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 133:1-3, 엡 4:1-16, 눅 19:1-10
창조절 열한째주일
[다시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존경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참으로 반갑습니다. 2014년 4월 27일 설교를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의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10년 6개월 만에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룻밤 꿈처럼 지나간 10여 년의 세월 동안, 저는 신촌교회 설교목사로 1년 2개월, 생명사랑교회 담임목사로 8년 11개월의 목회를 하였습니다. 상계동에 있는 동안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향린 소식들을 종종 접하긴 했습니다만, 제게 맡겨진 주님의 몸 된 작은 상가 교회를 살리느라 향린교회 사정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유래 없는 코로나 19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 온 세상이 크게 흔들렸고, 가뜩이나 추락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위상이 갈수록 악화되는 때에, 향린교회 또한 건물 이전을 비롯한 여러 일들을 겪으시면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에서 오는 큰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주일 11시에 한 자리에 모여 주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평화의 자리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소란한 세상에서도 한 걸음 물러서고, 들락날락 죽 끓듯 변하는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과거의 힘들었던 상처도 잠시 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도 물리치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한 쉼의 시간으로 만드시길 빕니다. 집안 걱정, 아이 걱정, 먹고 사는 문제, 생각만 해도 화가 치솟는 정치 문제는 일단 잠시 접어두고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부터 다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취임식을 마치고 보낸 지난 일주일 사이에도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 대선에서 광인(Crazy man)으로 불리는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고, 명태균 사태에서 보듯 대책 없는 정부의 무능함 속에서 윤 대통령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기후 위기와 걷잡을 수 없는 인공지능의 발전은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를 다중 위험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차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쉬지 않으면 소음과 잡음만이 가득한 새로운 야만 사회가 도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千里之行, 始於足下. <道德經> 64장에서)라는 말처럼 외부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우리가 배우게 된 적절한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너무나 복잡한데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우선 우리가 지닌 이전의 고정관념과 인습, 자기주장에서 한 걸음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땅의 시선이 아니라 저 높은 산 위에서 멀리 보는 시선, 아니 더 높이 하늘에 올라 바라보는 시선도 갖추어야 합니다. 눈앞이 아닌 조망(眺望)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변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 아주 느리게 천천히 변하는 것, 너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관심을 주어야만 보이는 것, 살짝 스쳐 갔지만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속도 들여다보고 남의 마음도 읽어내며,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도 생각해 보고, 내 눈의 들보를 치우고 있는 그대로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자기 발밑을 돌아보며(照顧脚下)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마음먹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삭개오의 삶과 고민]
삭개오! 성서는 그를 세관장이요, 부자라고 소개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부를 움켜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여전하지요. 그래서 둘 모두를 모두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삽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멋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하고, 자기가 지닌 경제력과 높은 지위 앞에서 다른 이들이 굽신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 자리는 매우 적기 때문에 소수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기 질투를 합니다. 아니꼬운 눈으로 보면서, 뒤에서 수군거리고, 성격도 별로라며 트집을 잡곤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오늘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말합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는 부자요, 세관장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 불린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러는 것은 단순히 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의 돈이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다는 사실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입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지만 사실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자진해서 세리가 되다니! 게다가 보통 세리들은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도중에서 착복했기 때문에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는 아마 여리고 전체 세관을 감독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미움을 받았겠지요. 삭개오는 죄인 취급 당했습니다. 삭개오가 정말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어땠는지를 따져보지도 않고 여론몰이를 당한 것입니다. 부자인 그는 좋은 가구를 사고 좋은 음식을 먹고 멋진 곳에 여행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따를 당하고 멸시를 받는 것은 돈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권력도 소용 없습니다. 남들 앞에서야 위세를 부리지만 그는 외로움에 지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었기에, 살았으나 생기 없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먹고 살 만한 돈이 있고, 적당한 사회적 지위도 있지만, 세상의 시기와 질투, 편견과 오해 속에서 중심부에 들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다수 군중 속에도 끼지 못하는 주변부 사람! 하나님은 없다고 확신하면서 세속의 가치에 전념하는 무신론자도 아닌데,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고 확실하게 믿으며 기존의 신앙을 고집하는 근본주의 신앙인도 아닌,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하고, 한쪽으로 비켜나, 늘 의심과 불안을 간직한 채 멀리서 그저 수줍게 바라보는 어정쩡한 사람! 그런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이런 그에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예수는 죄인과 부랑아들과도 어울리며 누구와도 친밀한 정을 나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두근거렸고 그가 자기 마을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창녀도 받아들였다는데, 그가 과연 나도 받아 줄까? 그와 함께 한다면 과연 나의 이 질긴 외로움을 끝장낼 수 있을까?
[삭개오의 도전과 예수의 응답]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그 예수가 여리고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날도 삭개오는 바쁜 일을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예수가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뛰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엔 예수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고, 키가 작은 삭개오는 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키가 작다고, 삭개오의 신체적 특징을 말하는 것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저도 어릴 때 무척 키가 작았는데, 보통 이런 사람은 '땅딸보'나 '땅꼬마'라고 놀림당하기 쉽지요. 몸이 작기에 덩치가 큰 친구들로부터 자잘한 신체적 괴롭힘에 노출됩니다. 자기 신체에 대한 불만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몰입과 집착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어쩌면 삭개오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메꾸려고 악착같이 살았고, 그 결과 부자가 되고 세관장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 사람은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하고 엄격하며 약간은 매정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10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양 문명이 자리를 잡았고, 개개인들은 자기만의 성공 신화를 꿈꾸며 경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경쟁에 내몰리면서도 그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수도 없이 자신에게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남이 쥐고 있던 채찍을 가져와 자기 손에 쥐었기 때문에 마치 자유를 획득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자기 스스로 몰아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 지치고 우울해졌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마저도 남김없이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남들 눈치 보며 눌러 왔던 욕망은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되고, 비교하며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이 자기를 사로잡을 때는 "에라 모르겠다."며 술이나 진탕 먹고 비틀거리기 일쑤입니다. 너무나 빠르게 커져 버린 자본주의는 돈을 빌미로, 사람들의 자존심과 존엄을 망가트리는 일상을 만들었습니다. 돈이 주인인 사회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모멸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자기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늘날 실로 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든 원치 않든 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인들은 삭개오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 추종자의 핵심에 들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군중과 함께 환호하며 외치고라도 싶지만 그럴 용기나 힘도 없습니다. 그저 뽕나무 위 나뭇가지 사이에 자기를 숨기고 엿보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누군가 불러만 준다면 언제든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은 가득합니다. 물론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 상처받고 가슴 아픈 일 생길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한편에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뽕나무 위로 기어오른 이유는 그만큼 소중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 크고, 외로움이 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외로움에 습격당한 현대인들은 지금도 뽕나무 위에서 누군가 자기를 불러 주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가 삭개오에게 눈길을 줍니다. 그리고 그에게로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삭개오씨! 당신은 세관장이라지요. 오늘 내가 당신 집에서 머무르면 좋겠어요. 어서 이리 내려오시지요?"
어느 누구도 먼저 그에게 초청의 편지나 방문한다는 전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늘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숙식을 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밥을 먹고 함께 잔다는 것은 친밀함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듯이, 삭개오와 함께 한 예수도 그놈과 비슷한 놈이라는 평판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삐딱한 눈초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보자마자 단번에 삭개오와 함께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처음으로 자신을 세리가 아닌 진정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예수 선생님! 저는 저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고들 하는데 정말 내가 뺏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지요. 그러나 전 누구의 것을 강탈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유대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을 고립시키고 멸시하고 무시했지만, 사람의 아들은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만약 삭개오가 자신의 부와 권력에 의지해서 예수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찾아갔어도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지 않고 그냥 되돌아왔다면, 여리고에 오신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갔더라면, 그래서 예수와 삭개오가 만나지 못했다면 삭개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먼저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삭개오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되돌아갔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매우 힘들다고 말한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인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옷은 길고 넓은 천을 두르는 방식인데 위로 올라가면 신체가 노출되기 쉽고, 그런 것을 감당하면서도 엉금엉금 나무를 타는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럽기 때문입니다. 세관장의 신분인 사람이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그의 간절한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삭개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삭개오와 우리들, 그리고 구원의 공동체]
어쩌면 오늘 교회에 나온 우리가 바로 삭개오 같은 사람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찾고, 교회에 발걸음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돈과 권력을 차지하라고 끊임없이 광고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기 위하여, 무엇을 듣기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또 생각해 봅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고 내어놓아야 할까요? 삭개오는 자신의 권력과 체면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뒤에는 재산을 절반이나 내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의 다짐과 예수님의 칭찬으로 끝나지만 예수님이 떠나신 이후 삭개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왕따였을까요? 아니면 나누고 섬기는 삶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행복을 누렸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우리는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하고 계시나요? 사람들 대부분은 삭개오의 다짐, 가진 것을 나누겠다는 고백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삭개오의 이 고백은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 많은 성서학자가 말합니다. 그 연구를 받아들인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매우 혁명적인 것이 됩니다. 즉 구원은 "그냥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에 이른 것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해서 구원에 이른 것도 아니고, 소유의 절반을 나눠주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께서 그와 함께 하신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가 유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도록 한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은 "향기로운 이웃"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삭개오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소외되어서 유대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이 땅에는 많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재난에서 어떤 국가적 돌봄도 받지 못하는 이들, 하청에 재하청을 하면서 너무나도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 전태일 동지가 자기 몸을 바친 지 5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불평등한 체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아직도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과학문명은 날로 발달하지만 우리들의 정신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많은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늘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허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지금 어디로 가야할 지, 어느 자리에 서야할 지 모르시겠다면, 지금 이 사회에서는 도무지 희망을 찾기 어려워 하루하루가 힘겹고 지친다면, 뽕나무로 올라가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는 지금 여기에 없고 대신 그를 따르는 우리 자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웃과 더불어 구원을 이루는 사람들이고 교회는 바로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향린교회는 그 이름답게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핵심은 오늘의 삭개오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들의 곤경에 함께 하면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오늘 이 땅에 구원이 이뤄질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공동체로 서려면 우리는 먼저 서로를 더욱더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혼자 끙끙 앓고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교인들은 없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듯이 우리도 용기를 내고, 예수께서 당신의 눈길을 그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향린 공동체에서 약하고 어려운 식구에게 우리의 눈길과 손길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은 세상의 사나운 눈초리와는 달라야 합니다.
[넉넉한 만남]
제가 부목사 시절에 계시던 분들은 저를 10년 만에 만납니다. 새 교우들께서는 저와 처음 만납니다. 우리는 일주일 168시간 중에 한 번, 주일에 그저 두 세 시간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이 정말 넉넉한 만남이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은 넉넉한 만남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까칠해진 피부를 깨끗이 씻어내고 그 위에 질 좋은 향유를 바를 때 얼마나 좋을까요?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그 향기는 얼마나 풍요로울까요? 넉넉한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우리 삶의 까칠한 가시들을 어루만지고 매만져 줍니다. 메마른 마음들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가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는 넉넉한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직분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향린교회는 이미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저마다의 은사를 지니신 열정적 믿음의 소유자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만 여러분들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을 따름입니다. 스페인의 신학자 디에고 데 에스텔라는 자신의 글에서 1159년에 살았던 존 솔즈베리 글을 하나 인용합니다.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있는 난장이들(Nanos gigantum humeris insidentes)과 같기 때문에 거인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있는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이는 우리 시력이 좋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 신체가 뛰어나기 때문도 아니다. 거인의 거대한 몸이 우리를 들어 올려 높은 위치에 싣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톤이 인용하여 유명해진 이 경구처럼 아마도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저,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지난 70년의 향린 선배들이 일구어낸 믿음의 역사라는 거인 위에 올라탄 사람들입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또 다시 우리가 거인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제 또 우리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유산을 이어간다면, 언젠가 우리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를 맛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의 삭개오 방문은 존재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모신 덕에 자신의 응어리진 마음을 드러내 놓을 수 있었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수군거리는 남들의 험담과 모함에도 초연하게 됩니다. 예수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삭개오는 오랜 시간 가장자리에서 견디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눈길을 자기 안에 담아내기 위한 긴 준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안에 바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눈길과 예수의 방문 또한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는 세상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 웬만한 태풍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깊은 바다 같은 신앙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바다는 그 품이 넓습니다. 바다는 어떤 강도 거부하지 않기에 그야말로 바다가 될 수 있었듯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세관장의 집에 편하게 들어가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전국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삭개오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나무에 오르려는 그 영적 갈망을 결코 놓치 마십시오. 주님이 지나가실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문을 두드리실 때 활짝 그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이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라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경계선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 도저히 못 믿겠다는 자들과 너무 확실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들에게 눈길을 주고 그들 곁에 있겠다고 제안하십시오. 잃은 자를 찾아 나서서, 구원이 이르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 날마다 넉넉한 만남의 장들을 열어갑시다. 우리 모두는 그런 마당에서만이 영원한 신비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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