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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설교] "주여 그리 마옵소서"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53:4-6, 로마서 8:16-18, 마태복음 16:21-24

설교문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 먼저 이름을 묻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000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그리고 취미는 무엇인지 등을 묻게 됩니다. 그렇게 낯선 사람은 아는 사람이 되고, 우리는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점차 관계가 발전되면 그 사람에 대해 다른 것들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비전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는지, 앞뒤 일관성은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사람인지 등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아가면서 우리는 친구가 됩니다. 더 많은 경험을 함께하면서 친구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마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심지어 반세기 동안 결혼생활을 함께해 온 부부조차도 때론 서로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제도 제 아내는 좀 낯설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마태 16:13-23, 마가 8:27-33, 누가 9:18-22)이 바로 이와 같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일행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찾으셨을 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말을 아무 부담 없이 전합니다.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너희가 나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시몬 베드로가 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답변에 흡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마태복음에만) "시몬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을 너에게 알리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이시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메시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엄히 경고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베드로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적어도 하나의 이유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느니라."(마태 16:21) "이 때로부터"라는 말은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受難)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것을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마가 8:32) 베드로가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아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서를 보니 놀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마태 16:22, 마가 8:32)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현재 진행형) 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편으로 끌고 가("took him aside") 꾸짖었다 했습니다. 우리말 번역들은 에둘러 "항변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원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다"(rebuke) 기록합니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습니다. 제자가 선생의 멱살을 잡고 방 한구석으로 끌고 가 비난을 퍼붓는 모양새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 16:22) 다른 번역으로 읽어보면,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공동번역 / Never, Lord! This shall never happen to you - NIV)라는 말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대라도 스승을 칠 기세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돌이키사(몸을 돌려)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었다]"(마가 8:33a)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가 8:33b, 마태 16:23a) 예수님도 만만치 않은 분이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자에게 '사탄'이라니요. 요즘 이랬다간 고발당합니다. '사탄'(Satan)이란 악의 우두머리. 혹은 대적자(對敵者)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대립하는 악 또는 그의 무리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를, 그것도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가장 험한 말로 꾸짖으셨습니다. 몸을 돌려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다는 말은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가 이 꾸지람을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 16:23b)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말은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공동번역) 혹은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새번역)라는 뜻입니다. 살면서 혹 장애물과 같은 사람, 걸림돌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신지요. 걸림돌이란 디딤돌의 반대말입니다. 사람은 자그만 걸림돌 하나 때문에 넘어집니다. 평생 이룩한 업적이 걸림돌 하나로 무너집니다. 걸림돌을 성서는 '스캔들'(scandal)이라고 합니다. "너는 나에게 스캔들이다."

스캔들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3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 이후 이 말은 기독교의 복음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세상은 자기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증표를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스캔들)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0-24, 새한글성경)

"메시아(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이것이 스캔들, 곧 걸림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메시아)"(개역개정), 이것이 우리를 '거리끼게 하는 것', 곧 스캔들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다"가 그리스도교가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입니다. 해방자입니다. 정복자입니다. 승리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전한 복음은 그냥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일 먼저 베드로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메시아(그리스도)는 불의한 무리를 일거에 소탕하고 세상을 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공개적으로 처형당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기지가 않는 말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아니 묵과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래서 흥분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멱살을 붙잡고 한구석으로 끌고 가 험악한 얼굴로 예수님을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얼굴에서 사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주님 안 됩니다 / Never, Lord!"라는 베드로의 저항에서 사탄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사실 그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잘 아는 음성이었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머무실 때 예수님은 이미 그 얼굴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 4:3)라고 했을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마태 4:6)라고 했을 때, 그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4:9)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얼굴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어 가능하면 그 잔을 옮겨 달라 기도하셨을 때도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고 모욕하며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가 15:29)했을 때 예수님은 다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못 가게 방해하는 사탄은 그렇게 늘 예수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 사탄은 그분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라 불렀을 때 그는 분명 올바른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자기는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학생 중에도 어려운 개념과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정작 물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으나 메시아에 대한 그의 기대는 따로 있었습니다. 일거에 정치적 승리를 담보하는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메시아가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패배 드라마와 절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비로소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며, 삼 일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도 베드로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의 앞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사탄이라 부르시며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새번역)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예수님을 보고 있는 자기 눈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자기 귀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베드로는 오늘 우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부릅니다.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다 옳은 명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 이름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가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나의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신 앞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였습니다. 인간이 신 앞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입니다. 사실은 이 태도가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겪는 모든 위기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지탄하는 모든 위기의 근본은 성서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오만입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악들도 모두 이런 신앙의 태도에서 저질러졌습니다. 마녀사냥이 그랬고 십자군 전쟁이 그랬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귀중한 신앙의 고백도 나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오용(誤用)될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완벽한 신앙의 고백(마가 8:29)도 사탄의 발설(마가 8:33)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진리를 오늘 예수님은 일러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이사야 53:5) 이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복음은 그냥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스캔들입니다. 걸림돌입니다. '거리낌'(새번역)입니다. 혹은 '비위에 거슬리는 것'(공동번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라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로마서 1:16)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마가 8:38), 즉 "배신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대에서"(새한글성경)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찬미해서가 아니라 이 세대가 악하기에 메시아 예수의 복음은 수난과 죽음의 드라마가 됩니다. 생명의 복음은 이 땅에서 불가피하게 고난과 죽음이라는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난과 죽음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은 오히려 영원한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결코 '값싼'(cheap)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는 '값비싼'(costly) 승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명상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는 기도와 훈련에 더욱 힘쓰십시오. 어떤 것을 알려면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고 하지요. 어떤 것을 정말로 알고자 한다면 정말로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그리스도)"를 오래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따라가십시오. 그가 가신 길은 영광의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주여 그 길로 가지 마옵소서"라고 그분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 16:24) 그리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성경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6-18) 지금의 이 고난 속에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주를 따라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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