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잠언 2:6-9, 요한1서 3:18-20, 사도행전 16:25-34
설교문
신약성서의 다섯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세 번째 책인 누가복음과 원래 한 책입니다. 예수의 사도(使徒, apostle)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데, 일명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로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했는지, 그 생생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예수의 사도인 바울이 최초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바울은 소아시아, 곧 오늘날의 튀르키예(터키) 지역에서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환상을 통해 튀르키예가 아니라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 곧 오늘의 그리스로 방향을 바꾸라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아시아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곳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유대인인 바울로서는 이들을 기반으로 선교하는 것이 훨씬 쉬웠기 때문입니다. 바다 건너 유럽에는 아직 그만한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은 우리 속담처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가야 한다"라고 지시하신 것 같습니다. 바울은 환상을 본 후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와 그의 일행을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그의 일행인 실라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사모드라게(사모트라케)와 네압볼리(네아폴리스)를 거쳐 빌립보(필리피)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기원전 356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도시입니다. 마케도니아(그리스) 지방에서 첫째가는 도시이며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주로 로마의 군인이었다가 전역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로마법에 따라 다스려졌습니다. 바울은 정말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온 것입니다.
빌립보에 머물던 어느 안식일에 바울 일행은 성문 밖 강가로 나갔습니다. '성문 밖'이라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을 말합니다. 거기에 마침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있었고 바울 일행은 거기에 앉아서 하나씩 모여든 여자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거기서 바울 일행은 루디아(리디아)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색 옷감 장수였습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귀족들을 상대로 여성 옷감을 파는 사업가였습니다. 돈을 꽤 벌어 잘 사는 상인이었지만 여성이었기에 소외계층에 속했습니다.
성서는 이 리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만났을 때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감동한 리디아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집안 식구 전체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간청했습니다. "나를 주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그렇게 바울과 그의 일행을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덕분에 빌립보에 처음으로 '가정교회'가 생겼습니다. 유럽 땅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리디아의 집은 마케도니아(그리스)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었습니다. 리디아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겁니다. 정교회는 이 리디아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특별한 여성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보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어느 무녀(巫女)와 계속 마주쳤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무녀를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 했습니다. 이 무녀는 아폴로의 신탁(神託)을 전해서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해 주고선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녀가 계속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괴롭히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무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을 마지못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큰 말썽이 날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 일로 사달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예 신분이었던 그 무녀는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여종에게서 나가자마자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줄이 끊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분노한 주인들은 바울 일행을 도시의 광장(아고라)로 데려가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관습(에토스)을 전한다며 무리를 선동해 폭행하고 투옥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무수히 친 다음 가장 깊은 옥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사도행전)의 본문은 바로 이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전파될 수 있었는지 그 결정적인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 맞은 상처가 쓰리고 아팠으나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신기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났습니다. 옥터가 흔들리니 옥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의 발에 채워둔 차코가 다 벗겨졌습니다. 지진으로 감옥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제 유유히 걸어 나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때 잠을 자다 놀라 깬 간수는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로마법에는 간수가 죄수를 놓쳤을 경우 그 간수는 죽음으로 책임을 지거나 아니면 죄수가 받을 형량만큼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크게 절망한 간수는 칼을 빼어 자기 목을 그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울이 외친 소리였습니다. "당신의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소!"(16:28, 공동번역) 소리에 놀란 간수가 등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정말 거기에 바울과 실라가 있었습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며 그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16:30)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현대인의 성경, what must I do to be saved) 이 질문은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교수 생활 오래 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질문이 없는 학생에게는 백 가지 명강의도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다는 것을. 질문이 없는 곳에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라고 답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오늘도 바울의 이 말은 예수를 전하는 모든 전도지의 맨 처음에 적혀 있습니다. 명동의 중앙극장 앞에서 1년 365일 '예수 믿으라' 소리치는 거리 전도자의 피켓에도 이 구절은 한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자는 묻지도 않는 길거리 사람들에게 답을 외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라고 묻지 않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답을 외칩니다. 그 답은 공중에 흩어집니다. 그 말씀이 내려앉을 마음 밭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옥문이 열리고, 발에 묶였던 차꼬가 풀리면서 바울은 도망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깃불도 없는 그 캄캄한 밤중에 저 같으면 줄행랑을 쳐 다음을 도모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때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간수를 생각했습니다. 죄수를 지키지 못한 간수가 받을 처벌을 생각했습니다. 탈옥하면 자신은 자유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 간수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탈옥의 유혹을 물리치고 감옥에 머물기를 선택했습니다. 만약 그대 바울이 탈옥했다면 그는 영원히 탈옥자의 오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사회 어디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탈옥할 수 있는 죄수가 도망하지 않고, 도리어 자살하려는 교도관의 생명을 살렸다!' 요즘 같아서 이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즉시 퍼져나갈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입증했습니다. 옥문은 열렸으나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칼을 빼어 자결하려는 간수를 살렸습니다. 바울의 태도는 참으로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가치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 간수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질문은 이미 답을 얻은 것입니다. 구하는 자, 이미 얻은 것입니다. 찾는 자, 이미 찾은 것입니다.
오늘의 신약서신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8)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도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우리의 진정성을 판단할 것입니다. 다른 신약서신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12, 새번역)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실을 봅니다. 우리의 행위를 봅니다.
사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로마 사회에 매우 이질적인 규범과 가치를 담은 새로운 에토스(관습, 풍속)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가난과 부, 주인과 종, 여자와 남자라는 것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노예제를 근간으로 존속하던 로마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노예들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에토스(풍속, 관습)를 퍼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 차별 없는 사랑은 구호가 아니라 실재였습니다. 교리가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온몸으로 살았고 자결하려던 간수는 이 사랑 앞에서 전율했습니다. 간수는 한밤중이었는데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주었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저는 헤밍웨이를 참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헤밍웨이를 타고난 천재 작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그는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썼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노인과 바다>와 같은 작품들이 다 그렇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미래가 불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옥탑방 창가에 서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지금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글을 써 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첫 문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 끙끙 앓는 기억들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혔던 글이 어느 순간 첫 문장이 잡힐 때 시원하게 술술 흘러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면 우리는 거기서부터 시작해 계속 써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진실한 문장 하나쯤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한 한 문장'은 무어입니까? 글을 쓰다가, 인생이라는 노트에 글을 쓰다가 글이 막히면, 혹은 내 글이 미사여구에 치중하는 걸 깨달으면 우리는 즉시 자신이 맨 처음 써 놓은, 그 진실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새봄입니다. 새 학기입니다. 지난겨울은 길고, 춥고, 무서웠습니다. 이 봄에 여러분은 어디서 다시 싹을 틔우고 새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진실한 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진실한 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진실한 한 곡조'는 무엇입니까?
기적으로 탈옥의 기회를 얻었으나 바울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그 간수를 위해 감옥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 뜻밖의 선택과 행동은 사실 그가 평소에 늘 강조하던 어떤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말일까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1-2, 5)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인간의 지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이 하늘의 사랑 앞에 강고하던 마음의 벽은 무너졌습니다. 복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감사하게도 다음 날 바울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것도 그냥 풀려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인 바울을 부당하게 투옥한 것과 죄도 없는 사람을 매질 한 것에 대해 사과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감옥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결백을 인정받았고, 이로써 '믿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믿을 수 있다는 사회적 공신력을 얻게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이로써 수많은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은 드디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 역사의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 16장입니다.
"형제[자매]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라디아서 5:13)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까? 우리의 믿음, 진실한 믿음입니까? 우리의 사랑과 믿음, 과연 나의 '진실한 문장'입니까? '오직 사랑으로," 이것이 내 삶의 진실한 첫 문장입니까? 새봄입니다. 다시는 추위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 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우리 그 간수의 진실한 한 문장의 질문으로부터 새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 질문을 묻는 자,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질문을 던진 자, 이미 답을 얻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마태복음 7:7)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현대인의 성경)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오늘 이 답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