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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설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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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 6:4-9, 레 19:13-18, 눅 10:25-37)

설교문

[일류 신학생]

미국의 신학생들 사이에서 경구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제는 어떤 신학생이 일류 신학생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신학대학에 입학한 신학생이라고 모두가 일류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너도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선포를 듣고 나서 바로 "아멘"하고 응답한 신학생은 삼류 신학생입니다. 같은 설교에 "어떻게 사랑하지?"라며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하며 실천 방안을 물어 오는 신학생은 이류입니다. 그렇다면 일류 신학생은 어떨까요? 일류 신학생은 설교를 듣고 "도대체, 왜 사랑해야 하는가?"하고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신학생입니다.(홍정수 지음, <베짜는 하느님>(개정판 중쇄,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2. 1.) 24. 참조)

사실 "아멘"이라고 답한 학생이 곧바로 나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사랑할지, 왜 사랑할지를 생각도 하지 않고 "아멘"이라고 말로만 외쳤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당시에는 "아멘"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실천해도 주먹구구식이 되거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두번째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생각한 신학생은 그 방법을 찾아 다양한 시도를 하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신학생 또한 "왜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근거 물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과 고난이 오면 중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은 학생은 궁극적인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행동의 근거를 찾게 되고, 뿌리 깊은 확고한 신념 속에서 외부의 어려움이나 환경의 제약에 흔들리지 않고 실천을 지속해 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이런 물음의 과정 속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신앙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진지한 회의 속에서만이 참다운 신앙의 꽃이 피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영생의 길을 묻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며 생각하고 생각해 볼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던진 질문의 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인류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시민들은 일상의 행복을 꿈꿉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불자들은 해탈을 얻길 원하고, 철학자들은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데, 이 모두가 사실은 죽음의 위협 때문에 생기는 우리 삶의 불안을 없애고 영생을 바라는 서로 다른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영생'은 단순히 생물학적 목숨의 영원한 지속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의 대화를 보면, 결국 영생의 길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렇게 산다고 해서 노화를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영생'은 결국 '진정한 삶', '참된 삶'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살맛 나게 사는 것인가?"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며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생물학적 몸을 지닌 육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유하는 정신적 존재이기에,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거나 삶의 의미를 누리지 못하면 살았으나 죽은 삶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진짜 생명력 넘치는 참된 삶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질문자가 율법 교사임을 아셨기에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이 질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인지 알게 됩니다. 우선 질문에 곧바로 답을 하기보다 재질문을 함으로써 더 깊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동시에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고,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까지를 묻기 때문이지요.

율법 교사는 당대 율법의 전문가답게 아주 올바른 질문을 하고 또 대답도 올바로 합니다. 백점만점입니다. 그는 행함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예수님 자신이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이라고 말했던 신명기 법전의 하나님 사랑과 성결 법전의 이웃 사랑이 영생의 길임을 알았습니다. 종교적 인간의 초월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사회적 인간의 윤리적 관계를 올바로 맺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삶이 어렵지요. 오늘날은 여기에 자연까지 포함되어 생태적 삶이 가능해야 하고요. 아무튼 이제 율법 교사는 그가 알고 있는 그대로 행하기만 한다면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영생의 길]

그런데 율법 교사는 자신이 율법에 충실하게 살고 있음을 예수께 드러내며 잘난 체하려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과 같은 종교공동체에 속한 유대 동족만을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은 이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엣세네파는 자기 종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들과 외국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율법 교사가 실제로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물었고, 예수의 답변을 들었다면 그는 정말로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께서 "너의 이웃이 누구다."라고 말해주시면 아마도 율법 교사는 "제가 그 이웃을 이미 사랑해 왔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강도 만난 사람의 운명]

예수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강도들, 강도 만난 어떤 사람,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인, 여관 주인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강도들이 누군지,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강도 만난 사람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강도 만난 사람이 구출되기를 바랍니다. 즉 강도 만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대다수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동족으로 여겼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아프고 얼른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요! 만약에 강도 만난 사람이 원수였다면 "아이고! 참 잘됐네! 그놈 참 고소하다." 했겠지요.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이 원수일 리는 없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강도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제사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반절 이상이 여리고에 살았고, 여리고는 헤브론과 함께 제사장들의 도시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흠씬 매를 맞고 옷도 벗겨진 채 길 한쪽에 내버려집니다. 옷이 벗겨졌기에 신분을 확인할 수 없고, 또 이 사람은 거의 죽게 된 상태였기에 간신히 숨만 내쉴 뿐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제사장이 옵니다. 만약에 강도 만난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면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가장 가까운 동료가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강도 만난 사람이 평범한 유대인이었다면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시는 고위직의 사람이니 자기를 구해주기를 더 바랐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해외여행을 가셨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납치당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영사관이나 대사관에서 나와서 자기를 구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나서서 자기 국민을 보호해 주기를 얼마나 기대하겠습니까? 이것이 강도 만난 사람의 심정이고, 마침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제 살았구나!"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멀찍이서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한 순간, 청중들은 들썩거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평범한 유대인들은 제사장을 비난하며 성토합니다. 그러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을 옹호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시체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율법 조항이 있기 때문입니다(레위 21:11). 그러나 이런 사두개파의 논란에 바리새파는 미쉬나와 탈무드를 언급합니다. 장례를 치러 줄 가까운 친척이 없는 경우나, 이렇게 갑자기 길가에서 곤경을 당한 경우에 제사장은 시체라 하더라도 합당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논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논쟁보다 당장 다급한 이는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는 위기의 순간, 첫 번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레위 사람이 옵니다. 레위는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일합니다. 국가가 돕지 못한다면 담당 공무원이라도 도와야지요.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 가까이에 왔지만, 그 사람 역시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립니다. 누가복음은 제사장이나 레위 모두 "피하여 지나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두 번째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립니다. 자기 동족 중에 누군가라도 와 주기를 바랍니다. 그가 마음 착한 유대인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저는 여기서 갑자기 세월호 참사를 당한 단원고 학생들이 떠오릅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159명이 떠오릅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정부는 완전히 무능했습니다. 세월호 승객을 구조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해경은 세월호 승객보다 선원들을 먼저 구조했습니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들과 용산구청 등 정부가 제대로 대비를 했더라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물속에 있던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을 구한 것은 주위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정부 당국은 배 안에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

강도 만난 이 사람도 유대 당국의 지도자들과 담당 공무원이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을 때, 혹시라도 자기 동족 중 누군가가 와 주기를 바라며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 사람은 아마 딜레마에 빠질 것입니다. 평소에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 이웃은커녕 원수 중의 원수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처럼 여긴 사마리아인이 온다면 오히려 자기의 목숨이 더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숨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에게 와도 걱정이고, 이 사람이 그냥 지나가도 걱정입니다. 그냥 가면 모든 희망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힘도 없고, 또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양가감정에 빠지고, 진퇴양난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도 충격을 받습니다. 선행을 하는 인물은 보통 제사장, 레위, 또는 유대인 동족이어야지 사마리아인이 선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율법 교사 입장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유대 격언에 '사마리아인들과 빵을 먹는 자는 (율법에 금한)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에 충실하여 거룩한 제사 업무를 맡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선행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와는 다릅니다. 우선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 올라온 것입니다. 신분과 인종,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사랑의 연민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도와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부탁을 하고, 돈도 지불하고 비용이 더 들면 더 주겠다고까지 말합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마치시고 율법 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 율법 교사가 한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아야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 교사는 자기를 중심으로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이웃이 되는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곤경 당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누가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를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율법 교사에 대한 심각한 경고이자 심한 비판이 됩니다. "너는 너 자신을 이웃 사랑의 중심에 세우고 이웃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까를 물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을 행하는 주체는 너 같은 따위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이웃의 테두리에서 제외시키고 심지어 원수로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이다. 너희는 오히려 이웃 사랑을 늘 외면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대답을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오늘 율법 교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를 중심으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늘 물어왔던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기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만을 도운 것은 아닙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지금 예수께서는 당장 곤경 당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곤경 당하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이웃이 되어 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보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습니다. 무엇을 행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걸음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이웃일까라는 자연스러운 물음에 예수님은 너를 중심으로 누가 네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합니다. 재난을 당하여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 사람의 이웃으로 존재할 때, 바로 거기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또 하나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이 원수로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마리아 땅과 유대 땅은 한 나라였고, 한 민족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남북으로 갈리었고, 남쪽은 르호보암왕을 중심으로 두 개의 지파가 함께 하고, 북쪽은 여로보암 왕을 중심으로 10개의 지파가 함께 했습니다. 오래도록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북이스라엘에 속했던 사마리아 땅이 이방인들에게 점령당한 후 유대와 사마리아는 마치 원수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슬픈 역사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충격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실은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 원수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예수님은 원래 인류와 모든 생명체는 서로 이웃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이웃이며 누가 원수인가? 둘 중에 누가 구원자인가?]

그런데 우리나라의 상황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북한과 미국 중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누가 우리의 원수일까요? 북한과 일본 중 누가 이웃이며 원수입니까? 북한은 원래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지만 지금 대다수의 남한 국민이 북한을 원수처럼 여깁니다. 주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와 별 상관없는 나라일 수 있고, 한국의 현대사를 공부해보면 한편으로는 친구인 듯, 한편으로는 우리를 일종의 식민지처럼 다뤘던 원수인 듯 보이는데, 지금 우리 남한의 많은 사람 특히 기독교인들은 미국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이웃, 우리의 영원한 동맹국으로 믿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웃이며, 누가 원수일까요?

더 황당한 것은 보수 우파들의 상당수는 우리 강토를 침략하여 겨레의 정신을 말살하고 모든 것을 착취하고 약탈한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그들이 우리의 친구인 양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강도는 일본 제국이었습니다. 해방 후에 열강들 사이에서 우리는 또 강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구한말, 또 해방 후에 동네방네 시골 구석구석까지 들리던 동요는 이러했다고 합니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마라, 일본 놈 일어나고 되놈 되 나온다. 조선 놈 조심하소"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 중의 하나는 강도 만난 사람이 절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믿었던 제사장과 레위가 이 사람을 배신하고 나 몰라라 했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너무나 화가 났을 것입니다. 분노가 치솟아 올랐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도 현 정부에 대해서 비슷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만 하면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국민을 책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존의 기득권 카르텔, 나쁜 언론들, 극우 개신교인들, 극우 정치인들이 모두 협작하여 거들고 있습니다. 이런 이익 중심 카르텔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내란을 일으킨 것이고, 내란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3.1절이었습니다. 민족정기를 되찾고 나라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저항의 깃발을 든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놀랍게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이 땅을 침략하여 유린한 일본을 편드는 일들이 버젓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과연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강도일까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레위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한다면서 매우 거룩한 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민들이 성전에 바친 십일조로 로마에게 아부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비판한 것처럼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만나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남의 것을 등쳐먹는 강도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형국이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우리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줌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강도 만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강도가 왜 생깁니까? 사회가 불안하고, 불평등이 심해지고, 소수의 몇 사람만이 기득권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국민은 어려운 삶을 겨우 이어가는데 억울한 일들이 생기고, 각종 스트레스가 쌓일 때 이 사회는 강도를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구원자로 기대하고 믿었던 제사장, 레위는 결코 고통받는 사람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누가 강도이며 누가 자비를 베푼 사람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곧 있게 될 대통령 선거에서, 각종 자리의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 일을 맡겨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때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서 "내 이웃이 누군인가?"보다는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까?"를 물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간절히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해고당한 사람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청년들, 입시지옥에서 시달리는 학생들, 가난에 허덕이는 노인들! 모두 우리가, 우리 향린교회가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 안 될 분들입니다. 이제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약하고 가난하기에 억눌려 살았던 이들을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에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여 지금 강도 만난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향린 식구 중에도, 병마로 고통당하고,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먹고 사는 문제로 깊은 한숨을 쉬어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당장 믿음의 형제자매와 이웃이 겪는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갑시다. 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웁시다. 그들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도웁시다. 바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누가 내 이웃인지를 묻지 말고, 내가 이웃이 됩시다.

나를 구원해달라 기도하는 만큼 우리가 구원자가 됩시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면서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루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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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원효의 체상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원효의 체상용의 불교철학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손호현 교수(연세대 신과대학)는 얼마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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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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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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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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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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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