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52:7-9, 데살로니가전서 2:17-20, 마태복음 24:42-44
설교문
살면서 누가 나를 찾아온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청객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온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기치 못한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온다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존경하는 분이라면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렐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이미 행복에 겨울 것입니다. 잠도 설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이사야 52:7-10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52장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먼 옛날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처럼 이제 바빌론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사실은 감탄문입니다.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게 아닙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했습니다. 수많은 산을 넘고 먼 길을 걸어온 발이 어찌 아름답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언자는 그 발이 아름답다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며 먼지와 상처투성이가 되었을지라도 그 발을 통해 전달되는 소식은 너무도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은 첫째로 평화(샬롬, שלום)를 공포합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평화와 번영 그리고 건강을 뜻합니다. 샬롬의 어근(쉰-라메드-멤, ם-ל-שׁ)은 무언가 결핍된 것을 온전히 채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샬롬은 평화와 번영뿐 아니라 온전한 회복과 보상을 뜻합니다.
둘째로 그 소식은 구원(예수아)을 선포합니다. '예수', '예수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모두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은 지금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선포는 한없이 기쁘고 복된 소식이었지만 실현 불가능한 소식일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누구에 의해서 구원될지는 여전히 미궁 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말라크 엘로하이크"(מָלַ֥ךְ אֱלֹהָֽיִךְ),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네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라는 말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이사야 52:9a) "소리를 내어"는 "함성을 터뜨려라"(새번역)는 말입니다. 억눌려서 신음조차 내지 못하던 예루살렘이 기쁨의 함성으로 터져 나가게 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라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이사야 52:9b) 때문입니다.
찬송가 105장이 바로 이것을 노래한 기쁨의 함성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하셔서 / 죄에 메인 백성들을 자유 얻게 하시네 /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 되시니 /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
예언자 이사야의 설렘과 기쁨을 잘 담은 한국의 문학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함석헌 님의 <님이 오신다>일 것입니다. 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예기치 않은 행복과 미처 준비하지 못한 당황스러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님이 오신단다. / 길 닦아 예비하자 / 내 집에 오시는 님을 / 날 보러 오시는 님을, / 그저 어찌 맞느냐? // 높은 것 낮추고 / 우므러진 것 돋우고 / 굽은 길을 곧게 하고 / 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 / 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 곧바로 이사야의 예언이 떠오르게 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이사야 40:3) 하지만 이를 어떡합니까.
"님을 기다린다면서 / 그저 잤고나. / 이것저것을 온 방안 / 허투루 늘어놓아 / 그저 않으실 곳도 없이 했구나. // 어서어서 모셔야 할 님 / 더러운 길에 왜 더듬게 하며, 맑고도 거룩하신 그 몸을 / 헤뜨린 이 속에 어찌 맞을꼬? / 오, 내 맘이 급해." 어찌한단 말입니까. 아주 준비도 없는 황망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서두릅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 / 물을 뿌리자, / 묵고묵고 앉고앉고 / 이 먼지를 다 아찌하노? 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 자리 위엔 무슨 때가 / 이리도 꼈느냐? / 천정의 거미줄은 / 누가 치느냐? / 이리도 더러운 줄을 나도 몰랐지..."청소를 해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왜 그놈의 먼지는 자꾸만 끼고 쌓이기만 하는지. 그런데 더 큰 일이 났습니다. 계속 읽어봅니다.
"아이구 님이 오시네! / 저기 벌써 오시네! / 이를 이를 어찌노, / 어딜 들어오실랄꼬 / 이 얼굴, 이 꼴, 이 손은, 아이!" 큰일났습니다. 청소는커녕 아직 몰골인데 님이 불쑥 나타나신 겁니다. 이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통념이 뒤집어집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 나도 같이 쓸어주마, /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 내가 쓸어 너를 주고, /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내 님이, 나의 집을 찾아오시는 고운 님이 글쎄 타박은커녕 손수 빗자루를 들고 내 방 닦아주며, 내 맘까지 닦아 어루만져 주신다니요. 절로 행복에 겨운 탄성이 울려 나옵니다.
"쓸자 닦자 하던 마음 / 그것조차 맘뿐이고 / 님이 손수 쓰시고 /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 밝히자면서 못 밝힌 방 / 저절로 밝아지고, /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 / 나중엔 맑아졌으니 /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샬롬(평화)과 예수아(구원)로 오시는 하나님을 믿는 작가는 이 거룩한 님을 모실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님은 오셔서 내 방 쓸어 내게 주고 나더러 앉으라 하십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입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밝혀야지 하면서도 못 밝히던 마음의 방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맑혀야지 하면서 못 맑히던 영혼이 맑아집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일방적 관계가 끝나고 자리 바뀜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함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대림절의 은총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천사가 여행 가방을 끌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그 사람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빨리요? 난 아직 할 일이 많은데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하지만 떠날 시간이야.' '그 가방 안엔 무엇이 들어 있나요?' '너의 소유물이지.' '내 소유물이요? 그 많은 옷과 물건들이 어떻게 거기 다 들어갑니까?' '그런 것들은 너의 것이 아니었어. 다 지구에 속한 것이었지.' '그러면 나의 추억들인가요?' '아니야, 그것은 시간에 속한 것이었지.' '그러면 내 재능들인가요?' '아니야, 그것은 환경에 속한 것이었지.' '그러면, 내 육체인 게 틀림없군요.' '아니야, 그것은 흙에 속한 것이지.' '아, 그렇다면 내 영혼입니까?' '아니야, 슬프게도 넌 잊었구나, 너의 영혼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그 사람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두려움에 떨며 그 가방을 열어 보았답니다.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나요?'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넌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내 것은 뭐였죠?'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것은 네 가슴이 뛰었던 순간들, 네가 삶을 최대한으로 산 모든 순간들이지.'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마야 안젤루) 합니다. 사람은 1분에 평균 10~20회를 숨 쉰다고 합니다. 세어보니 하루 약 1만 5천~3만 번입니다. 1년이면 약 5백만~1천만 번입니다. 저는 60년을 넘게 살았으니 약 3억~6억 번 숨을 쉬었습니다. 참 많이도 숨 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단지 조금 숨을 쉬면서 그것을 삶이라 부르는가?"(메리 올리버)
'숨 막히게' 사랑한 순간은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숨 막히게' 몰입한 순간은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은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꼭 거창한 순간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젯밤 차가운 겨울 하늘의 휘영청 보름달은 숨 막힐 듯 아름다웠습니다. 온 세상의 지붕을 하얗게 덮은 지난 첫눈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눈 속을 걸으며 첫눈같이 내리시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제 마음이 설렜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순간들로 채워져 있습니까? 죽은 후 내 여행 가방이 텅 비지 않도록 내 가슴 두근거리는 벅찬 설렘의 순간들도 채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면서 내 마음이 두근거렸던 순간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두근거림에는 두 다른 두근거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는 '설렘'이고 다른 하나는 '떨림'입니다. 두근거린다는 점에서는 이 둘이 동일한 신체적 반응이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차이가 큽니다. 설렘의 순간은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떨림의 순간은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설렘과 떨림을 구분하는 기준은 준비성이었습니다.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설렜고, 그렇지 않았으면 떨렸습니다. 무언가를 발표해야 하는 자리에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설렐 것입니다. 이 발표를 위해 많은 시간 준비하며 지나온 과정에 대한 만족감은 물론이지만, 이제 그 결과를 사람들 앞에서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발표의 자리는 가시방석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지적이나 질책도 걱정이 되어 떨릴 것입니다.
설렘과 떨림을 구분하는 기준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윤리성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일을 할 때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설렘을 느낄 것입니다. 설렘까지는 아니어도 두려워 떨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사소한 거짓말을 했던 경험이 있다면 설렘과 떨림을 구분하는 이 기준을 확실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언행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떳떳하지 못하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렘은 없고 떨림만 있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렘은 나에게 기회가 왔다는 신호이고, 떨림은 내가 위기에 처했다는 신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순간을 살고 있습니까? 떨림의 순간입니까, 설렘의 순간입니까?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애틋한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형제[자매]들아 [내]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데살로니가전서 2:17-18) 자신이 처음 세운 교회의 교인이니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여러 번 가고 싶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울의 그리움 속에 남아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그들을 기억하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9-20)
그가 강림하시는 날, 곧 그가 다시 오시는 날은 이 세상의 모든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나고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철저히 준비하고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무서운 심판 날이 아니라 샬롬(평화)과 예수아(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떨림의 날이 아니라 설렘의 날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며 철저히 깨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나.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42-44)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좋은 계절입니다. '첫눈같이 고운 당신'을 기다리는 설렘의 계절입니다.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처럼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가 강림하실 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는 칭찬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님이 오신단다. / 길 닦아 예비하자 / 내 집에 오시는 님을 / 날 보러 오시는 님을, / 그저 어찌 맞느냐? // 높은 것 낮추고 / 우므러진 것 돋우고 / 굽은 길을 곧게 하고 / 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 / 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 그러므로 "서두르십시오! / 그분이 오고 계십니다! / 음식을 준비하고 포도주를 빚으십시오... / 세상의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 마음 상한 이들에게 따스한 사랑을 베푸십시오... / 성경을 읽고, / 또 자녀들에게 /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치십시오. /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 예수께서 오고 계십니다!"(크리스탈 시길 리스트룬드, <그분이 오고 계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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