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왕하 5:9-14, 히 11:32-40, 막 5:21-36
설교문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
오늘쯤이면 내란 수괴는 파면되고, 우리 모두는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리라 기대했지만, 아직까지도 헌법재판소는 묵묵부답입니다. 4월 18일에 두 명의 재판관이 임기를 마치기 때문에 적어도 4월 4일이나 11일에는 선고가 이뤄지리라는 기대가 있는가 하면, 4월 18일까지 질질 끌면서 헌재 불능 상태를 만들거나, 5대 3으로 기각시키거나, 보수 편향의 재판관을 앉힌 후 끝내 윤석열을 복귀시킬 것이라는 설까지, 짙은 안개 속에서 여러 추측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다수는 여전히 8:0으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하고, 그것이 마땅하고 상식이지만, 현 정부의 고위직 관료들이 너무 상식 밖의 일들을 하고 있기에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낼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 이권만을 주로 생각하는 깊은 병에 들어 있고,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대책 없는 정부 밑에서 애꿎은 시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가고만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당장 눈앞에 닥친 기후 붕괴와 AI의 급격한 발전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정신을 차리고 공부해도 따라가기 어려운 때에, 정치를 하고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사람들이 이 모양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참으로 많이 아픕니다.
바울 사도께서 일찍이 모든 피조물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로마 8:19-23)고 말하면서 과연 누가 우리를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시겠냐(로마 7:24)고 탄식했지만, 진실로 지금의 대한민국이야말로 온전한 치유와 참된 구원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의 80-90%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병 고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명령한 것도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치유입니다(마태 10:7-8; 마가 6:12-13; 누가 9:1-2, 6).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병도 낫고, 모든 게 잘된다"는 식의 간증을 함부로 남발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고통을 치유하고, 주님 주신 생명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본질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부르는데 "구원"을 뜻하는 영어단어 샐배이션(salvation)은 "치료하다", "건강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살부스(salvu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이란 "완전하게 하는 것" "튼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늘로부터 받은 자신의 생명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질병의 다양한 양상]
누구나 병이 들면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몸이 말을 안 듣고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하지요. 대체로 오늘 인간이 겪는 질병은 세균으로 인한 '감염성 질환'과 세균 없이 걸리는 '비감염성 질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걸리는 병이고, 대표적 성인 질환인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것들은 병균 없이 걸리는 병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몸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있지요. 그래서 때로 정서적인 문제로 인해서, 즉 마음이 아파서 신체까지 손상되는 질병들이 있습니다. 전쟁 공포증을 앓는 병사가 갑자기 손발을 사용하지 못한다든지, 불행이 계속되면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는 히스테리성 질병이 있습니다. 또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생기는 설사나 변비, 두통, 요통, 위궤양, 각종 정신질환과 우울증, 화병, 상사병 등을 보면 질병이 단순히 육체의 문제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어가 말해주듯,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람일 수 있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적 가치관과 문화적 판단 때문에 아프기도 합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말랐고, 그것을 부러워하는 젊은이들이 날씬한 몸매를 가꾸려고 하다가 거식증과 같은 병에 걸리기도 하고, 또 사회적 차별과 편견도 사람들을 병들게 합니다.
또한 질병의 치유를 생각할 때 사회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제법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체계가 잘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미국의 경우는 치료법이 있고 약이 있어도 가난 때문에 고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식코》(SiCKO)를 보면 미국 의료 제도의 허점들이 신랄하게 드러납니다.
누군가가 병이 들거나 몸이 아프다면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질병의 치유는 건강한 몸과 정신, 바른 문화와 가치관, 원활한 사회적 치료 시스템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마가복음서의 치유 이야기]
오늘의 성경 본문엔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두 여자의 치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여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인데, 12살 된 소녀로서 거의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중환자입니다. 또 다른 여인은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 혈루증은 월경이 끝나도 피가 잘 멈추지 않는 증상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 치료하지 않으면 빈혈이 오고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여러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고생만 진탕 하고, 가산마저 탕진한 채 병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군중을 헤치고 예수 곁으로 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낫게 됩니다. 그냥 읽으면 특별한 치유 능력을 가진 예수의 치료 이야기 같지만, 이 이야기는 더 많은 것을 깨달으라고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여자가 걸린 병은 당시의 문화에 있어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됩니다. 레위기 15장 25-28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 몸이 월경 기간이 아닌데도, 여러 날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면, 피가 흐르는 그 기간 동안 그 여자는 부정하다. 몸이 불결한 때와 같이, 이 기간에도 그 여자는 부정하다. 그 여자가 피를 흘리는 동안 눕는 잠자리는 모두, (월경 기간에 눕는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그 여자가 앉는 자리도, (월경 기간에 앉는 자리가 부정하듯이,) 모두 부정하다. 누구나 이런 것들에 닿으면 부정하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그러나 흐르던 피가 멎고 나서도 정하게 되려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정하게 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사람의 병을 죄 때문에 신께서 내린 징벌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여성은 죄인 취급당했을 것입니다. 성결 법전에 따르면 특별히 이 여인은 오염의 근원입니다. 접촉하는 모든 인간과 물건은 다 부정해지기에 아마도 이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었다면 남편이나 자식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12년째 부부생활을 못할 뿐 아니라 죄인이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이혼을 당하는 사유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자식도 어미가 사용한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이 어미는 자식마저도 기피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당시 종교와 사회가 죄인으로 취급하여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기에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는 과감하게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31절, 예수를 에워싸고 떠밀고 하였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봐서 이 여인이 예수에게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의 행동은 다른 이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댐으로 인해 예수도 이제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고 이 여자의 행동은 자신만을 위한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제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여인아!"라고 부르지 않고 "딸"이라고 부른 것은 이 여인이 이스라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은 다릅니다. 일반 사람의 눈에는 이 여인의 행동이 부정 타게 하는 폭력적 행동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용기 있는 자의 끈질긴 믿음의 행위로 인식됩니다. 여자의 행동은 인간을 두고 깨끗하니 더럽니 하면서 차별하는 당시 율법의 모순을 드러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율법으로 인한 차별을 없애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후에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은 것은 이 여인에게서 배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시체 또한 부정한 것이며 시체를 만진 자 또한 부정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왜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래 취지 또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기에 이 여인과 예수님은 율법 규정을 어김으로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치유를 향하여]
마가는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야기와 혈루증 걸린 여인의 치유 이야기를 샌드위치처럼 엮어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거의 죽음에 다다라서 이제 곧 죽을 것 같은 야이로의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예수가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는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몰려와서 예수를 에워싸고 밀칩니다. 야이로는 속이 탑니다. 딸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지체된 상황인데 난데없이 한 여인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이 여인과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35절)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어린 소녀의 죽음 소식을 전합니다. 이때 야이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누가복음서는 이 아이가 외동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누가 8:42).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딸아이의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한시가 급한 때에 방해꾼들이 생기더니 결국 딸아이가 죽고 만 것입니다.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아마도 야이로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털석 주저앉고 말았겠지요. 왜 마가복음서는 이 두 이야기를 이렇게 편집하였을까요? 마태복음서에는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9:18). 그래서 예수가 빨리 가든지 늦게 가든지 큰 상관이 없습니다만 마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야이로 뿐만이 아니라 청중들의 마음도 긴장되고 초조해집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삶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비극적 고통 그리고 그 모두를 극복하는 두 가지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상황에 굴하지 않는 행동하는 용기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나 제도라 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상황을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법과 제도가 고통을 유발한다면 과감하게 그 사실을 폭로하고 법과 제도를 고치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줄이는 일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믿음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악법은 악이니 고쳐야 한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야이로처럼 기다리며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참아내고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지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소망을 지니는 믿음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서는 유독 열둘이라는 숫자에 주목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12년 동안 병을 앓았고, 야이로의 딸은 열둘의 나이에 죽습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서는 열둘이라는 숫자로 두 여인의 상황을 엮어 놓습니다. 왜일까요? 야이로는 회당장이었기에 마을의 유력인사로써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넉넉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의 딸 또한 죽을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매우 유복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름도 없이 그래서 존재의 가치가 별로 느껴지지 않은 채 등장했던 하혈하는 이 불쌍한 여인은 12년 동안 고통과 수모와 눈물의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한쪽엔 행복한 열두해가, 그리고 다른 쪽에는 불행한 열두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이나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었던 여인이 치유되는 바로 그 순간, 이제 막 열두살이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소녀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가는 일부러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 묘한 대조는 인간 세상사의 복잡함과 얽힘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복이 동시에 누군가의 불행일 수 있고, 누군가의 배부름은 누군가의 굶주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면적 사고를 하지 못한 채, 생명과 정의를 추구한다면 결국 반쪽만을 지지할 뿐,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마가는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는 반쪽의 승리가 아닙니다. 모두 생명을 얻는 온전한 치유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결단과 야이로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결법을 깨고 예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 그래서 불결하고 파렴치해 보이는 여인의 행동에서 참된 믿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부정한 시체의 손을 잡음으로 살아 약동하는 생명의 힘이 딱딱한 율법이나 제도보다도 크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이로는 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지위와 신분, 명예를 내려놓을 줄 압니다. 무명의 청년 발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여인의 폭력적이고 무식한 행동에도 쉽게 분노하거나 폭력적 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넉넉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예수에 대한 신뢰 속에서 기다리는 인내가 있습니다.
[병을 만드는 세상]
그런데 예수는 왜 그렇게 수많은 병자를 만난 걸까요? 성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 말이 어눌한 사람, 자꾸 쓰러지는 아이,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시도 때도 없이 울부짖는 남자, 귀가 먹은 이들, 온갖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 다리를 절고, 중풍병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1980년 이후 영양실조나 저개발로 인해 매년 평균 700만 명이 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대부분이 아이들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는 맹인의 수가 5,000만에 달하고, 1억 4,600만 명이 눈의 결막 질환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비타민 A를 복용시키기만 해도 시력 손상의 80%이상은 고칠 수 있습니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제가 부목사 시절에 명동에서 우리 향린교회의 화장실을 자기 화장실인 것처럼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시는 한 노숙자분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의를 갖춘 사람이지만, 말이 상당히 어눌하고 대화를 잘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원래 말이 어눌했을까요? 노숙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정상인의 상태에서 노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노숙을 한 뒤로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이 적어집니다. 사람들이 노숙인을 피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면 말하는 것이 미숙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이런 자살 현상을 연구해 보면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2배에서 4배가량 높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율이 중간 소득 국가 이하로 내려가면 남성이나 여성의 자살 비율이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를 연구해 보니, 여성의 노동 참여율이 낮거나, 젠더 불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여성 자살률이 유의하게 높기 때문입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토지와 비토지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이혼할 때에, 또는 유산을 분배받을 때에 경제적 권리나 시민권 등에서 차별을 받을수록, 가족과 사회에서 억압과 학대를 받을수록, 자기 결정권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수록 자살율이 높았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은 젠더 불평등과 연관됩니다. 한국의 경우는 고소득 국가인데도, 특히 10대와 20대 여성들의 자살율이 높은데, 이것은 우리나라가 공적 사적 영역에서 젊은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불평등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병과 장애의 증상들 또한 모두 이러한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발생하는 절대적 빈곤, 전쟁과 기근의 상처들, 비인간적인 억압과 수탈과 폭력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치료자 예수님은 이들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병을 유발하는 문화적 가치관과 사회제도 또한 변혁하고자 한 것입니다. 톰 행크스라는 명배우가 열연한 "필라델피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잘 나가던 변호사가 에이즈에 걸리자 병으로 인한 아픔 외에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받는 불이익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 줍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매우 복잡하게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고, 천박한 자본주의 속에서 참된 인간다움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고통도 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고통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잣대로 인간의 생명을 유린했던 유대 사회의 금기를 깬 여인을 인정한 예수처럼 오늘 사람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자아내는 사회제도를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교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마음을 들쑤시고 불편하게 만든다 해도 오늘 야이로처럼 인내하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다리고 참아주는 관용도 필요합니다. 야이로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가지고 있다면 자기 삶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2024년 7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를 비롯한 다섯개 유엔 전문 기구의 발표(2024 세계 식량 안보 및 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현재 7억 3천 300만명이 기아인구로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1명중 1명 가량이 만성적 기아로 고통받고 있으며, 아프리카는 인구 5명당 1명꼴이고, 북한의 경우는 전체 인구의 53%가 영양 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오늘 진정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균입니까? 그리고 병든 우리를 또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난의 때, 위기의 순간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큰 두려움을 내어 쫓고, 온전한 믿음은 절망의 심연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괴로움조차도 소망의 날개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우선 병자를 양산하는 이 시대를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향린교회가 얼마든지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정부나 무슨 무슨 국제기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믿음과 헌신하는 열정이 바꾸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 겨자씨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이미 있다면, 이제는 변하는 세상에서도 충분히 작동되고 반드시 필요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고, 한국교회가 개혁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충분한 지식과 이것을 실행해 낼 진짜 힘, 실력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향린은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듣긴 하지만, 이 땅의 정치 경제적 현실, 기후 붕괴의 문제, 인공지능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달에 따른 인류 문명의 변화, 우리의 일상에 면면히 젖어 있는 민족문화 전통 등등 우리가 제대로 알고 배워야 할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정권을 잡은 이들이 무지막지하게 법을 어기며, 제 멋대로 할 때 그들을 막아낼 장치들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는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삶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 가상 현실 속에서 증폭되고 있는 확증 편향이나 편견의 문제도 비판적 안목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의 극우화 바람, 경제 질서의 변동 같은 거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겪는 여러 관계들을 풀어가는 것도 연습해야 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남편은 아내의 다리를 베게 삼아 누워서 함께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행복을 느끼는 부부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회사일로 피곤하여 저녁을 먹고 나서는 평소와는 달리 아내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남편의 행동에 아내는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리고 뾰로퉁한 얼굴로 아무런 설명 없이 한마디 툭 던집니다. "자기 요즘 나한테 왜 그래?" 한국의 평범한 남편이 이렇게 말을 하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잘 듣고 수용하는 연습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청소년기가 되면 독립심이 커지고 뇌 발달도 더 왕성해지기에 감수성도 민감해집니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던 아이가 별말 없이 엄마가 던진 한 마디에 과민반응을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궁금해서 그냥 편하게 "오늘 몇 시에 집에 들어오니?"라고 물었는데, 아이는 완전 뜬금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나를 못 믿어. 엄마는 남의 사생활에 너무 간섭하는 게 많아" 사춘기 시절 아이에게 지옥이란 앞에도 엄마, 뒤에도 엄마, 옆에도 엄마가 있는 곳이랍니다. 사춘기에는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이제 아이가 독립할 때구나!"라는 것을 깨달아 안다면 부모도 큰 상처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와 부모 자식 사이에도 이런 데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겠습니까?
향린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의 많은 모임과 교회 활동을 통하여 일상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창출하고 세상을 변혁하는 충분한 실력에 이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내공을 쌓아 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우리를 부를 때 다 함께 나아갑시다. 지난 3월 16일 광화문 현장 예배가 개독교만 보아온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을 주었듯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해 봅시다. 정결법이라는 거대한 담을 넘은 한 여인의 용기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불의함도 폭로하고 고쳤듯이 우리도 작은 용기를 냅시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손을 맞잡읍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정신과 몸을 순결하게 만들고,
정해진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서, 여러분을 던지고 순종하십시오.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자유의 신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불안 가운데 주저하지 말고, 사건의 폭풍 속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계명과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을 뒷받침해 주며,
자유가 여러분의 영혼을 환호하며 감싸안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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