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설교] "사랑은"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35:1-4, 고린도전서 13:4-7, 누가복음 6:27-28

설교문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고린도전서 13:4-7)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성서의 '사랑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찬가는 수많은 노래의 가사로 쓰였고 특히 결혼예식에서 많이 읽힙니다. 그러나 이 찬가가 보내진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이 찬가는 사랑과는 정반대의 행태를 보이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조용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에 대해 바울이 목회자로서 권면하고 가르친 내용입니다. 바울은 인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2:1에서 바울이 "형제[자매]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한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무언가 이 '신령한 것'과 관련하여 혼란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여러 은사 중에서 방언과 예언과 지식과 같은 '신령한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쭐대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 모든 은사는 '같은 성령'에게서 나왔고, 각각의 은사가 다 나름 고유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은사의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혹은 '영적인 것')이라고 한 것들을 '은사'(12:4)라고 바꾸어 말합니다. 은사(恩賜, gifts)가 무엇입니까? '은혜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을 '신령한 것'이라고 표현한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영적 체험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은사'라고 표현하면서,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12장에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울은 14장에 가서 특히 방언과 예언에 집중하여 더 깊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12장과 14장은 연속성을 가지고 바로 이어지는 내용인데, 그 사이에 '사랑의 찬가' 13장이 끼어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어든 느낌입니다. 바울은 왜 성령의 여러 은사에 대해 말한 다음 곧바로 방언과 예언의 주제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 사랑에 대한 여담(餘談)을 삽입한 걸까요?

바울은 12장의 맨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1) 바울은 이제 예언과 방언과 지식보다 '더욱 큰 은사'를, '가장 좋은 길'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은사이고 사랑이라는 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부재'였습니다. 예언, 방언, 지식 다 있는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은 '사랑의 회복'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책' 곧 성서의 종교인데, 새로운 번역의 성서가 출간된 것입니다. 초교파 연합기관인 대한성서공회는 지난해 12월에 <새한글성경> 완역본을 발간했습니다. 완역본이란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까지 완전히 다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글 성경으로는 <개역한글>, <공동번역>, <새번역>, 그리고 우리 교회가 현재 사용하는 <개역개정> 등 여러 번역이 있는데, 이번에 <새한글성경>이 추가로 발간된 것입니다. 36명의 성서학자와 3명의 국어학자가 2011년 9월에 시작한 이 번역은 약 10년 만인 2021년 11월에 먼저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발행했고, 다시 약 3년 뒤인 작년 12월에 구약을 다 포함한 완역본을 발간한 것입니다. 모두 14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새한글성경>은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젊은이들과 교회학교를 위하여 발간한 성경입니다. 21세기 들어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성경 읽기 양상에 큰 변화가 나타남에 따라, 그들이 성경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우리말 어법에 맞는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것입니다. 기존 번역에 남아 있는 어려운 한자어나 요즘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은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고, 다양한 높임법을 사용했으며, 인명과 지명을 교과서 기준에 맞추었고, 도량형 번역을 현대화하는 등 다음 세대가 읽기에 쉬우면서도 교회 바깥에 있는 독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노력하였습니다. 기존의 번역들과 이 <새한글성경>을 나란히 두고 함께 읽으면 더 깊은 본문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작년 말 이 새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또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케이크도 안 자르고 지나갔지만, 한국교회의 큰 경사였습니다. 그 성경을 받아 들고 제가 가장 먼저 펼친 곳은 오늘 말씀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곧 결혼 예배 주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서와 <새한글성경>을 비교해 읽으면서 저는 번역상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원문의 더 깊고 풍부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엔 어떤 번역의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13장 3절("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에서 <개역개정>이 "불사르게"라고 번역한 것을 <새한글성경>은 "자랑하려고"로 옮긴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가 "자랑하려고 나의 몸마저 내준다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라고 바뀐 것입니다. <새한글성경>에 따르면, 자기 몸을 불사를 만큼 희생적으로 보이는 어떤 행동의 동기가 사실은 자랑하려는 마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헌신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 헌신과 열정의 동기가 '사랑'인지 아니면 '자랑'인지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열심과 헌신, 진정한 사랑의 마음인가요, 아니면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었던 건가요.

13장 4절("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사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에서는 <개역개정>이 "교만하지 않으며"라고 번역한 것을 <새한글성경>은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교만은 마음 상태에 초점을 맞춘 번역이라면, 거들먹거림은 그 교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초점을 둔 번역입니다. 교만은 '잘난 체하며 건방지다'라는 뜻입니다. 거들먹거림은 '잘난 체하며 거만하게 행동하다'라는 뜻입니다. 둘의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거들먹거림은 교만한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거들먹거리는 행동으로 드러나고야 마는 교만을 깊이 질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13장 5절("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에서 <개역개정>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로 옮긴 것을 <새한글성경>은 "나쁜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번역의 차이였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면, 우리가 무언가 주도적으로 나쁜 일을 계획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내가 무언가 나쁜 일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새한글성경>은 그렇게 오해할 가능성을 없애고 사랑은 '나쁜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일은 내가 원치 않아도 내게 닥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13장 7절("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서 <개역개정>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번역한 것을 <새한글성경>은 "모든 경우에 감싸 줍니다. 모든 경우에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참는다'라고 하면 그저 화난 감정을 억누르는 것으로 들리는데, '감싸 준다'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덮어주고 또 변호해 준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사랑은 소극적인 것이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경우에', 곧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까지도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렇게 단지 네 구절만 비교해 읽어보았을 뿐인데, <새한글성경>은 새로운 성찰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나의 현신과 열정의 동기가 사랑인지 자랑인지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내 속의 교만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거들먹거리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하였습니다. 살면서 억울한 일도 당했고 나쁜 일도 내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에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단지 참고 참는 게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경우에 다른 사람의 허물까지 덮어주고 감싸주는 게 사랑이라는 말에서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말한 사랑은 소극적인 자기 위안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자꾸자꾸 내 삶의 원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시인(류시화)의 <원>이라는 시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둘레에 / 보이지 않는 원을 그려 가지고 있다 // 자신만 겨우 들어가는 새둥지 크기의 원을 그린 이도 있고 / 대양을 품을 만큼 혹등고래의 거대한 원을 그린 이도 있고 /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올 동심원을 그린 이도 있다... // 다른 원과 만나 어떤 원은 더 커지고 / 어떤 원은 더 작아진다 // 부서져서 열리는 원이 있고 / 부딪쳐서 더 단단해지는 원이 있다 // 나이와 함께 산처럼 넓어지는 원이 있고 / 오월붓꽃 하나 들여놓을 데 없이 옹색해지는 원이 있다,,. // 원을 그리는 순간 / 그 원은 이미 작은 것 // 저마다 자기 둘레에 / 원 하나씩 그려 가지고 있다 / 생을 마치면 마침내 소멸되는 원을"

우리는 지금 각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서 자신의 주장과 다르거나 자기편을 들지 않는 사람들을 그 동그라미 밖으로 밀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있는 원은 어떤 원입니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 원은 누군가를 밖으로 밀어내는 원입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안으로 초대하는 원입니까?

유대교 신비주의인 하시디즘에는 둥글게 원을 그려 춤을 추는 종교의식이 있습니다. 원무(圓舞, circle dance)입니다. 한 사람이 슬프고 우울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으면 그의 손을 잡아 원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기쁜 에너지를 받아 즐겁게 춤을 추며 슬픔을 잊습니다. 이 원은 안으로 닫힌 원이 아니라 밖으로 열린 원입니다. 우리는 왜 원 밖에 신경을 씁니까? "왜냐하면 지금 저곳에 / 너의 위로의 말이 / 정확히 들어맞는 / 상처를 지닌 / 누군가가 있기 때문"(션 토머스 도허티)입니다. 사랑은 '모든 경우에 감싸 주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더 많이 초대하고 더 많이 끌어들일수록 이 사랑의 원은 넓어집니다.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 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쁜 일을 당합니다. 내가 어찌한 것이 아닌데 내게 나쁜 일이 닥칩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통해서 우리는 원한을 품을 수 있습니다. 미움과 복수심에 치를 떨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쁜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에베소서 4:26-27) 했습니다. 분노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화도 내지 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더라도 그 화가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게 [될]"(현대인의 성경)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그것을 틈타 나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정당한 분노를 이용해 나를 거꾸러뜨리기 때문입니다.

"내 원수는 남이 갚아주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릴 적에는 몰랐습니다. 살면서 이 말은 아마도 원수를 갚으려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일 거라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미움을 동력으로 살지 말라는 뜻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동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서도 말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8) 또 말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25:21-22)

그렇습니다. 성서는 보복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다."(이사야 35:4)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로마서 12:19-20) 왜 우리가 그래야 합니까?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 악과 싸우다 악이 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입니다.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마귀가 그 틈을 타서 나로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동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서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을 <새한글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실 때 "사랑은"이라는 주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한번 자기 이름으로 바꿔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거기에 내 이름을 넣어도 이 숭고한 사랑의 찬가가 어색함 없이 술술 흘러가는지 돌아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3장의 첫 번째 단락에는 1~3절인데, 여기에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이 없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1. 내가 사람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이나 땡땡거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의 능력을 갖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며,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나에게 있는 것을 서서히 다 나누어 주고, 또 자랑하려고 나의 몸마저 내준다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이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4~7절인데, 여기에는 '사랑이 무엇인지 노래하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사랑은" 대신에 "아무개는" 하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4. 사랑은 참습니다. 다정합니다, 사랑은요! 시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5.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화내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모든 경우에 감싸 줍니다. 모든 경우에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경우에 희망을 품습니다. 모든 경우에 견뎌 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락입니다. 여기에는 '으뜸은 사랑이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8~13절입니다. "8.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언들, 그것들은 없어질 것입니다. 신비한 언어들, 그것들도 그칠 것입니다. 지식들, 그것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11.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12.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통해서 흐릿하게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알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13. 그런데 이제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한글성경>의 출간을 기뻐하고 축하해주십시오.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지탄받는 한국교회에서 보기 드문 경사입니다. 이 새 성경책에서 택한 오늘의 본문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삶으로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와 같이 '신령한 것'은 모두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예언과 방언과 지식보다 '더욱 큰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은사입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보다 나은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언들, 그것들은 없어질 것입니다. 신비한 언어들, 그것들도 그칠 것입니다. 지식들, 그것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새한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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