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전 12:1-8, 계 21:1-8, 요 19:23-30
성탄절 첫째주일
설교문
[내란 산불과 잔불 제거]
오늘은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는 절기인데,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쿠데타라는 산불로 인해 온 나라가 내란의 소용돌이로 불타고 있습니다. 다행히 큰불은 잡았지만, 잔불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연일 언론을 통해 쿠데타의 전모가 밝혀지고 있고, 거기에 가담한 이들의 행태와 기획이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의(謀議)는 정말로 국가의 모든 기존 질서를 망가트리는 것들입니다. 윤석열은 검찰과 수구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뒤, 경찰도 제 손아귀에 넣었고, 이번에는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전군(全軍)을 망쳐 놓았습니다. 이들이 실행하려고 했던 것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기가 차고, 정말 "미친 작자들"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상식과 합리는 온데간데없고, 주술과 점에 의지해서 우리 사회를 완벽한 과거로 되돌리고, 자기 사욕을 위해 모든 공적 가치를 허무는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사회는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정하는데, 올해는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어 다닌다'는 뜻의 '도량(跳梁)'과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발호(跋扈)'가 합쳐진 단어 '도량발호(跳梁跋扈)'가 총 1,086표 중 450표(41.4%)를 얻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역설적 양면이 있습니다. 이런 내란 세력들의 준동으로 인해 놀랍게도 우리 젊은이들이 저항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공적인 자리에 사적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들을 세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느끼고, 그런 사람들을 분별하는 안목을 지니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체험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전 우리 교회에서는 남태령 대첩을 이끈 청년들이 "남태령을 함께 한 우리들의 집담회" 일명 "남태령 뒤풀이"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청년들인지, 지금 우리 세상은 전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이라고 하는 가상 세계와 실재 세계를 넘나들며, 뜻만 좋다면 느슨한 연대라도 시공을 넘나들며 순식간에 모이는 운동의 방식, 일종의 플래시 몹(flash mob) 같은 현상으로 자유자재로 모이고 흩어지며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모습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입니다. 이번 위기를 잘 넘긴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놀라운 도약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번 기회에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사회 전반을 어지럽히고 입법·사법까지 침범하여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윤석열과 검찰 세력들 이하 그 밑에 기생하는 모든 세력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해서 그야말로 '사회대개혁'을 이뤄야 할 것입니다.
[송년주일과 성도 추모 주일]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복합적이면서도 다중의 위기로 가득한 이 어수선한 세상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한 해가 또 저물어 갑니다. 오늘을 보내고 나면 올해도 이틀밖에 남지 않습니다. 2024년 한해,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셨는지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이었나요? 아니면 먹구름 가득하여 마지못해 살아간 한 해였나요?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셨나요? 아니면 얼른 지나가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들이셨나요? 오늘 주보 목회 마당에 우리교회 올해 10대 뉴스가 실려 있는데, 여러분의 10대 뉴스는 무엇인가요?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단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년 그 하루를 보내면서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단 하루가 아니라 해가 바뀌는 날로 인식하게 되고, 지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감이 교차하며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한 살 더 먹을수록 더 성숙하고 더 익어가는 삶이 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한 것은 없는데 자꾸 나이만 먹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 발짝씩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우리는 지난 일 년의 삶을 되돌아보는데, 마찬가지로 삶의 종착역이 가까울수록 인생 전체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지나 성탄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유럽교회에서는 창조 절기의 끝이자, 교회력으로 송년 주일에 해당하는 11월 마지막 주일을 "영원 주일", "성도 추모주일"로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12월 마지막 주일을 "성도 추모주일"로 지킵니다.
지난 11월 27일에는 박정실 권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고, 또 12월 18일에는 김호식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성도 추모 주일에는 올해 소천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예식을 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는 송년 주일, 그리고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성도 추모주일을 맞아 저는 오늘 죽음을 성찰할 때 더 깊어지는 삶의 뜻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언제 죽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남에게는 일어나지만 내 가족이나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일어난다 해도 아주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로 여기게 됩니다. 또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죽음을 언급하는 것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경시하고 무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예상치 못하게 느닷없이 그리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오늘날처럼 복잡다단한 사회에서는 질병과 사고, 매우 다양한 원인으로 도처에서 목숨을 잃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실로 죽음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고,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팔팔한 젊은이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모레 저녁 송구영신예배 때에 또 만날 것을 예상하지만, 오늘 예배를 마치고 당장 모레에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매우 발달했지만, 또 앞으로도 계속 발달하겠지만 결코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죽음을 잊고 살다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죽음을 잊고 살다가>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 소식에 접하면/ 그를 알지 못해도/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더 깊이 고독하여라'/ '더 깊이 아파하여라'/ '더 깊이 혼자가 되어라'
두렵고도/ 고마운 말 내게 전하며/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라 이르며
가을도 아닌데/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수녀님의 말대로 누군가의 임종 소식은 우리들 가슴에 찬바람이 불게 만듭니다. 그 누군가가 나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찬바람은 오래갑니다. 그런데 실로 찬바람만 부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큰 분노와 슬픔, 한(恨)과 원망이 가슴 속 깊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죽음을 경시하고,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여 죽음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풍토 속에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죽음이 닥칠 때 그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원한을 남기게 됩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평생 인간의 죽음을 연구했고, 시한부 환자 오백여명을 인터뷰하여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퀴블러 로스의 연구로부터 인간적인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이의 다섯 단계]
잘 사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잘 죽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퀴블러 로스의 연구에 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질병, 곧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죽음을 수용하게 됩니다.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부정과 고립입니다. 앞으로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에 다수의 사람은 그것을 부정합니다. "의사가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 거야! 진단을 잘못했겠지.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다른 사람과 헷갈린 거 아냐!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해봐야겠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여러 증상을 가볍게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말은 가능한 회피하며, 자기 병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고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임박해 오면 이제 부정에서 분노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 또는 의사나 간호사, 병원 직원에게도 직접 분노를 표현합니다. 이때는 하나님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욕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환자의 감정이 수시로 변하고, 온갖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으며,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것 같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충분히 화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현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는 타협입니다. 자신을 살려 준다면, 자기에게 시간을 좀 더 준다면 이런이런 일들을 하겠다고 절대자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하나님을 찾고, 천지신명께 두 손 모아 빌면서 살려만 주신다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더 착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죽음의 시간을 뒤로 늦추려는 것입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혹시 새로운 치료 방법이 나올 수도 있고,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말끔히 나을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회복의 가망성은 점점 줄어들고 몸은 더욱 쇠약해지면서 더 악화되는 증상들이 뚜렷이 드러나면, 이제 환자는 다음 단계 즉 우울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분노와 격정도 사라지고 너무나 큰 상실감만이 환자를 덮어버리기 때문에, 환자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말이 없어지고, 홀로 있을 때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낍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남겨진 가족들이 겪을 아픔과 자기 없이 살아갈 자녀들을 걱정하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들었던 병원비는 어떻게 하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함께 있을 때 저지른 잘못을 충분히 얘기할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안타까워하고, 살았을 때 왜 더 잘하지 못했나를 생각하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단계를 겪고 나면 이제 마지막으로 죽음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죽음을 수용한다고 해서 행복한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들을 털어놓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이상 분노할 힘도 사라지고 우울한 것에도 지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환자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나를 생각해 보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홀로 조용히 침묵하며 있을 때가 많지만, 그럴 때에도 함께 침묵하며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고맙게 느껴지고,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힘과 평안을 누립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이런 연구를 하면서 가장 안타깝게 여긴 것은 많은 사람이 죽음의 단계들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편안한 죽음이 맞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분노나 우울 단계에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죽는 사람만이 아니라, 옆에서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 그 사람 또한 분노나 우울의 단계에서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향린 교우들에게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 가운데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또 떠나보내는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을까요?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나 실제로 죽음과 맞닥뜨리기 전에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 중 한 사람이 받는 암 선고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냉혹하게 일깨워 줄 것이다. 따라서 병을 앓는 시간 동안 자신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실제로 죽음과 조우하게 되건 혹은 삶이 연장되건, 그 시간이 축복일 수도 있다." <죽음과 죽어감> 73.
[메멘토 모리 : 죽음을 기억하며 준비하라]
저는 퀴블러 로스 박사의 조언대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 매년 초에 유언장을 새로 씁니다. 이제 곧 맞이하게 될 2025년 1월 1일에도 저는 유언장을 쓸 생각입니다. 평소에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삶을 더욱 알차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오늘 전도서는 말합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숴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오늘 우리는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읽었지만, 이 본문의 어떤 판본은 창조주 대신 '무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젊을 때에 너는 너의 무덤을 기억하여라"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기억하고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만이 죽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생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생물학적 몸의 작용이 멈추고 그저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인간만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죽음의 의미를 캐냅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훨씬 더 알찬 현재를 살아갑니다. "네가 헛되게 보낸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바로 오늘 이 순간을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인생의 첫날입니다. 그 첫날을 매일 설레는 맘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헛된 삶을 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을 강의하는 시간 관리 전문 강사가 큰 항아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돌멩이와 자갈들, 모래, 마지막으로 물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항아리가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하면, 이 돌멩이와 자갈, 모래, 그리고 물을 전부 넣을 수 있을까요?"
그때 청중석에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지요.
"큰 것부터 차근차근 넣으면 됩니다."
"예!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관리와 관련해서 이 예시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말했답니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니 중요한 것부터 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꼭 해야 할 일, 중요한 일부터 하지 않는다면 그 중요한 일은 평생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씨름하며 집착하며 사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매우 사소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까짓 것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내가 붙들고 몸부림쳤는가를 알게 됩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는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부모 자식 관계나, 연인 관계에서나 소유와 집착의 늪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의 유한성, 즉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무한한 욕망의 사슬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10년 만에 당시의 전 세계라고 불릴만한 엄청난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을 때 이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땐 빈손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네."
스무살 나이에 왕이 되어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으니, 나는 이제 심심해서 어떡하나!"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은 찾아왔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한 것입니다. 한 철학자는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는 온 세상도 그에게 부족했으나, 오늘은 두 평의 땅으로도 충분하네. 어제까지는 그가 흙을 밟고 다녔으나, 오늘부터는 흙이 그를 덮고 있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은 아들보다 더 현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아침마다 자기에게 이런 아침 인사를 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대왕이여 평안하셨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어서 모두가 하나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그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 하늘과 이전 땅을 대치하였는데, 이전 바다를 대치하여 새로운 바다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바다는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력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변하거나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여 현재의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쁜 것, 악한 것, 불의한 것,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이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삶 안으로 죽음을 가져와서 평소에 죽음을 매개로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은 삶을 끝내 버리거나 도중에 멈추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중 하나인 나바호족에게는 죽음과 관련하여 이런 말이 전해옵니다. "네가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지.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라!"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세상은 울어도 나는 기쁘게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한편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제목은 <열매줍기>입니다.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거룩한 새 옷을 입으십시오.
사라지는 천지 만물에 기대지 말고, 영원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주님의 얼굴이
언제나 여러분을 향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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