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왕상 17:8-16, 고전 11:17-26, 막 6:30-44
설교문
[을사년(乙巳年) 설을 맞이하며]
마태복음서에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해져라."(마태 10:16) 뱀은 성서 전통에서 사탄과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예수님께서 뱀을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뱀처럼 처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교회가 이 말씀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보다 훨씬 더 의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교활함 앞에서 너무나 속절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때로 그들의 상상력과 노력이 사랑과 정의,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보다 더 강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교활한 뱀 이상의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담보한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뱀에 물들까 봐 비둘기처럼 순진하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시지요.
올해는 뱀의 해입니다. 을사년이라 더욱더 조심해야 하는 한 해입니다. 120년 전의 을사년인 1905년에는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을 위한 강제 협약, 즉 '늑약'이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은 주권의 상징인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1965년 을사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굴욕적인 한일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청구권 문제에 관해 8억 달러의 돈으로 매듭짓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사죄는 없었고,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 징용자, 독도 문제 등도 누락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용병으로 대한민국이 베트남에 군인을 본격적으로 파병하던 해도 1965년이었습니다. 미국의 전쟁 범죄에 우리가 가담하게 된 것이고, 우리 또한 씻을 수 없는 학살의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을사년을 보냈기 때문에 "을씨년스럽다"라는 말도 생겼고, 그래서 올 한 해 우리는 더욱 조심하면서 새로운 을사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진년에서 을사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의 새해를 맞이합니다. 첫 번째 새해는 대림절입니다. 교회력으로는 대림절이 바로 새해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직원들은 2박 3일의 수련회를 하고, 2025년 목회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번째 새해는 양력 1월 1일이지요. 지난해 12월 3일 너무나 뜬금없는 계엄 발표로 전국이 술렁거렸고, 다행히 큰 불상사 없이 계엄령은 해제되었지만, 연말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한 여객기 사고와 아직도 진행 중인 내란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정말 을씨년스럽게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새해인 설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바쁜 연말연시를 보내고, 정기 공동의회와 향린공동체 목회자 수련회 준비로 정신없는 새해를 보내다가, 설날을 맞이할 즈음에서야 본격적인 새해의 목회 준비가 마무리됩니다. 내란 정국은 범 민주적 진영을 대변하는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롭게 정부를 구성해야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새해를 맞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설날 전날 해 오던 '야광귀 쫓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은 밤에 사람 사는 집에 몰래 들어와 툇돌에 놓인 여러 신들을 신어보고 자기 발에 맞으면 훔쳐가기를 즐겨합니다. 이때 잃어버린 신의 주인은 한 해 동안 운세가 불길하여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섣달그믐날 밤에 사람들은 귀신이 신발을 신어보지 못하도록 신발을 방 안에 감춰 두거나 엎어 놓기도 하며, 체나 키를 마루 벽이나 대문 등에 걸어 두기도 합니다. 체를 걸어 두는 이유는 체의 구멍 세는 것을 좋아하는 야광귀가 체 구멍을 세다가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또 세다가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그냥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체나 키를 새해 전날에 대문에 걸어 둔 것은 사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체나 키에 있는 그 많은 구멍을 눈으로 생각하고, 낯선 새해를 맞이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위험과 위협을 잘 살피고 극복해가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설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또한 체의 눈처럼 여러 눈으로 이 세상을 살피어서 어떤 위험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윤석열이 파면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 2016년 겨울 촛불 혁명의 경험을 발판 삼아, 이제 응원봉 시민들의 혁명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도 그려보아야 하고, 그에 알맞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회 활동과 선교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이들]
오늘의 복음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계속되는 하나님 나라 선교 사역에 심신이 피곤하였고, 이제 지친 몸을 잠시 쉬고자 한적한 곳으로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 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여러 마을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매우 불쌍히 여기십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팠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왜 민중들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 아파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선 갈릴리는 비옥한 토지를 지니고 있었고, 따뜻한 지중해 기후에다 드넓은 호수를 끼고 있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뺏어 가지만 않는다면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1986년 1월 말에 이스라엘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고, 그래서 갈릴리 호수의 물도 많이 말랐는데, 그때 막달라 맞은편 호수 북서쪽의 한 개펄에서 길이 8.2미터, 폭이 2.3미터 되는 배가 발견됩니다. 이 배는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67년까지 사용하던 배였습니다. 어쩌면 이 배에 예수와 제자들이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세베대와 그의 아들 야고보 요한이 가지고 있던 배와 같은 종류의 배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발견된 이 배는 매우 낡아 더 이상 쓸 수 없는 배들을 재활용해 조립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절반은 배를 만드는 목재로서는 부적절한 대추나무였습니다. 이 배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목재는 최소 일곱 가지가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배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농사에 적절한 지중해성 기후와 호수의 풍부한 수자원과 물고기들, 그리고 비옥한 토지로 풍성한 결실을 낼 수 있던 갈릴리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나무 저 나무 쪼가리를 가져다가 이렇게 조잡한 배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다들 아시듯이 당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로마가 세운 괴뢰정부인 헤롯 정권은 로마 제국의 주구로서 이스라엘의 로마화에 앞장섰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은 가이사리아 항구를 건설해 항구, 도로, 교량 등 전방위 사회 기반 시설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여 로마식 도시를 만드는데 헌신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베뢰아를 맡았을 때 갈릴리에도 로마화의 바람이 세차게 밀어닥칩니다. 헤롯 대왕의 후계자로 유대 전체를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헤롯 안티파스는 유대땅의 4분의 1도 못 미치는 땅의 통치자로 임명되자 유대 전체의 왕이 되기 위해 로마에게 온갖 아부를 합니다. 첫 사업으로 세포리스(Sepphoris)를 갈릴리의 수도로 정하고 로마식 도시를 건설합니다. 세포리스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걸어서 한 시간 삼십분 정도면 갈 수 있는(약 6.5km) 곳인데, 헤롯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를 존경한다는 표시로 그 도시를 "아우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세계정복자'입니다.
기원후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호수가에 티베리아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또 건설합니다. 안티파스는 이렇게 로마식 도시인 세포리스에서 세금을 뜯고 또 이제는 티베리아스에서 갈릴리 어부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렸던 것입니다. 원래 갈릴리 사람들은 수입의 약 10% 정도에 해당하는 세금을 예루살렘에 성전세 명목으로 내 왔는데, 로마 정부와 헤롯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2중 3중의 명목으로 세금을 뜯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적게는 소출의 40-50%, 많게는 60-70%를 빼앗겼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열심히 일궈 놓은 농작물을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만드는 잔인한 짐승이 있었는데 바로 여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으며(누가 13:31-33), 헤롯 안티파스 치하에서 갈릴리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생계 도구였던 배 한 척 제대로 만들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 헤롯에게 직격탄을 날렸던 재야 지도자가 세례요한이었고, 지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갈 곳 몰라 방황했던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몸을 숨긴 예수 일행을 쫓아 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 민중들의 상태였으며, 예수는 이들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헤쳐나가는 방법]
예수 일행을 따라 군중들에게 예수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십니다. 내용이 무엇인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고 견디며 삶의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리라 저는 생각해 봅니다. 꽤 시간이 흘렀고, 이제 저녁이 됩니다. 모여든 무리는 많은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욕구의 근원이 되는 생존의 욕구가 당장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36절 이하에서 마가는 두 가지의 해결 방안을 서로 대비시켜 제시합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자"라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여러분은 이 두 해결책 중에서 어느 편에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오늘 이 기적 사건의 의미는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께서 생존할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이야기군에 속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바로 예수 운동에서 느꼈던 민중들의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방금 전 말씀드린 대로 로마를 향한 헤롯 안티파스의 과잉 충성은 갈릴리 호수가 마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피폐함과 사회적 불평등은 사람들을 빚더미에 놓이게 했습니다. 인심 좋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 망쳐놓았고, 하루아침에 종이 되고, 떠돌이가 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화는 갈수록 심해져 갔습니다.
오늘 예수가 보인 기적의 시작은 쉰 명씩 또는 백 명씩 모두가 떼를 지어 한 자리에 둘러앉게 한 것입니다. 부나 사회적 지위, 지식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운 기적의 시작입니다. 로마 사회는 출신과 신분에 따라, 주-종 관계(패트론-클라이언트)로 연결된 사회였습니다. 출세하려면 반드시 인맥의 사다리에 올라타야 했지요. 그 인맥 안에 낄 수 없던 사람들, 그래서 언제나 주변에 머물렀던 이들에게 함께 한 자리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게 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부여됩니다.
모두가 배려받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 구성원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려고 한다면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불의한 사회가 저지른 구조적 죄악으로 해를 입은 이들에게 스스로 해결하라는 제자들의 대안은, 더군다나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유혹하는 그럴듯한 사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없기에 서로 한마음이 되어 모여야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힘을 합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의 한 마디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서 내가 할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스승 예수로부터 많은 권능을 받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나아가서 그 권능을 베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명의 흔적이 드문 오지의 원주민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갔습니다. 우물을 파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도 세워 글과 셈도 가르쳤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이 선교사는 자신이 가르친 것을 아이들이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보기 위해 시험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잠시 뒤에 몇몇 아이들이 일어나더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학생에게로 시험 문제지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학생 주변에 둘러앉아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더니 시험지를 베껴 쓰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선교사는 "그건 나쁜 짓이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번 시험은 무효"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시험지를 베끼던 한 학생이 조용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추장님이 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너희들이 살다 보면 분명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여럿이 모여서 함께 의논해서 풀어가거라."
저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둘러앉아 누구나 먹고 마실 수 있었던 평등의 식사와 초대교회에서 공동으로 나누는 밥상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녁이 됩니다. 제국의 병정들 눈을 피해, 또는 극렬 유대 바리새파 몰래 집이나 동굴, 다락방에 첫 그리스도인들이 모입니다. 남자나 여자, 자유인이나 노예, 부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입니다. 자유인이면서 부자는 시간이 많으니 조금 일찍 옵니다. 저녁에 모이기 때문에 각각 먹을 것을 싸 옵니다. 종들은 일을 마치고 오기에 조금 늦게 오고 가난하기에 빈손입니다. 그러나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이제 음식을 나눕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어 주셨던(요 13:1-20) 주님을 기억하면서, 서로 섬기는 것이 여러분들이 할 일이라는 말씀(막 10:43-45)을 기억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렇게 평등하게 앉아서 나누는 밥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 교인들이 함께 밥을 먹고 나면 바울 사도가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종이라면, 종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그 직분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서로 섬겨야 할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십시오."(고전 7:20-24, 각색)
매주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겼던 주인과 종은 일상의 삶에서 인지부조화를 겪게 됩니다. 종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주인의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 섬기려는 주인은 이제 종을 함부로 부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유인도 생겨났습니다.
어떤 거리낌도 없이 종과 주인이 함께 둘러앉았을 때 벌어진 인간다움의 회복은 이후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놀라운 생각을 인류에게 깨우쳐주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헤아려 5천명이 정말 배불리 먹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자리에 둘러앉아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서로 나눔의 축제를 열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배고픔을 잊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 순간! 아마 이들은 시편 23편 1절을 노래하였겠지요.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워 쉬게 하시네."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이 청소년부 예배 시간에 설교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적은 무엇인가요?" 어느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합니다. "제 동생이랑 싸우지 않는 것이 제겐 기적입니다."
네 글자로 된 낱말을 알아맞히는 초등학교 1학년 문제가 있습니다. "길가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동을 네 글자로 무엇이라 하는가?" 정답은 "가"로 끝납니다. 여러분들은 다 아시겠지요? 고성방가(高聲放歌)가 정답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이가 쓴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빠인가?"
아마도 이 어린이의 아빠는 평범한 한국 사회의 가장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풀려고 동료들과 한잔했을 것이고, 술기운이 오르자, 안에 있던 것들이 튀어나왔겠지요. 노래방에 가서 실컷 흥을 돋우고, 흥에 취해 집에 올 때까지 노래를 불러댔을 것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내고 이제 노년의 삶을 보내는 베이비 붐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면, 386 세대들의 한 몸 바친 헌신과 뜨거운 피로 민주사회를 이뤄냈다면, 자유의 바람을 타고 태어난 신세대 이후 젊은이들이 이제 전 세계를 휩쓸며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K-문화도 만들어 냈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술김에 질러대는 고성방가가 아닌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기적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은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입니다.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 인식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배척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각 가정의 설 명절이 동네잔치로 이어지는 대보름의 축제가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운영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 누군가가 찾아오면 세 가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주무시겠습니까? 드시겠습니까? 씻으시겠습니까?" 예전 우리네 시골 마을은 찾아오는 나그네가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마을을 찾기 쉽지 않은 이때, 우리 향린교회가 위의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대통령이 헛소리하지 않는 나라,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제 몫을 책임 있게 해내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존중받고 배려받으며 살아가는 안전한 시공간이 이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일궈낼 기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종교인의 제대로 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룩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짓 자아를 넘어서 진정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 불교가 말하는 해탈의 경지입니다. 힌두교는 그 경지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을 알려줍니다. 지혜의 길(즈냐냐 혹은 갸나 요가), 헌신의 길(박티 요가). 행위의 길(카르마 요가)입니다. 번득이는 지혜를 닦을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신에게 바칠 수도 있고, 아무 조건 없이 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대신 이 세 가지 길 중 하나라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면 저는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력으로 새해를 맞이하시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선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 어떤 기적을 만들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기적들을 일궈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제1성서의 본문은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어떻게 마르지 않는 기쁨의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각각의 기적 하나 만들기를 바라며 김종길 시인의 시 한편 읽어 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따뜻한 설 되시고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새날 새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또한 기적입니다.
그렇게 기적 같은 하루를 누리고,
또 마르지 않는 기쁨을 만들어가는 한 해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