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6:1-5, 히브리서 4:12-13, 누가복음 5:1-11
갈릴리 바다, 혹은 게네사렛(Gennesaret) 호수는 어부들로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곳을 지나시다가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는 걸 보셨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를 찾아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에 매료되어 거기까지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최근에 가버나움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 때문에 사람은 크게 놀랐습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누가 4:36, 공동번역)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시몬의 배에 올라 배를 뭍에서 조금 물려 달라 했던 것 같습니다.
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시몬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누가 5:4, 새번역) 평생 어부로 잔뼈가 굵은 시몬은 방금 청소를 끝낸 그물을 다시 꺼내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척 당황하고 불편했을 겁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누가 5:5, 새번역) 하지만 시몬은 지금 말씀하시는 이가 평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말씀에 이상한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다시 내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놀란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들이 와서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너무 엄청나서 두 배가 물 가운데서 난파할 정도였습니다.
바다에서 벌어진 이 풍요의 기적 앞에 시몬은 그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결코 요행이라고 보기 어려운 기적 앞에서 시몬은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누가 5:8, 새번역, 혹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 - 현대인의 성경)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로또 맞은 것과 같은 기쁨에 '주님, 제발 저를 떠나지 마십시오'라고 간청했을 겁니다. '제가 평생 따라 다니겠습니다'라고 자청했을 겁니다. 그게 당연한 반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달랐습니다. 시몬은 왜 이 기적을 베푼 이에게 자기를 떠나 달라 간청하는 걸까요?
연휴 중에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최근 개봉한 <카라바조의 그림자Caravaggio's Shadow>입니다. 카라바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지요. 르네상스 화풍에서 벗어나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을 캔버스에 옮겨 바로크 미술의 시작이라고도 하는 카라바조, 그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1571-1610)입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당시 교회와 끊임없이 불화했습니다. 교회는 이 천재적인 화가가 무척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카라바조가 매춘부, 집시, 부랑자 등 거리의 사람들을 모델로 <성모의 죽음>, <성마태오와 천사>, <성모자와 성안나> 등 거룩한 종교화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불경하다' 혹은 '신성모독이다'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거리에서 마주친 보통 사람들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찾고자 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얼굴은 시몬 베드로의 얼굴이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순교>를 그릴 때 카라바조는 또다시 적당한 얼굴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땅딸보에, 옆머리만 조금 남은 대머리에,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볼품없는 한 노숙자의 얼굴에서 드디어 베드로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숨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수사하던 교황의 조사관이 베드로의 그림 앞에서 먹고 자며 구걸하던 그 노숙자가 "저 성화의 주인공이 바로 나예요. 그러니까 한 푼 줍쇼"라고 할 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겉모습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시몬 베드로에게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거칠고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시몬 베드로에게는 주님이 눈여겨보신 매우 특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요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정박한 두 배 중에서 시몬의 배를 골라 오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시몬 베드로는 당신의 첫 제자로 삼으신 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상상도 못 한 기적 앞에서 시몬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왜 떠나 달라 했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새번역) 오늘의 복음서(누가 5:1-11)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들은 오늘도 "그물이 찢어질 듯 많은 물고기" 이야기를, 예수를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로 해석하고 맙니다. 물질과 번영의 성공 이야기로 둔갑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그런 기적이야기가 아니라 그 기적 앞에서 일어난 시몬 베드로의 매우 특별한 깨달음과 회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몬은 알아챘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시기도 전에 먼저 알아챘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시몬은 예수님을 '선생님'(master)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두 배가 난파할 것 같은 수많은 물고기가 잡힌 다음에 시몬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인'(sinner)라고 말합니다. '선생님'이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주님' 앞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선생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학생은 없습니다. 제가 교수 생활 20년을 했으나 여태껏 그런 학생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선생 앞에선 모두가 훌륭한 미래를 품은 학생들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둠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원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가 유한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깨우치는 사실은 우리가 거짓이라는 점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시몬이 자신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이사야도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이사야 6:1-5)를 보니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엄청난 것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데, 천사들(스랍들, seraphs)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때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것을 두 눈으로 봅니다. 그때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야. 그런데도... 전능하신 여호와를 나의 두 눈으로 뵈었으니" - 공동번역 & 현대인의 성경)
사람은 신 앞에 서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로 깨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영광과 현존 앞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선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말을 너무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이후 시몬은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얕은 곳에 살아온 '죄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지만 어느 날 밤새도록 수고하였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실패의 경험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삶의 다른 차원을 경험했습니다. 욕망 충족으로서의 세상 성공이 아니라 참 빛과 영원한 생명의 강력한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많은 물고기 앞에서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기적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 내지 자기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이해하고 간구합니다. 하지만 시몬은 아니었습니다. 시몬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을 주목했습니다. 그분은 '선생'이 아니라 '주님'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 언제나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자, / 이따금 내가 만나지만 / 대부분은 잊고 지내는 자, / 내가 말할 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자... / 그 자가 바로 나이다."(후안 라몬 히메네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나는 '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천성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무엇이 교만입니까? 살아도 겨우 백년을 사는 존재가 영원히 사는 존재인 것처럼 사는 게 교만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선 존재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게 교만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꿀벌과 친구와 눈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그림자 노동에 빚지고 사는 존재가 모든 걸 자기 힘으로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입에 감사라는 말은 달지도 않고 사는 게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천성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오직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서, / 영원한 존재 앞에서 유한한 존재로서, / 거룩한 존재 앞에서 죄인으로서 / 무릎을 꿇고 엎드러짐으로 알게 됩니다."(이주연,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정보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나타나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체험될 뿐입니다. 그 나타나 주심이 바로 '주현'(主顯, Epiphany)입니다. 이 주님의 나타나심이 바로 오늘의 '시몬의 배' 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서 떠나 달라'라는 말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유한은 무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영원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상대는 절대를 절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 속에 삽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인간이 아닙니다. 유한은 유한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은 무한하고 삽니다. 하늘은 땅하고 삽니다. 땅은 하늘 없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한은 무한을 찾아야 합니다. 시간은 영원과 이어져야 합니다. 유한은 유한과 살 수가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과 살아야 합니다. 죄인은 죄인과 살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주님과 살아야 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자기 앞에 홀연히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시몬은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경외(敬畏)하다'라는 말은 '옷깃을 여미고 삼가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은혜였습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두 배가 난파할 정도로 많이 잡힌 물고기가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은혜는 내 죄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유한하고 오만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얕은 물가'에서 살아온 심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중의 은혜는 이렇게 부족한 나를, 유한한 존재인 나를, 천성적으로 오만한 나를 주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은혜 외에 또 무슨 다른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8)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브리서 4: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여러분의 고기잡이배에 오르십니다. '시몬의 배'에 오르십니다. 하늘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한이 유한 앞에 오셨습니다. 절대와 상대가 같이 있습니다. 내 어찌 주님에게서 도망하겠습니까. 나는 비록 주님을 감당할 수 없지만, 주님은 내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누가 5:10, 새번역)
기도합시다. "나를 저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사랑이여, / 내 지친 영혼이 당신의 풀밭에 편히 쉬게 하소서... / 아픔을 통하여 나를 찾으시는 기쁨이여, / 당신께는 내 마음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 숙여진 내 머리를 쳐들게 하는 십자가여, / 내 어이 당신에게서 도망하겠습니다. / 이 세상의 영화는 티끌과도 같고, / 바로 거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이 꽃피는 까닭입니다."(조지 마태슨, <나를 저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사랑이여>) 시몬의 배를 찾아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백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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