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주일
성경본문
(창 41:25-36, 벧전 3:8-17, 눅 2:36-40)
성탄절 둘째주일
설교문
[새해 인사]
여러분! 새해가 밝았고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새해 첫날과 첫 주간을 잘 보내셨나요? 올 한 해도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매년 어김없이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옵니다. 지난해 12월 31일과 새해 1월 1일은 단 하루 차이이고, 실제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우리는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새해 첫날은 물리적으로는 24시간 단 하루이지만, 앞으로 지낼 365일을 모두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왠지 첫날을 잘 보내야 한 해가 무탈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월은 한 달 내내 여느 달과는 달리 새롭고 신선한 마음마저 듭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지 두 달이 넘었습니다. 이쯤 되면 교회의 이모저모를 파악하고, 새해를 맞아 진행될 목회 계획들이 명료하게 그려져야 하는데, 아직도 전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부서와 위원회, 그리고 각종 회의체의 수가 모두 50개나 되고, 향린 공동체 교회들과 자매교회인 들녘교회를 비롯하여 우리 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독교 단체, 시민사회단체들도 무척 많은데, 그 모두가 각각 어떤 활동을 해 왔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파악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매주 펼쳐지는 목회와 선교 사역들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알아갈 수밖에 없고, 아마도 최소 1년은 지내봐야 어느 정도 가닥을 잡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부임하고 첫 직원예배와 회의를 하면서 "저는 천천히 목회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쓸 수는 없는 법이고,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과제들]
게다가 작년 12월 3일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친위쿠데타가 벌어졌고, 우리 교회가 "윤석열퇴진 비상행동"의 회의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지금까지 계속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란은 윤석열이 체포 구속되고, 탄핵이 인용되고, 이어 범민주진영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민주시민의 이름으로 내란 잔당들마저 일벌백계해야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내란은 진행 중이고 우리는 아직도 혼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지난 3일 공수처의 윤석열 1차 체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버스와 승용차 등 차량 10대로 막고, 경호처 직원과 군인 200여 명이 겹겹이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불법 세력의 저항은 이렇게 극렬합니다. 그런데 정의를 세우는 힘은 오히려 뜨뜻미지근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민주시민이 승리하리라 생각합니다.
내란 세력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작은 위기들을 거듭 맞이하고 있지만,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87 체제를 극복하자는 사회대개혁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란이 진정되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 남겨진 많은 과제들을 차분히 풀어가야 합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근대화에 이르지 못하고, 주술 세력과 비합리적 미신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여 사회의 스트레스와 불안도가 높을 때, 미신과 주술이 득세하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 국민의 30% 정도는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술과 비합리적 광신과 연결된 상태로 극우 유튜버들과 편향된 언론의 왜곡된 보도에 편승하여 확증편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근대화에 적응하여 나름 합리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도 위기와 시련이 닥치면 종종 일탈을 범하기도 합니다만, 합리적 사유가 곧 더 나은 삶의 성숙을 가져왔는가도 성찰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우리는 서구 문명으로부터 가치 중립적이라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학문에 매진했는데, 이런 배움이 우리 사회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고귀한 가치들을 뿌리내리게 했는가를 물어보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학력을 지녀 똑똑하다고 인정받아 권력의 핵심부에 가 있는 사람들이 사적 욕망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지금, 지난 100년의 우리 근대화를 다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학력과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제 이익만을 탐한다면 그 사회는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 『맹자(孟子)』 첫 편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유명한 고사가 나옵니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묻습니다. "어르신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와주셨는데,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사방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나라가 파국에 몰리자, 자리가 위태로워진 혜왕이 후한 예물을 갖춰 맹자를 초빙했고,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여 자기 이익의 손실을 막고 오히려 증진할 수 있을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국가를 사유물로 보는 혜왕의 사적 이익 확장 추구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왕께선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사랑과 정의만 있을 따름입니다. 왕께서 내 나라의 이익을 말하면, 고위 관료는 내 집안의 이익을 말하게 되고, 또 말단 공무원과 일반인들도 내 몸의 이익을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이익만 다투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게 마련입니다. ~~ 만약 정의를 뒤로 하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모든 사람이 윗사람의 것을 빼앗는 일에만 몰두할 것입니다."(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王曰何以利吾國, 大夫曰何以利吾家, 士庶人曰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 ~~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孟子』「梁惠王」上 章句 1.)
아니나 다를까, 요즘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검찰 세력이 점차 힘을 잃어가자, 이제 경제부총리 최상목을 내세워 재무를 담당하는 모피아(Mofia)들이 슬슬 준동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 전쟁은 이렇게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결국 사적 이익을 넘어서서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 얼마나 존재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조직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와 향린의 과제]
사회가 사회대로 과제가 있다면 한국교회 또한 풀어야 할 숙제들로 가득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폭풍 속에서 파손되어 가라앉는 배와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있는데, 전광훈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마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스피커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건전한 민주시민 사회에서 왕따를 당한 지 오래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경쟁에 시달리며 참된 안식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교회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와 개신교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 공통으로 비판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반지성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강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행태, 자기 교인들만 챙기는 이기적 모습, 전도를 핑계로 보이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실천 없는 많은 말들'입니다.
일반 시민 중 일부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윤리적 행위는 물론, 그것을 넘어서는 자기희생적 행동을 통해 거룩함을 보여주길 기대하지만, 세상보다 더 못난 모습에 지금도 날마다 실망합니다. 여러 언론을 통해서 단골 뉴스로 보도되는 목사의 헌금 횡령, 성추행, 비이성적 행동들, 잘못된 권위주의, 비민주적 교회 운영,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영적 세계는 세상과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면서 벌이는 추한 모습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학과 신앙의 괴리이고, 둘째는 신앙과 실천의 괴리입니다. 물론 올바른 신학이 정립되어 있다는 가정하에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향린교회가 그리고 목회자인 제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이 두 문제 즉 신학과 신앙의 괴리와 신앙과 실천의 괴리를 줄이는 데 힘써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올바른 신학의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기복신앙, 내세 중심적 구원론, 성서 문자주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를 바로잡는 일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교양을 쌓은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도덕성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 시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일자무식한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오늘 당대 철학자들과 맞서 토론했던 지성인 바울과 비슷한 논조의 설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의 엄청난 활약, 담대하고 용기 있는 설교, 놀라운 기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훈련을 통해 "실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희망의 미래로]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처음에는 예수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자기 집을 내어 드리는 열정과 헌신이 있었지만, 감정에 치우쳐 섣부르게 나섰다가 낭패를 봅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물 위로 냉큼 뛰어들었다가, 바람에 겁을 먹고 물에 빠지기도 하고, 예수께서 산 위에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모세,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로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 것도 베드로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는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싸움을 걸었다가 도리어 예수님에게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라는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호기롭게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했지만, 결국 일개의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지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내내 늘 흔들렸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첫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고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편지를 눈물로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문맹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글자 하나 모르던 베드로가 이렇게 놀라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변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실수하더라도 앞장서서 도전하고 배우는 것에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8절부터 12절까지는 같은 교인끼리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부분이고, 13절 이하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때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지금 베드로가 쓰고 있는 이 편지의 내용은 사실 베드로 자신이 먼저 시도한 것이며, 몸으로 훈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게 대하십시오. 같은 믿음의 사람들끼리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아선 안 됩니다. 오히려 복을 빌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베드로의 이 편지를 귀로만 듣지 말고 자신이 몸소 행할 것을 생각하면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교인들 간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생겼거든, 무조건 상대를 위해 기도하고 먼저 복을 빌어 주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상대방을 용서하고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일자무식이었던 베드로가 지금 시편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라!" 지금 베드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합니다.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선한 양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의 편지에서 제게 제일 감동을 주는 구절은 14절부터 16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만을 거룩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한때는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부드럽게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것을 복으로 여기십니까?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습니까?
이제 오늘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조언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희망과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을 키워 갑시다. 예수님의 초청을 통해 일개 어부가 사람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변모했듯이,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밝히는 소금과 빛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실수도 하고, 넘어지거나 쓰러지기도 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거역하고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예언자 안나는 80년이 넘도록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구원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결혼하고 일곱해를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현재 여든네살이니, 거꾸로 환산해 보면, 이 여인은 아마도 기원전 88년에서 78년쯤에 태어났고, 유대인 여성은 12살부터 결혼을 했기에, 기원전 76년에서 66년 사이에 가정을 꾸렸고, 70년에서 60년 사이 어디쯤 과부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로마에 복속된 해가 기원전 63년이니, 어쩌면 남편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 여인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잃고 과부의 몸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며 6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과거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 군사 독재의 폭력적 습관, 잘못 끼워진 수구와 극우 세력의 카르텔로부터 거의 한 세기 동안 구원을 기다리는 민중들, 사회적 약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계획 속에서, 이 땅의 새로운 민주와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향린교회는 역사를 이어 희망의 미래를 만들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사명을 받들어 충성할 일군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2025년 한 해 우리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봅시다. 요셉의 뒤를 이어 흉년을 대비하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사역에 함께 동참합시다. 마지막으로 저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제게 던지는 질문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하늘뜻펴기를 마칠까 합니다. 올 한 해를 사시면서 시시때때로 이 질문들을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런 질문들이 저와 여러분을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밝은가? 나는 맑은가? 나는 넓은가? 나는 깊은가? 나는 지금 기쁜가? 나는 얼마나 굳센가?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 나는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얼마나 평화로우며 조화로운가? 나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나는 좁은 길을 택하는가? 나는 고통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만을 인하여 즐거워하는가? 나는 진정 사람다운가?"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지난 71년의 역사를 이어갑시다.
희망찬 미래를 준비합시다.
우리가 희망이 됩시다.
그리하여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으로 답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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