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고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서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시인(1948- )은 수확을 대하는 할머니와 젊은 화자의 자세를 대비하고 있다. 그 대비의 내용은 물리적인 나이의 차이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각각은 세상에 대한 성숙한 식견과 그러하지 못한 태도를 대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참깨를 터는 기술의 차이를 넘어 인생이라는 공정의 결산, 혹은 인생 자체를 이해하는 자세의 성숙도를 반영한다. 마침 화자는 젊기 때문에 그 차이는 비판의 빌미라기보다 성장의 동기가 된다.
첫 구절의 "산그늘 내린," "할머니," "참깨를 턴다"는 모두 황혼, 노년, 종결을 암시하는 시어들로서 시의 배경에 숙성의 분위기를 설치한다. 그리고 참깨를 터는 행위의 정서도 암시한다.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참깨를 털고 있다. 그가 보기에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신다. 그는 할머니의 육체적 노쇠를 보고 있다. 반면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여전히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할머니보다, 아니 스스로 느끼기에도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그런데 그렇게 참깨를 터는 동안에 그 일이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을 주는 것을 느낀다. 그 느낌이 "희한하[다]." 왜냐하면, 도시 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은 절차와 격식을 따지는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화자에게는 "기가 막히고 신나는 일"이다. 그는 기적 같은 자연의 현상에 신명이 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차와 격식에 숨 막혔던 기억이 돌파되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도시 생활에서는 한 톨을 심어서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연은 그런 힘을 갖고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연의 힘에 매료된 상태이다. 그래서 참깨를 넘어 사람에게서도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한다. "사람도 아무 곳에서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의식하지 못하지만, 수확의 욕망에 빠져들고 있다. 욕망은 사물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분별하지 못하는 사태가 초래되기도 한다. "정신없이 털다가/ ... /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반면에, 할머니는 그러한 욕망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가 보기에 할머니는 "산그늘 내린 밭" 자체이다. 그래서 참깨에도 "슬슬 막대기질"을 하신다.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게]" 참깨를 터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할머니도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 무수한 알맹이들"이 쏟아지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참깨 알맹이들에 "모가지"가 섞이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수확에 욕망을 개입시키지 않음으로써 할머니가 오히려 절차와 격식에 맞추어 더 높은 효율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참깨를 수확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보면, 할머니가 "슬슬 막대기질"을 하시는 이유를 짐작할 것도 같다. 참깨는 8월 말에서 9월 초에 수확하는데, 알맹이가 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확 20일 전에 생장점을 절단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참깨 줄기를 자를 때 알맹이가 유실되지 않도록 이른 아침에 공기 중에 습기가 상대적으로 많을 때 자른다. 물론 줄기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서 자르고, 조심스럽게 단으로 묶어서, 좋은 볕에 잘 말려야 한다. 이런 노력의 과정을 알 리 없는 화자로서는 알맹이를 얻는 현장만이 기적처럼 여겨질 뿐이다. 할머니는 그 전체 과정 동안 사실상 "모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참깨를 터는 시점에 모가지까지 털어내는 화자에게 충고할 법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아이러니를 심어놓았다. 할머니의 초연한 모습이 교훈을 주기는 하지만, 젊은 화자의 욕망이 과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어둠이 싫다. 인생의 어두워져 가는 길목에 있는 할머니와 함께 있으면 결국 "꾸중을 듣기도" 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생명의 욕구가 있다. 그래서 빛이 있는 집으로, "산그늘 내린" 어두운 자연에서 밝은 문명의 공간으로 가고자 한다. 이것이 그가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 이유이다.
할머니가 대변하는 삶의 식견이란 것도 사실은 젊은 시절의 욕망이 순화된 결과로 생긴 것일 수 있다. 젊은 화자의 욕망은 사실 할머니도 경험했던 것이어서 호되게 비판할 일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 빛도 자연의 어두움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욕망에 휘둘리는 화자를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꾸짖음은 욕망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모가지까지 털어"내는 몰입 혹은 탐닉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희한"하거나 "기가 막히고 신나는 일"의 관점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꾸중도 준열하지 않고 "가엾어하는 꾸중"을 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성과를 수확할 순간을 한번은 맞게 되어 있다. 그 순간은 수확 자체의 기쁨을 보장하나 도정에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수확의 의미를 체험하여 이해하고 있다면 수확할 때 할머니처럼 "슬슬 막대기질"을 할 것 같다. 그 느림 속에서 수확의 의미를 되새기고 노동의 가치를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둘러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에게 "가엾어하는 꾸중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수확 혹은, 인생의 성숙은 이처럼 욕망을 순화시키고 식견을 전수하는 관계의 미학을 연출하는 과정이다.
성경에도 수확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돌보는 중에 "임의로" 수확할 수 있는 즐거운 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수확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혔음을 알지 못했다. 한 번에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정신없이 털다가" 그들 자신의 "모가지"가 떨어지게 될 것을 몰랐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엾어하는 꾸중을" 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꾸중"을 책임 추궁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초래한 처참한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죽음을, 즐거운 수확의 상실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소멸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처참한 현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화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준열한 심판 때문에 초래된 상황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에 사로잡혀 두려운 운명을 자초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되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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