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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묵상] 내 사랑은 47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내 사랑은 47

                                                                                                                                       신웅순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

유난히

파도가 많고

유난히

바람이 많은 섬

그래서

가슴에는 평생

등불이

걸려있다

이 시는 시인(1951- )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푸른사상, 2017)에 실은 <내 사랑은> 제하의 연작시 50편 중 47번째 작품이다. 이 시에서 사랑은 자발적 구속의 행위로 시각화되어 있다. 사랑하면 섬이 된다고 했으니까 격리나 구속의 심상을 연상하게 되지만, 닥쳐오는 파도와 바람 속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의 존재 또한 사랑의 속성과 상관한다. "그래서"라는 접속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오히려 등불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는 사랑이 파도와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슴속의 등불이라 믿고 있다. 이로써 사랑은 구속과 등불이라는 모순되는 심상의 역설을 구성한다. "그래서" 사랑은 자발적으로 섬이 되는 행위이다.

우선, 시인은 사랑을 격리의 행위로 본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 정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관계가 밀착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만든다. 그러니까 그 격리는 소외가 아니라 결속된 분리이다. 그 구성원이 여럿일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두 사람만의 분리된 공동체이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가 결속된 관계의 섬은 두 사람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일생" 동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일생" 만큼 구별될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섬은 "유난히/ 파도가 많고/ 유난히/ 바람이 많[다.]" 힘든 일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하는 일에 "유난히" 고통이 많이 따를 자명한 이유는 없다. "유난히"는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므로 사랑에 관한 한, 그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섬이 본토 육지보다 파도와 바람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사랑도 일상으로부터의 특별한 분리이므로 더 많은 이야기가 특별히 만들어진다. 파도와 바람은 두 사람이 함께 겪었고 그 경험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그 섬만의 독특한 역사를 이룬다. 그래서 그 섬은 결코 추상적인 숭고함으로서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살이 맞닿는 삶, 파도와 바람을 함께 맞은 두 사람만의 유난스러운 삶의 실체이다.

파도와 바람이 만든 그들만의 이야기는 가슴에 "등불"을 켠다. 그들만의 공동체는 가슴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슴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야기를 계속 엮어낸다. "그래서" 파도와 바람은 그 등불의 기름이다. 그 등불은 일순간의 열정처럼 작렬하고 산화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바람이 끊어질 때까지, 아니,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까지 빛을 비춘다. 그 빛은 "평생" 파도와 바람 속에서 서로를 비추어준다.

사실상 시인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린 셈이다. 그 정의는 박용재 시인의 시를 연상시킨다. 그는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고 읊었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사랑한 만큼이 삶의 증거라는 말이다. 예기치 않은 파도와 바람 앞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랑을 지켜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그 사람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가슴속의 빛은 파도와 바람에 실린 사랑의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서로를 비추어준다. 파도와 바람이 유난히 몰아칠 때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누가복음 19장에 수록된 삭개오의 이야기도 "등불"을 비춘다. 그는 유난히 "파도와 바람"을 많이 맞았다. 그는 재물과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출세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됐다. 세리로서 혈세를 거두며 치부하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그로 인해 그는 비인격적인 재물과 지위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는 비인격성을 인격성으로 합리화하며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길 만큼 냉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허상의 옷을 입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는 그 옷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죄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는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가 키가 작았던 것은 그의 삶의 범주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가 자신의 키 때문에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인격적 관계의 "섬"으로 건너가고 싶어 한 그의 존재 전체의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에 빛이 비쳤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를 소외로부터 구출해줄 빛이 비쳤다. 그 빛은 이미 파도와 바람의 동력을 한껏 품은 생명 자체였다. 그 빛에게 삭개오는 또 하나의 파도와 바람으로서 섞여들었다. 빛은 모든 색을 섞어서 하얗게 만들지 않는가? 그의 가슴을 어둡게 했던 파도와 바람은 이제 빛의 파도와 바람으로 거듭났다. 그에게도 인격적인 관계의 섬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그 빛을 자신의 가슴속으로 모셔 들였다. 이제 그는 고립이 아니라 자발적 구속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형성했다. 결속적 분리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또 다른 형태의 파도와 바람을 맞았다. 아니, 그가 자발적으로 파도와 바람을 일으켰다. 그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비인격적인 재물의 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재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이후 그 자신이 이야기가 됐다. 그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빛을 비춘 것이다. 그 빛은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누가복음 19:9)고 선언했다.

사랑은 자발적인 생명의 힘이다. 자발적으로 분리를 선택하고, 유난히 많은 파도와 바람으로도 이야기를 자발적으로 만들며, 또한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다. 자발성은 사랑의 원리이자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는 일생 고난도 즐겁게 여긴다. 그 고난은 더 이상 소모적인 폭력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재미를 느끼게 하듯이, 파도와 바람을 이겨낸 이야기는 생명의 빛을 비춘다. "평생"을 묵힌 그 이야기가 쓰레기 같은 현실에도 장미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것이 유난히 파도와 바람이 거센 곳에 등불이 빛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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