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설교] "틀 새로 짜기(Refr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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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45:1-8, 딤후 1:1-7, 막 7:24-30)

[모두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되자]

철학자 헤겔은 자신의 책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서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미네르바는 로마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숭배되었고, 올빼미는 밤눈이 밝기 때문에 흔히 미네르바와 함께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헤겔은 이 경구를 사용하여 비판적 사유의 학문인 철학의 역할을 말합니다. 즉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기보다는 벌어진 사건이나 현상을 두고 그 역사적 조건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며, 세상이 어둠에 휩싸여 인간의 몽매함이 가득할 때 비로소 역할을 하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내란 사태나 서부지법 폭동 상황을 일종의 우발적 사건이나 웃음거리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판데믹 이후 선진 사회로의 진입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민주공화국의 헌정 질서를 뿌리로부터 무너뜨리는 일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우리 사회의 도덕과 상식적 감각을 일거에 배반하는 정부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왜 한국의 보수 세력은 수구 기득권으로 전락하고, 급기야 극우 쪽으로 심하게 기울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기에 '전광훈' 현상으로 드러나는 개신교의 민낯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이런 모든 사건이 남긴 과제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만들 세계를 위해 지금 나 자신은 무엇을 준비하면 좋은지, 지금 우리 모두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되어 저마다의 날개를 펴야 합니다.

[아스팔트 극우개신교 문제]

한 명의 개신교 목사로서 같은 목사로 불리는 것조차 모욕적인 '전광훈' 현상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간 우리 교단이나 상식적인 목회자들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심정으로 '아스팔트 극우개신교'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미미하던 이 세력이 돈과 사람을 끌어모으고, 자유한국당 시절 황교안 당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이 전광훈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한 이후 정권과의 유착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더 단단해지더니 급기야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암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력도, 동조하는 자들이 적으면 저절로 소멸하기 마련인데, 지금은 나름의 세를 과시하고 있는 데다가, 이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데에 한국적 보수개신교의 괴이한 논리와 문화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깊은 트라우마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적색 공포, Red Complex), 과도한 친미 성향,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 맹목적 믿음과 권위에 대한 과잉 복종, 가스라이팅(gaslighting), 군중심리에 휩싸인 감정의 동요와 폭발, 푼돈이라도 벌겠다는 마음 등 다양한 관점에서 아스팔트 극우개신교인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이유 중에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한국교회가 수십 년간 추구했던 기복신앙입니다. 강력한 서구 문명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는 조선의 패망,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극심한 가난과 무력감에 허덕이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참된 신앙만 물려 준 것이 아닙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욕망, 즉 돈과 힘에 대한 욕망도 더불어 부추겼고, 한국 개신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정당화 시켜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고도성장을 하던 때와 맞물려, 한국 개신교도 크게 성장했는데, 번영신학과 한국인의 현세적 기복주의가 만나 대형교회(mega church)와 초대형교회(giga church)가 생겨났고, 이들을 통해 인맥이 형성되면서 기득권 카르텔이 구축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기 위해서, 줄을 잘 서기 위해서도 교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또 교회는 꽤 괜찮은 결혼 시장으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개신교는 점점 쇠락하고, 한국의 경제도 외환 위기를 맞아 정체되고 한국 사회와 한국 개신교는 점점 양극화됩니다. 세상은 중산층이 무너지며 소수의 잘 사는 사람과 다수의 서민으로 갈라졌고, 교회 또한 일부 기득권들의 친교 장소로서 잘 나가는 대형교회들과 대형교회를 지향하지만 따라갈 수 없고, 도리어 급격하게 무너지는 다수의 교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는 자본의 힘과 기득권자들의 관계망 덕분에 변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나름 견뎌낼 힘들을 갖게 되지만, 변화하는 세상과 동떨어져 낡은 신앙을 고수하고, 미신적 주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신앙을 교리의 이름으로, 때로 권위에 기대어 목숨을 이어가던 교회들은 갈수록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김진호 목사의 분석에 의하면 아스팔트 위로 나온 극우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대형교회를 모방하다가 실패하여 좌절감에 빠진 목사들과 교인들입니다. 즉 사회적, 종교적 열패감으로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는 이들, 한때 기도원을 전전하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이들이 이제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 아스팔트로 몰려 나와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교회는 죄인들, 상처받은 이들의 집합소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달은 이들이 와서 위로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 닥친 고난과 어려움도 견뎌내면서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곳이 교회인데, 아스팔트 극우개신교는 사회적 소외와 배제 속에서 당한 어려움, 실패와 좌절감을 극도의 분노와 거친 언어, 혐오로 풀어내는 최악의 집단으로 변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저의 고민이 있습니다.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국가가 좋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기존의 종교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기존 교회가 해왔던 종교의 사회적 기능들을 국가와 사회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높은 도덕성,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일반교회들은 물론 사회선교에 열심인 진보적 교회들도 결국은 세상의 거센 풍조에 휘둘리고,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진보적 신앙을 지닌 교회는 상식을 넘어서는 단계, 비상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귀한 가치와 삶의 숭고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진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진검승부를 벌인 자에게서 드러나는 거룩한 삶, 그런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도 안전하고, 진정한 쉼이 있고,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 공동체를 가꾸려면, 우리의 인격이 지적, 도덕적, 신앙적 훈련으로 다듬어지고 성숙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 없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거나, 교리를 답습하면 성경에 남아 있는 과거의 인습이나 낡은 정신이 오히려 세상보다 못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못 읽고, 경직된 교리에 매몰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로운 신앙에 물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세상에서 조롱당하고, 건전한 시민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러셀의 오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붓다나 소크라테스보다 하찮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사람들을 양편으로 가르고 한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사실이나(41절), 돼지 떼를 갈릴리 호수에 몰살시킨 사건(마태 8:28-34), 또 무화과나무의 철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배고픈데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 사건(마가 11:12-14)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는 잔인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철학자도 성서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읽다 보면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지닌 상징이나 문학 기법, 성서 이야기가 형성된 과정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서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마가복음서의 본문 또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예수님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배운 것 없어, 근근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는 더러운 영에 들려 고통당하는 어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여인의 간청을 냉정한 말로 거절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복음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이 말이 정말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이 말은 우리에게 걸림돌인데, 마가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신뢰를 일거에 무너트릴 수 있는 이 말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마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꼼꼼히 살펴볼 생각입니다. 탐정이 다양한 추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 가듯이, 또 상상력을 발휘해 당시 사건의 현장으로 건너가서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정을 들추어 보려고 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생각하며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 깊은 뜻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고, 우리의 신앙 성숙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가복음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지요.

[예수님! 왜 그러셨나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던질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아픈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를 모욕하고, 그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장도 이해해 보라고 몇 가지 복선을 깝니다.

첫째, 예수님이 두로에 간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고 싶어서였습니다. 당시 예수는 계속되는 병자의 치유(6:53-56),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7:1-23)으로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쉬고 싶었는데, 그래서 유대 땅도 아닌 이방 땅까지 갔는데, 웬 이방 여자가 찾아왔으니, 혹시 예수님이 짜증 났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개나 다른 가축보다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식량이 늘 부족한 고대 사회에서 이 말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사람이 알던 속담이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잘 판단하여 선택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 말을 인용하여 여인을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던 속담이지만, 이 상황에서 유대인 남성인 예수가 한 말은 이방인 여성에게 정말 심한 모욕이었고, 사실 이 정도면 여자도 욕을 하고 떠날 테고, 어쩌면 예수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방해받지 않고 쉴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마가복음서의 독자라면 예수의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찾아오는 많은 사람 때문에 한적한 곳으로 피신했던 적이 있는데, 많은 군중이 그곳으로 또 찾아왔었지요.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가르침을 베풀고 물고기와 빵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습니다.(6:30-44). 그때도 피곤했고, 사람들을 피한 것도 동일했는데, 그때는 기적을 베풀고 이번에는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때는 유대 사람들이 몰려왔으니까 그런 것이고 지금은 헬라 여자가 오니까 다르게 반응하신 건가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을 때 회당장이 와서 엎드려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때는 군말하지 않고 가시더니(5:21-23), 이번에 시리아-페니키아 출신 여자가 오니까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기는커녕 개라고 모욕까지 하다니요! 그 여자도 예수, 당신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예수님,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지금은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든지, 다음에 약속을 잡자고 하시긴 어려웠나요? 이쯤 되면 예수님은 더 이상 변명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네 복잡한 삶의 터전에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한계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사건의 배경과 여인의 출신지, 그리고 몇 단어들이 또 다른 암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여인은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의 헬라인 여자였습니다. 시리아-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보-페니키아와 쌍벽을 이루는데, 고대부터 해상왕국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입니다. 두로는 원래 지중해 연안 섬 위의 항구인데, 페니키아 성읍들 가운데 가장 강한 성읍으로 주전 2,700년경에 세워졌습니다. 두로는 그 위치 때문에 난공불락의 '요새'로 통했습니다.(삼하 24:7 참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13년 동안 에워싸고도 정복하지는 못했고(겔 29:18-20 참조). 알렉산더 대왕은 육지에서 섬까지 배에다가 흙을 잔뜩 싣고 와서 길이 800미터, 폭이 60미터에 가까운 제방을 쌓아 본토와 연결한 뒤 일곱 달 만에 두로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두로에서 시리아-페니키아 출신 여성을 만난 것입니다. 이 여성은 두로 본토에 살고, 헬라 문화를 두루 익혀 교양이 풍부한 상류계층의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고"라고 번역된 "침대"는 헬라어로 "클리네(κλινη)"입니다. 마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이불이나 들 것들은 모두 임시용으로 겉옷이나 보자기로도 쓰다가 밤에는 펼쳐 덮고 자는 것이라면, 여기 나오는 클리네는 머리받침대(headrest)가 있는 4각식 침대입니다. 로마의 상류계급 저택 식당에는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호화스러운 이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침대를 때로는 소파용으로, 때로는 음식을 먹거나 독서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아이가 누워 있는 침대는 아마도 고급 제품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여성은 오래도록 강대국으로 있었던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헬라 문화를 익힌 이로서의 우월감, 그리고 뭐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일상을 보내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얕보면서, 다른 민족은 미개한 족속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계층이었습니까? 예수를 소개하는 복음서의 모든 본문은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거나 예수도 목수였을 것이라 말합니다. 목수를 오늘날 고급 옷장을 만드는 대목(大木)이나, 또는 황제의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마도 예수는 일용직 노동자였을 것입니다. 소작농이거나 아니면 아주 적은 땅으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는 나사렛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세포리스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근로를 하던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신도시는 헬라식이었습니다.

요엘서 3장 4-6절에 따르면 두로는 유다인들이나 예루살렘 주민들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로는 바다를 통한 국제 무역에 힘입어 부강한 도시가 되자, 키프로스 및 다시스(오늘의 스페인)와 같은 여러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막강한 부와 군사력으로 유다 백성이나 예루살렘 성민들을 그리스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먹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유대인 남성이라면 예수의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동안 시리아-페니키아의 두로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지요. 유대 민중을 착취해 헬라식 도시를 짓고, 그 문화에 취해 있는 헤롯 정권과 정부 인사들의 행태를 보아 왔던 민중이라면 헬라 여자가 좋게만 보일 리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유대교를 갱신하려는 운동이었으니 이방 여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개인의 자유와 평등, 모든 인류의 권리가 존중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눈에서 보면 예수의 발언이 참기 힘들지만, 1세기 유대인 독자들의 눈에는 예수의 발언 이후가 더 충격입니다.

"콧대 높은 헬라 귀부인이 오늘 예수에게 제대로 한방 당했구만!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네. 평소에 좀 있다고 으스대는 모양, 눈꼴사나웠는데, 자 이제 저 여자가 어떻게 하나 좀 보자!"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이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주님"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사건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와 헬라 여성의 만남은 용한 의원과 환자 어머니 사이의 단순한 만남 이상이 녹아 있습니다. 그저 병만의 문제라면 깔끔하게 고쳐주면 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 이상의 무엇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이 다릅니다. 다른 생각과 다른 느낌을 지닌 사람들, 삶의 굽이굽이마다 겪은 여러 상처들을 간직한 사람들이 만난 것입니다. 유대인 남성 예수는 나자렛 촌에서 일용직 근로자요, 가난한 농부로 자랍니다. 겪으며 몸에 밴 사회적 편견들은 언제든지 스물스물 나오고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툭 튀어나오는 것이지요. 머리를 굴려 나름 스스로 성찰했다고 해도 이미 구부러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속여 자기 자신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각자의 경험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그 다양성이 모여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그래서 새로움도 창출하지만 동시에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 이야기를 단순히 병을 고친 "기적 이야기"로 보지 않고, "논쟁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방법: "내려놓기"와 "역지사지"]

오늘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에 예수가 보인 반응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우리 사이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기 삶과 경험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말들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는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또한 오늘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을, 즉 저주의 말을 복음의 소식으로 바꾼 것은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의 한 마디였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여인뿐입니다. 이 여성은 주님 예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과거 왕국의 영화도, 헬라 귀부인의 체면도, 민족적 우월성도 모두 내려놓습니다. 사랑하는 딸아이의 고통 앞에서 어쩌면 이 엄마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그밖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내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겸손하지만 뼈 있는 이 한마디에 녹아 있는 절규와 흐느낌과 간절함은 예수의 편견을 깹니다.

"돌아가시오. 그 말로 말미암아 당신 딸한테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200주년 신약성서) 이 사건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에 나섭니다. 예수는 두로를 떠나 이방지역인 시돈과 데가볼리로 떠납니다. 그저 쉬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적극적으로 그곳에도 복음을 전하려 갑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듯이 일곱 개의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이방 사람 사천 명을 먹입니다.

이 여성의 옳은 말 덕분에 예수님은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누구나 배불리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도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여인은 예수의 생각을 깨고 틀을 새롭게 짰습니다. 그리하여 마가 교회에는 이방인, 유대인, 열두 제자를 추종하는 그룹, 소외되어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 장애인, 어린아이 모두가 함께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가 공동체는 예수의 저주마저 복음으로 만들 줄 아는 공동체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헬라 여인의 재치와 기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와 생명에 대한 사랑,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인 남성을 포용할 줄 하는 넓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초월과 극기의 신앙과 삶]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가 쉽게 대형교회와 극우개신교인들을 비판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안에도 뿌리 뽑아야 할 잘못된 습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스며든 가부장적 잔재, 기득권에 안주하고픈 마음, 다른 이들을 얕잡아 보는 우월감, 편견과 자기만 옳다는 생각들. 이런 것들을 뿌리 뽑고 넘어서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요셉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로부터 온갖 모함을 당하여 목숨까지 위태로웠다가 이집트 상인에게 팔려 갔던 요셉.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당했던 일들, 감옥에서의 고생 등을 생각하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었지만 요셉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녹여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나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또는 생명을 살리는 일 앞에서 틀을 새로 짜고 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희생자 문화(Victimhood)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나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려고 늘 노력합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극기(克己)라고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하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하는 극기의 시작과 완성은 결국 남으로부터 가능합니다. 진정한 극기(克己), 자기(自己)를 넘어서는 초월(超越)은 바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는 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의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쩌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깨우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 또한 그랬었지. 유대 민족을 하찮게 보았었지. 나도 저런 편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지." 예수는 여인의 현명한 말 한마디를 통해 자신의 선교에 대해 깊이 자각합니다. 원래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처음에는 쓰라리고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결국 넘어설 때, 서로에 대한 상처처럼 보이던 것이 각자가 하는 자기반성을 통해 성숙으로 변할 때, 극기도 가능하고 초월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서로에게 배워 각각이 자기를 초월하고,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성숙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동시에 남의 얘기도 듣고 우리 공동체 안의 다양한 목소리도 귀를 기울여 들어봅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한걸음 더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반종교, 비종교, 무종교인들의 얘기도, 이웃 종교인들의 얘기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도 주의 깊게 듣고 가장 좋은 길을 택해 그 길로 함께 걸어갑시다.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이 보여준 인내와 남에 대한 신뢰를 기억하면서, 또 다른 이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과감하게 고친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가지고 있던 틀을 새롭게 재편해 봅시다. 나를 중심으로 삼아 소소한 일들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큰 뜻을 중심으로 삼아 더 큰 세계로 나아갑시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진짜 신앙을 회복합시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섭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두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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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영성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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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칼뱅은 충분히 진화론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이오갑 강서대 명예교수(조직신학)가 「신학논단」 제117집(2024 가을호)에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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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 의미 밝혀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을 중심으로 집단리더가 구조화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통해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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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교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 부정하는 이유는..."

연새대 김학철 교수(신학과)가 상당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소위 '창조과학'을 따르는 이유로 "(진화론이)자기 신앙의 이념 혹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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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원효의 체상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원효의 체상용의 불교철학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손호현 교수(연세대 신과대학)는 얼마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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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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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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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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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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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