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누군가 나를 두드렸다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누군가 나를 두드렸다 

                                                                                                                                               고완수

과일전에 수박 한 통 사러 갔다

주인은 좌판에 목만 내밀고 있던

푸른 민머리들 콩콩콩 두드렸다

물음표 몸통 같은 장지로 가볍게

이젠 팔아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정중한 질문 같았다

내 귀엔 들리지 않는 대답을

주인은 들었는가 한 통 담아주며

잘 익은 수박일수록 맑고 향기로운

종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그 향기 경건하게 모시고 오는데

누군가 내 몸을 가볍게 두드렸다

잘 익어가고 있는지, 잘 익었는지,

이젠 세상에 내놔도 될 만한지,

들어보려는 듯한 손기척 같았다

순간 멀쩡하던 내 걸음걸이가

심하게 꼬였다, 그림자마저 휘청거렸다

시인(1967- )은 과일전에 수박을 한 통 사러 갔다. 주인은 가운뎃손가락으로 콩콩콩 두드려보더니 하나를 골라주었다. 손가락의 모양이 물음표처럼 보였다고 표현한 것은 주인이 손가락으로 두드릴 때 마치 수박에게 "이젠 팔아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정중한 질문[을 하는 것] 같았[음]"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가 수박을 고르는 기준은 "잘 익은 수박일수록 맑고 향기로운/ 종소리가 들[림]"이다. 시인이 수박을 받아든 것은 그 판별 기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종소리의 "향기 경건하게 모시고 [온다]"는 것은 집으로 걸어오면서 그 판별 기준을 곰곰이 음미했다는 뜻이다. 음미 중에 그는 자신이 그 종소리가 되는 경험을 한다. "잘 익어가고 있는지, 잘 익었는지" 알아보려는 듯 누군가가 자기를 두드리는 손기척을 느낀 것이다. 순간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수박만큼 "맑고 향기로운/ 종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가는 소리는 맑지도 향기롭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마치 심하게 꼬인 걸음걸이, 혹은, 휘청거리는 그림자와 같았다.

"누군가 내 몸을 가볍게 두드[린]" 손기척은 초월적인 세계가 현실로 침투했음을 알린다. 즉, 깨달음의 순간이다. 자신이 "맑고 향기로운 종소리"를 들려주는지, 자신이 "잘 익어가고 있는지, 잘 익었는지,/ 이젠 세상에 내놔도 될 만한지,/ [자신에게] 들어보려는 듯한" 순간이다. 그 손기척을 각성의 자의식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처럼 자신이 평가당하는 일은 사실상 그동안 자신을 지탱했던 걸음걸이 자체를 흔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에 대해서 행복한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교사로서 남을 평가하는 일에 이력이 난 자신이 평가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시인은 충남 당진의 석문중학교 교사였다.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그는 그들의 성숙을 두드려 평가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은 주관적 경험칙일 뿐 객관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 주관적인 경험칙으로 타자를 평가하는 만용을 부리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두드려 평가당하는 일이 자신에게 닥쳤다. 그 순간 타자를 평가하며 누려왔던 구족함과 너무나 간단하게 평가해왔던 관행 자체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주어졌다. 평가자인 자신은 당연히 맑은 종소리를 낼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지내왔던 것을 뉘우쳤다. 이 성찰은 자신이 "향기"를 품고 있다고 여기며 자신 있게 걸었던 걸음걸이를 흩뜨려 놓았다. 그로써 휘청거린 그림자는 그 확신이 와해되었다는 표시이다.

이처럼 자신도 평가의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기중심적 유형의 인간으로 고정되고 만다. 자신의 판단이 세상살이의 기준이 된다. 그처럼 자기중심적이면 영혼이 유아기(乳兒期)적 자기애(自己愛)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자기연민이나 우월의식 혹은 상처에 대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그의 영혼이 성장을 멈추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드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중에 자신이 휘청거리게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진리도 자신의 의식의 수준으로 축소한다. 그러면 아무도 두드리지 않은 수박이 결국 속으로 곪게 되듯이 그의 삶은 곤고해진다. 이 상태에 대해 방어하고자 그는 겉에서 두드려봐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한 외형적인 물증들을 확보하려고 한다. 돈과 권력, 학식 등 외적으로 두드러지게 소리를 낼 만한 증거들을 자신의 삶의 외피나 담벼락으로 삼는 것이다. 그를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는 바로 그러한 외피의 울림이다. 그래서 그를 두드려본다고 해서 그 속의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관계는 상호성에 기반하므로 자신의 진실을 상대방과 공유하지 않으면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자기중심적 성향은 관계의 상호성을 파괴한다. 그는 자기애의 상징인 나르시스처럼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매몰된다. 그렇게 해서 혈연적,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의 인생조차 곪아버리게 된다.

사울 왕이 그러했다. 그의 참조체계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관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을 선호했기에 아말렉 부족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품질이 좋은 짐승들을 남겨서 그분께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분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다(사무엘상 15:22). 그분께는 물질이 중요하지 않다. 그분은 그가 자기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그 말씀에 반향하는 "향기로운 종소리"를 듣고 싶어 하셨다. 그 종소리가 향기로웠을 때 그분은 잘 익었다고 판정하고 세상에서 그를 높이려 하셨다. 그러나 결국 그는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할 것(사무엘상 15:23, 26, 28)이라는 평가를 받고야 말았다.

우리는 자신을 두들기는 손기척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영혼의 성숙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두들기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우리의 걸음걸이를 온전하게 지키고 그로써 그림자도 안정되도록 인도한다. 우리의 영혼을 성숙하게 하여 선한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오로지 자신의 삶의 참조체계인 채 살게 되면 그는 자신의 벽 속에 갇히게 된다. 그는 과일전에 진열되어 있는 수박처럼 민머리를 드러내놓고 그 껍질 속에 싸여 있다가 폐기되고 말 것이다. 두드려지지 않으면 결국 폐기되는 것이 수박의 운명이듯이 우리도 진리의 두드림에 반응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만의 벽 속이 우주인 양 살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삶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곪게 된다. 그때를 무의식적으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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