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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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1:11-17, 로마서 12:1-2, 마태복음 23:23-24

설교문

성서에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들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말씀 중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해서가 아니라 '순종'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말씀입니다.

희생 제사, 곧 오늘로 말하면 예배 행위는 성서 시대 이스라엘 종교 생활에서도 중심입니다. 모세가 썼다고 알려진 다섯 개의 경전,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 희생 제사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모세오경의 중심 책인 레위기에서 희생 제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이 희생 제사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발견합니다. 예언자들의 선포 중 많은 부분이 이 비판입니다.

가장 초기의 것 중 하나가 예언자 사무엘의 말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상 15:22, 새번역) 예언자 아모스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아모스 5:21-24, 새번역)

뿐만 아닙니다. 시편에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50편 기자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늘 번제를 바쳤다... [그러나] 내가 배고프다고 한들,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8-13절) 시편 51편 기자도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16절)

그리고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인데, 더욱 세밀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 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마당]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이사야 1:11-13, 새번역)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 해서 열심히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 제사들이 지겹고, 역겹고, 견딜 수 없다 하십니다. 당시 희생 제사가 드려진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었는가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합니다. 그에 의하면 성전 안에는 예배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뜰'이 있었는데, 이 뜰(마당)은 20미터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무려 50미터 높이였습니다. 성전의 제단 자체는 엄청나게 큰 한 개의 네모 난 돌이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8미터, 폭과 길이는 각각 25미터나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즘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제사와 모임과 예배에 열심을 냈습니다.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로 제물을 드리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였습니다. 국가 주도로 화려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 제사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제사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행하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이 희생 제사들을 비난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했다는 이유로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언자들의 분노와 책망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요?

예언자들은 희생 제사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온갖] 사람들이 번제물과 희생제물과 곡식 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로 바칠 것이다"(17:26) 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56:6-7)

예언자들은 희생 제사, 곧 예배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의 뼛속 깊이까지 괴롭힌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예언자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이웃을 경멸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나 성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성전에 예물을 가져오는 데는 성실했지만 뇌물 수수, 부정부패, 정의 왜곡, 권력 남용,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착취를 보면서 신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위험한 모순을 보았습니다.

고대 시대에 성전과 제사장, 희생 제사 제도를 가진 민족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든 민족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희생 제사는 유대인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종교에서 희생제물은 신을 달래거나, 신을 회유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즈텍 사람들은 희생제물이 우주를 지탱하는 신들을 먹여 살린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부족은 산 사람의 심장을 바쳐 진노한 신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성서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성서에 낯선 것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뇌물을 주거나 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우주의 심판자를 뇌물로 매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서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희생 제사를 이교도적인 것으로 바꾸는 불경한 행위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나의 다른 결점도 눈감아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요식행위로 만들 뿐입니다.

어느 책보다 희생 제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레위기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과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이 끊임없이 나와 있습니다.(레위기 19:18, 33-34) 바로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희생 제사, 곧 예배는 이웃과 이방인에 대한 사랑과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죄는 곧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됩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이웃에게 어떻게 해도 다 눈감아 주실 거라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인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서의 메시지입니다. 예언자 미가가 이렇게 그 요점을 일러줍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이니라"(예레미야 9:24)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22:15-16)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참 단순하고 명확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옳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세기 18:19, 새번역) 옳고 바른 일, 곧 정의를 행하는 것, 그것이 여호와의 길입니다.

작자 미상의 <수업>이라는 글입니다. 학기 중이라 저도 열심히 수업을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늘 좀 더 잘 준비하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 글은 어떤 수업이었을까요?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 곁에 둘러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 고통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 하늘나라에서의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 '그 말씀을 글로 적어 놓으리까?' / 그리고 안드레아가 말했다. / '그 말씀을 잘 새겨 둬야 할까요?' / 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 /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을 쳐볼까요?' / 그리고 빌립보가 말했다. / '우리가 그 뜻을 잘 모를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 그리고 바돌로메가 말했다. /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줘야 할까요?' / 그러자 요한이 말했다. / '다른 제자들한테는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 그러자 마태가 말했다. / '우리는 여기서 언제 떠날 건가요?' /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 '그 말씀이 실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 예수에게 수업 계획서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가 7:6-7)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며 종교적 외식에 찌든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외식(外飾)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이렇게 큰소리로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 23:23) 여기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유대인들이 양념이나 향신료로 쓰던 것이었습니다. 양념과 향신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소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정확하게 하나하나 챙겨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얼마나 철저한 신앙생활입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질타하셨습니다. "너희가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크리신)와 긍휼(엘레오스)과 믿음(피스티)은 버렸도다." 정작 중요한 것은 버려두고 종교적 규례를 지켰다고 호들갑을 떠는 외식을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색이나 명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개인의 도덕적 수련을 강조하는 윤리 체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이자, 우리의 이웃과 항상 함께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며, 고통 받는 형제자매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면서 후자 때문에 전자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또한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랑 중 한쪽을 포기하는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남미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희생 제사에 대해 세세하게 가르치는 레위기에는 매우 특별한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라... [그리고]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라."(레위기 6:1-7) 이것이 바로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 곧 '허물을 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나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새번역)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와 삶은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동료 인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친절과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사랑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예배는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요란스러움,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모임을 한다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하셨습니다. 이웃을 괴롭히면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태워 드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기신다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내 죄가 가려질 거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했다고 자기 의로움에 속아서는 더욱 안 됩니다. 예배는 결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주일이 되어 열심히 교회를 찾으면서도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주일 교회 가는 것 외에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입니다. 주일의 예배는 주중 일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도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삶이 뒤따르는 예배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마가 13:28-31)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반복적인 경건의 행위만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 여기지 마십시오. 야고보는 이런 경건을 헛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야고보서 1:27)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16-17)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했습니다. 여러분은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분들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예배가 한 주일 예배의 시작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건이 되고,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며, 여러분의 행실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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