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믿음의 사람과 성전의 기둥(2)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7장 1-8절,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설교문

[지난 설교 간단 요약: 책임지는 인간 아브라함]

2주 전에 오늘과 같은 본문,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릴만한 지를 세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성숙하고 어른다운 신앙의 모습에는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개인적 책임'과 형제자매와 이웃을 두고 지켜야 하는 '도덕적 책임', 공동체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전체를 늘 염두에 두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적 책임'이 포함됩니다.

아브라함은 거룩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모든 굴레 즉 혈연과 지연에 둘러싸여 규정된 모든 것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섭니다. 조카 롯이 잡혔을 때는 자신이 기른 사병을 데리고 가서 롯과 롯의 식솔들을 구하고 롯의 재산을 모두 되찾았으며, 언제나 길 가는 나그네를 즐겨 환대합니다. 또 자기와 크게 관련 없어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개인적 책임, 도덕적 책임, 공동체적 책임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앞선 세대인 아담과 하와, 카인, 노아가 실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아브라함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거나, 책임을 회피하면서 나 몰라라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유체이탈 화법이나, 적반하장의 행동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책임지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실수: 확신의 오류]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는 실수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남들이 꺼리는 일도 과감하게 책임지며 돌파하고, 또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그 사람은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고, 또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면서 계속 성공가도(成功街道)로 가면, 그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차게 되지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질 때가 가장 위험한 상황입니다. 섰다고 생각할 그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서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고 다시는 흩어지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만들 줄 알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발라서 틈이 없고 방수가 잘되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거대 제국의 언어를 배우게 하여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도시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세우는 도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도시가 될 것이고, 우리의 문명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며, 우리가 쌓은 탑은 하늘에 닿아 하나님과 맞먹는 위용을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이곳에서 천수 만수를 누릴 것이라고.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유한성"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이 아무리 높이 쌓았어도 하나님은 그 탑을 보기 위해 내려오십니다. 즉 한창 잘 나가는 사람이 스스로 놓치는 지점, 늘 성공만 하여 자수성가 한 사람이 늘 하는 실수는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하늘에 닿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치 전능한 사람이 된 듯이 행동할 때, 바로 거기로부터 온갖 폭력이 발생합니다. 남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명령하고 강제하면서 억압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그 순간, 바로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은 자기이고, 사실 틀린 것은 자기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너무 쉽게 남을 업신여기게 되지요. 물론 확신에 찬 언어가 때로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고,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게도 합니다. 그러나, 유한성을 모르는 확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잘못된 확신은 무지막지한 고통을 불러옵니다.

[양면을 보는 눈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노자 도덕경 2장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것이 좋다고들 하는데, 바로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다."(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동서양의 거의 모든 지혜 전통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나쁜 것이 꼭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자연에서는 대체로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수학에서 1+1은 명징하게 2가 됩니다. 분명 정답이 있고, 필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이와는 정말 다릅니다. 답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필연보다 우연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어제까지의 정답이 내일은 오답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은 너무나 갑작스레 닥치고, 행운 또한 예기치 않게 옵니다. 그래서 너무나 단정적으로 내리는 확신은 늘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실 참된 믿음은 단호하고 변하지 않는 굳은 확신에서 발견되기보다, 정답 없는 삶을 무던히 참고 견디는 것에서,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다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에서 생성됩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늘 겸손하게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우리가 살아갈 때, 모든 것을 다 잘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고도 그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 잘 몰라도 다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딛는 삶이 바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브라함은 존재론적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겁니다. 즉 자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자신을 구성하던 고향 땅과 아버지의 집을 과감하게 떠난 것도, 바로 하나님을 뿌리에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 가능성은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는 남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라는 나 아닌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를 살리는 수많은 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책임지려 할 때, 바로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존재는 타자로부터, 남으로부터 들려오는 명령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신비이신 하나님께 존재를 거는 사람: 아브라함]

그런데 전적인 타자가 되시는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신비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잡히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범위를 언제나 넘어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초월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름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확실성을 불러옵니다. 왜냐면,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물음이 동시에 생성됩니다.

아브라함은 늘 그런 상황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명령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 말씀에 따라 지금 자신을 지탱해 주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모든 것에서 떠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99세가 되도록 본처인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은 있었으나 오랜 시간 동안 지켜지지 않습니다. 아내가 이제 90세가 가까이 되어가니 사실 이 약속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00세가 되었을 때, 90세인 사라에게서 아들이 하나 태어나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후손을 보게 될 것이라고 무려 7번이나 말씀하셨는데, 100세가 되어서야 겨우 아들 하나 얻었고, 사라는 아들이 장가드는 것도 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장례를 치를 때에 땅 한 평 없어서 헷 족속에게서 땅을 사야 했습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삶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견디는 힘에서 드러납니다. 느닷없이 나타나신 하나님이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또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창세기 22장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창세기 22:1-4)

성경은 담담하게 그리고 매우 무미건조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들려주고 그것을 준비하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묘사합니다.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아브라함의 내면에 대해서 성경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버리라고 말한 하나님은 이제 아들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자기 모순적 명령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후손을 만들려면 이삭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양처럼 잡아서 바치라고 합니다. 논리적 모순이고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칠 장소인 모리아 땅에 가기 위해 사흘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 삼일의 여정 동안 과연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 잠시 생각해 보세요! 100세에 겨우 얻은 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을 통해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라고 언급합니다. 100세 얻은 외아들, 얼마나 소중할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아들입니다. 무던히 참고 견디면서 바라던 바로 그 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잡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걸어갑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내가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그를 로마 법정에 넘길 때, 세상이 그를 죽이라고 부르짖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군중들이 바라바를 원한다고 외칠 때, 하나님은 그 어떤 자리에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로마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하늘마저도 어둑해진 이상한 대낮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목놓아 절규했지만, 하늘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 예수는 마지막 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굽니다. 무덤에 묻혀 있던 그 삼일 동안, 예수님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창세기 22장 1-4절은 매우 짧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평생에 걸쳐 우리를 붙잡아 두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불확실성에 휩싸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혼란과 혼돈, 한 가운데 서게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전 이미 먼저 죽어버린 목숨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눈을 떴으나 세상은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발은 걸어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제 존재가 제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용기를 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창세기 22:9-11a)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이런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무엇을 시험해 보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가 말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확신'과 '증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쥐어지지 않고 그저 바라는 것들, 그래서 쥐어질지 쥐어지지 않을지, 보일지 끝내 보이지 않을지 모를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걸어가는 용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해 냈습니다.

[성전의 기둥이 되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빌라델피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약속을 받습니다. 칭찬은 이것입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10절에 보면 빌라델피아 교인들이 인내하라는 주님의 말을 지켰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 교회는 힘이 적은 교회였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교회 같은 거지요. 우리는 중대형교회에 비해 정말 약한 교회입니다. 번듯한 건물 하나 없고, 세상 관점에서 볼 때, 잘 나가는 사람, 돈 많은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진정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려면 바로 이래야 합니다.

주님만 신뢰하는 교회,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교회를 가리켜 오늘 성경은 면류관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그 면류관을 굳게 붙잡아서 그 누구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시험을 받을 때도 지켜 주시고,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도 우리 손에 맡기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하나님의 새 이름을 우리 몸에 새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오늘날 세상 속에서 주님의 말을 지키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여러분의 신뢰를 두십시오. 세상은 망해도 하나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드셔서, 21세기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십시오. 그 기둥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 사회는, 우리 나라는 점점 좋은 사회,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성전의 기둥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새 이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여러분의 몸에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주소서. 거짓 안전과 거짓 확신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불확실성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용기를 지니게 하소서.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잘 모르면서도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주님만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세상은 우리에게 불안을 강요하고, 두려움과 외로움을 불러일으키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더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새로운 성전을 지켜내는 기둥이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지게 하소서. 책임지며 때로는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삶을 살아가되 교만하지 않으며 늘 겸손히 행하는 태도를 잃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기후재앙으로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코로나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 문제로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 시시때때로 신앙 교육을 받고 우리들의 믿음을 성찰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고요히 집에 머물 때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올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고, 교회에 나와 활동할 때는 서로 한 마음 한 몸이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모든 존재가 주님의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불안 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정답 없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찾아 가십시오.

* 축도

생명의 왕이 여러분에게 쉼을 주시고,

사랑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며,

거룩한 영이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는 모든 길과

여러분이 밟는 모든 땅과

여러분이 보는 모든 곳에

넘치는 사랑과 빛나는 지혜를 가득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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