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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출 20:1-11, 롬 12:1-8, 눅 22:14-23)
설교문
[향린 목회자의 일주일]
제가 예배를 시작할 때 인사를 드리면서, 지난 일주일간 평안하셨는지를 온 교우에게 여쭙습니다. 그냥 입에 붙은 말로 드리는 인사가 아니라, 정말 평안하셨기를 바라면서 드리는 인사입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날씨가 이어지면서 평소보다 독감 환자들이 서너 배 늘어나고, 뉴스를 틀면 내란과 관련하여 믿기 힘든 소식들이 계속 들려옵니다. 미국의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장악하겠다는 등 막말을 하고,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가, 집안에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따듯한 봄날은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아보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인 말입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했던 '소확행'의 시절이 지나가고 그저 평범한 보통의 하루이지만 그 하루를 잘 살아낸 것에 감사하게 되는 시절이 도래한 것입니다. '아보하'라는 말은 '소확행'이 추구했던 행복 강박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하루를 무탈하게 보낸 것만으로 잘했다고 할 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중 위기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평안과 참된 평화는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소극적 상태라기보다, 우리를 위태롭게 하는 불안의 요소들을 없애면서, 온몸으로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적극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생명과 평화의 자녀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향린의 목회자로서 지난 일주일간 어떤 사역들을 했는지 살짝 말씀드리고, 매일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생명 평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하루는 향린 목회 단상을 쓰고, 페이스북과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독서와 묵상을 통해 주님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반복적인 시간을 만들어 제 삶을 일정하게 조율하기 위함입니다.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도록 매일 기도의 전통을 제 삶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오전에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향린 공동체가 주관하는 고(故) 임보라 목사의 2주기 추모예배가 있었고, 제가 '그리스도의 상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저는 곧바로 우리 교단의 사회선교정책 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천으로 내려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2025년 사회선교 실천 지침서가 이틀간의 정책협의회에서 논의한 것들을 간단히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에 속해 있는데, 기장 교단은 매년 초에 교회와 사회 위원회, 평화통일 위원회, 기후정의 위원회, 선교위원회, 양성평등 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이 교단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해 다양한 사역을 기획하고 실천해 나갑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개신교의 부정적 모습을 주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전국에는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특히 우리 교단은 가장 상식적이고 사회선교에 앞장서는 교단입니다. 이번 사회선교 정책협의회에서는 연세대 박명림 교수를 모시고 "탄핵 이후, 한국 정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각 분과별로 나뉘어 여러 주제를 발표하고 논의하면서 교단의 정책뿐만 아니라 각 교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역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가 지금 하는 다양한 사역들을 교단에 알리고, 다른 교회들도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제가 임원으로 있는 심원 안병무 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가 있어서, 그것도 준비했고, 회의록도 정리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겠지만, 안병무 선생님은 우리 교회의 창립자임과 동시에 대표적 한국신학인 민중신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올해는 "민중신학"이라는 개념의 본격적 등장이라고 알려진 안병무 선생님의 1975년 3월 1일의 강연 "민중, 민족, 교회"가 발표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올해 향린공동체 삼일절 연합행사는 이것과 관련해서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미래선교위원회 사역들 중 진보신학팀이 만든 유튜브 캡사이신학 영상도 하나 촬영했고, 제 박사 학위 주제로 지난번에 촬영한 강의 영상의 자막도 수정했습니다. 또 시간을 내서 따로따로 두 분의 교우를 심방 했고, 함께 삶과 신앙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새날 청년회가 군산에서 "평화"를 주제로 겨울 들살이를 하고 있는데, 저도 금요일에 방문해서 토요일에 올라왔습니다. 14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청년들의 활동도 보고 대화도 나누었는데, 참으로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이 서로 삶도 나누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작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 꼬맹이었던 친구들이 벌써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우리 교회를 찾아온 젊은 새교우들과 대화를 나누며 보람도 느끼게 됩니다.
주중에 우리 교회 공간을 사용하는 단체가 많아지면서 저도 종종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어제는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단체의 총회가 향우실에서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과도 함께 연대하면서 우리 향린교회도 교회개혁실천연대 분들과 함께 "한국 교회의 날" 행사를 했었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분들이 향린교회를 칭찬하면서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런 사역들을 제가 교우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교회가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그야말로 열심히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뵙는 교우들 입장에서 과연 목회자들은 주중에 무엇을 하나 궁금하실 듯도 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향린교회가 하는 이 많은 사역은 매우 소중하고, 그것을 해내는 것이 한편으로 대견한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일로 분주하여 산만했던 마르다에게 했던 조언처럼, 어쩌면 우리도 몇 가지만 잘 선택하여 집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을 시도할 때, 해내면 교만하게 되고, 못하면 지치고 나가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대하여]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과 또 나누고 싶은 얘기는 선교 사역만큼이나 중요한 예배입니다. 제가 1년에 한 번은 꼭 예배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선교공동체"라는 존재 목적을 갖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입니다. 세상으로 흩어져 주님의 사역을 재현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선교하는 힘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할 때 길러집니다. 예배 없는 선교는 일종의 자기실현으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을 만듭니다. 동시에 선교 없는 예배는 자기만족에 머물러 실천 없는 무력한 신앙인을 만들 뿐입니다.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예배와 흩어지는 공동체로서의 선교는 서로 순환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갑니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인들은 그동안 예배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고 고민하는 시간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매주 일정한 예배순서에 의해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며, 예배 안에 있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어떤 뜻을 지니는지, 예배가 왜 이러한 순서로 진행되는지, 예배의 목회 기도와 감사기도는 개인 기도와 무엇이 다른지, 찬송가는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배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조차도 예배 신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우리 예배에 민족 문화를 도입하고, 한국적 예배를 기획하고자 하는 우리 향린교회는 전 교우가 예배 신학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매년 한 번은 꼭 예배와 관련된 설교를 할 계획이고, 오늘 저는 예배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특별히 올해는 김지목 목사님께서 "예배"를 주제로 연속 설교를 하면서, 예향과 함께 새로운 한국적 예배 기획을 하는 기회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왜 모였나?]
우선적으로 우리가 왜 일요일에 여기에 모이는 것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여러분에게 왜 교회를 가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교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간다고 할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 만나러 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또 묻습니다. 꼭 교회에서만 예배할 수 있나? 하나님 만나려면 꼭 교회에 가야 하는 건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데 왜 꼭 교회를 가야 하는 거지? 그럼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탄생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많은 부분은 유대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준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으로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부활하셨습니다(막 16:2, 9). 이 부활을 축하하여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안식 후 첫날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여기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행 20:7, 계 1:10). 그때부터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고 불렀고, 부활하신 주님을 축하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겨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켰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일요일에 작은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에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왜 가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 만나러 간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처럼 살면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요? 그건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느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마저 내어준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섬김"으로도, 또 "하나님의 섬김"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 말이 잘 보여주듯이, 그리스도교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사랑에 감동하여 다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에 대한 모든 의식은 강력한 힘으로 등장한 그 신에게 비위를 맞추며 그 신을 달래거나, 신이 지닌 힘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고 한 것인데 비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처음으로 인간을 섬기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먼저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예배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예배를 꼭 교회에 가서 해야 하는 걸까요? 나 혼자 조용히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안 될까요? 교회 전통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함께 모이는 공적인 예배를 '예배 중의 예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 구성원 전체와의 만남이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인다는 수평적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일종의 집단적 체험이기에, 예배는 개인의 사적 공간에서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예수를 기억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장소에 따라 그 모임의 규모는 달랐지만, 이들은 한날한시에 한 장소에 모여서 서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적 예배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시작이고,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는 이 전통을 존중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면 모여서 무엇을 하는 건가요?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 구성 요소는 무엇이어야 하나요?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저마다 기억이 다르고,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다르기에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나누는 시간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 봉독과 설교라는 예배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둘째로 첫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예수와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었던 경험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매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높은 직위의 부자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굶는 일이 다반사였고, 높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밥상에는 누구나 둘러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들 중 부자들은 기꺼이 자기 재산을 내어놓았습니다. 삭개오처럼 말이지요.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고, 그래서 누구나 그 자리에서는 평등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아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 이주민 노동자들, 사회에서 천대받고 종교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도 어떤 부끄러움이나 거리낌 없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형입니다. 오늘날 예배의 성찬식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밥상 나눔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대로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 가운데 반드시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겠다는 다짐과 계획,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함께 나누는 평등의 식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식탁에서 누구도 제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저마다 각자의 형편이 있고, 급한 일이 있어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주일 점심식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스도교 초기 예배는 이렇게 주님 예수의 가르침과 더불어 서로의 물질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만나는가?]
우리가 예배에서 기억해야 할 핵심 중 또 하나는 이런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고 예배해야 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가족도 만나고, 오랜 친구도 보고, 노래도 부를 수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교양도 쌓고, 유력 인사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이 모두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와서 핵심은 놓치고 부수적인 유익을 추구하고 그것만을 챙기려고 하기에 교회가 전혀 교회답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에 좋은 사람들이 모여 정해진 형식을 따라 반복적으로 친교 하는 것은 엄청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합니다.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소시키고, 내집단의 친밀감을 높여 안정적 삶이 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 이런 교회적 분위기를 숭배합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목사가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주된 인물이기에 목사의 권위가 높고, 목사의 말에 과도한 순종과 복종을 하지요. 그런데 결국 이런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이지, 하나님께 예배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이 먹히지 않거나, 자아실현이 방해를 받을 때,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기숭배나 이데올로기 숭배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교 예배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사실 예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예배하는 마음은 편하지 못합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감사가,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내 옆에 형제자매도 사랑하시고, 남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보편적 사랑이 우리에게도 스며들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두 번째 속성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대로 모든 종살이에서 해방을 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모양으로도 가둘 수 없는 자유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정말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유의 하나님입니다.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유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유와 해방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가치이고, 창조적 자유야말로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여러분을 억압하고,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분이 아닙니다. 자유의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얽매여 있고 비본질적인 것에 종살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교회는 예수의 자유 정신을 잊어버리고 온갖 바리새적 율법으로 교인들을 옭아매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안됩니다. 물론 신앙이 성숙할수록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단계에 오지도 않았는데 목사가 말하니까, 남의 눈치가 보여서, 교회에서 하라고 하니까, 직분을 얻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 "내키지 않았는데 해 보니 참 좋더라" 하는 경험도 있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 경험은 참 자유를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은총의 바다 한가운데서 얼마나 멋지게 항해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멋지고 아름다운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맛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 또한 더 이상 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첫 구절은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머리나 발이나 손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몸은 우리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은 우리의 삶 전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의 공적 예배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곧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교인들이나,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교회가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목사가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성경책이 있을까요? 이 질문의 모든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을 가리키던 모든 상징과 수단은 사라집니다. 만약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라면 우리가 주일에만 따로 모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질 때까지 우리는 주일에 이곳에 모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함께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며, 함께 하나님께서 쏟아부어 주시는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 험한 세상, 사탄의 유혹과 시련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빛을 발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 전체를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확실하고 담대한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께 걸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한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돈을 부리는 삶을 살아야지,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는 세월만 낭비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때 혹시나 형제자매 이웃에 대한 미움과 안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까 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마음을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리고, 우리 온 교우들의 바람과 감사를 담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며, 선포되는 설교를 들으며 다시 한번 주님의 뜻을 되새기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 향린 신앙 고백으로 다시 한번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굳게 다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것에 감사하여 우리 또한 작은 예물과 함께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활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동일체가 되어 세상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가시는 곳마다, 여러분이 하시는 활동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여러분의 바람이 곧 성령님의 간구이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곧 하나님 나라요. 여러분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서 영원한 생명의 바람이, 사랑과 자유의 물결이 일어나길 축원드립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삶이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