북 지원 활동을 전개, 교단 목회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편, 권 목사는 최근까지 기장 평통위 이름으로 낸 성명서에서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에 우려를 표하는 등 교단 차원에선 유일하게 대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