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요엘 2:12-14, 고린도후서 7:9-10, 마태복음 4:17
설교문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신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쾌락이 내 안에서 함께 들끓었으며 나의 미성숙을 휩쓸어 악한 욕구의 벼랑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규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놈이옵니까? 내가 한 행동에 죄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윽고 그는 어린 시절의 도둑질, 내연녀와의 관계, 성에 대한 탐닉, 세속적인 욕망, 그리고 죄악과 실수를 하나도 숨김없이 신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입니다. 그의 내밀한 고백은 그가 46세가 되던 해 『고백록』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책의 한 구절입니다. "어릴 적 난 쾌락주의 문학이나 연극 작품에서 관능적인 사랑에 눈뜬 소년이었습니다. 동거를 시작해 18세에 아이가 생겼고, 그러다 15년간 동거하던 여인을 버리고 재력가의 딸과 약혼했습니다. 그사이 다른 여성을 만나 바람도 피웠습니다. 나는 육욕에 지배되어 미쳐 날뛰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1,600년 전에는 성의 문제를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교회의 주교였습니다. 그 거룩하고 높은 자리에 오른 그가 자서전을 통해 육욕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과거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용기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고뇌로 신 앞에 몸부림쳤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더러움을 끝장내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고뇌로 몸부림치던 어느 날, 자택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를 거닐 때, 갑자기 어디선가 "집어라, 읽어라(Tolle, lege)!"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허겁지겁 앞에 있는 성경을 집어 펼쳐보았는데, 로마서 1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2-14절)
그때 "순간적으로 마치 평정의 빛이 내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찾아 읽은 성경 말씀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록의 첫 장에는 이 유명한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을 위해 살도록 지으셨기에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평안(rest)을 찾을 때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restless)."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총 13권은 한 인간이 정욕에 이끌린 삶을 살다 거기에서 빠져나와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로 탄생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은 고뇌와, 깨달음의 환희를 담고 있습니다. 1,600여 년 전 발표된 이 고백록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역사상 최고의 자서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참회하는 기간입니다. 참회(懺悔)란 '뉘우치고' 또 '뉘우치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 참회입니다. 자기의 죄를 진정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십자가 수난의 길을 가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마태 16:24, 누가 9:23) '자기를 부인하라'라는 말씀은 자기를 하찮은 존재(nobody)로 여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이미 존엄성을 부인당한 사람들에게 2차 가해가 될 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자기를 의롭다 여기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해서 이 비유(누가 18:9-14)를 들려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이 비유의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그 세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욥처럼 자신의 부끄러움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기"(욥기 10:15) 때문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욥기 42:6) 회개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에스라 선지자도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5-6)
에스라는 '근심'했다 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근심했기에 옷을 찢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참회했습니다. 현대인은 근심하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근심하려 하지 않습니다. 외면합니다. 자기의 잘못과 죄악에서 눈을 돌립니다. 나의 의롭지 못함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속을 태우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주께서는 겸손하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51:17, 현대인의성경)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책을 괴로워하며 부서지고 깨진 마음을 하나님은 절대로 가볍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마음은 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죄를 뉘우치고 구원에 이르게"(고린도후서 7:10, 현대인의성경)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잘못된 기차를 탔다면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야 한다.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돌아오는 길에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If you get on the wrong train, get off at the nearest station, the longer it takes you to get off, the more expensive the return trip will be). 한참 길을 가다 문득 깨달을 때가 있지요. 길을 잘못 들었구나! 그때 바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나의 결정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래의 길로 돌아오지 못한 채 해가 지고 말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방향이나 선택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최대한 빨리 멈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계속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빠르게 수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결점이 있다는 건 나쁜 일이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5)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 실린 요엘 선지자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 2:12-13a)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백성에게 "네움 아도나이"(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이라)라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선포의 일성은 "돌아오라"(히브리어 '슈브')입니다. 슈브는 구약성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입니다. 언약을 깨뜨린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의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서에서 회개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여호수아 24:23), 악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예레미야 4:14) 묵을 땅을 갈아엎는 것입니다.(호세아 10:12)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슈브"(돌아오라) 명령을 거듭하면서 간절히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사실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을 자리를 떠나 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죽을 만큼 힘이 드는 일입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많은 관객이 들었던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은 철로 위에 양팔을 벌리고 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사실 주인공에게는 여러 번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회를 다 놓쳤습니다. 결국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을 때 돌아갈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며 철길 위에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너무 늦었더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기왕이면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갈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1,6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정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어린이의 음성과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집어라, 읽어라!" 오늘날 우리의 귀에는 "돌아오라,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고집 때문에 못 들은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요엘 선지자는 심장(마음)을 찢어서라도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죽을 자리에서 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이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시[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요엘 2:13b-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참회하고 돌아올 때 복을 내리십니다. 그걸 "혹시 누가 알겠느냐"라는 선지자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확신을 강조하는 선지자의 수사법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5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세상 앞에 자기 내면의 괴로움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건 위선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자책이었습니다. 나는 전쟁에 나가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남을 죽이기 위해 결투를 신청했고, 농민들이 노동한 결실을 헛되이 먹어 없앴을 뿐 아니라, 그들을 처벌했고, 사람을 속였습니다. 비난, 절도, 폭력, 음행, 폭음, 살인...... 세상에 저지르지 않는 죄악이 없는데도 나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참회록』의 저자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입니다. 『전쟁과 평화』, 『안네 카레니나』 등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부와 명예, 행복한 가정까지 지닌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50세의 나이에 접어든 어느 날 이 모든 것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는 6천 헥타르가 넘는 땅에 3천 마리가 넘는 말을 가진 대부호였습니다.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근심이 그를 덮쳤습니다. "언제든지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덮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이 근심으로 그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잠이 들 때면 눈에 보이는 줄이며 허리띠를 다 숨겨놓고 잠들어야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함께 '세계 3대 참회록'의 하나라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에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직면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부정할 수 없이 진실되고 모두가 아는 [이] 진리"를 그의 참회록에서 한 우화로 설명합니다. 먼 곳을 여행하던 한 나그네가 성난 야수를 피해 우물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용이 있었습니다. 야수와 용 사이에 낀 나그네는 벽 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은 벌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더 나쁜 일이 벌어졌습니다. 흰색 쥐와 검은색 쥐가 나타나 나뭇가지를 갉아먹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뭇가지는 곧 부러질 것이고, 나그네는 바닥에 떨어져 용의 밥이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 속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데 그 나뭇가지 잎사귀 위로 어디선가 꿀이 떨어집니다. 나그네는 혀를 내밀어 그 꿀을 핥아먹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통해 인간의 삶이란 죽음이라는 용이 기다리는 가운데 쥐가 갉아 먹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달았으나 지금은 전혀 달지 않은 꿀을 핥으려 애쓰는 것이 인간의 삶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흰 쥐와 검은 쥐는 각각 나그네가 매달린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 낮과 밤입니다. "이제 나는 끊임없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달려가는 낮과 밤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것만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죽음)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기만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죽게 된다는 사실은 추상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엄혹한 현실입니다. 모든 것은 잊힐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소멸(消滅)은 우리 모두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톨스토이는 절망의 끝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수학, 형이상학, 심리학, 생리학, 생물학, 사회학, 법학, 철학 등, 인간이 탐구해 온 모든 학문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가 찾는 해답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 분야에서의 나의 방황은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을 증대시킨 데 지나지 않았다"라고 그는 썼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성이 지배하는 지식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인간의 삶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신앙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신앙은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고 영원한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기에, 신앙 속에서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합니다. "신앙이란 인간이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삶에 대한 유일한 지식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뭔가를 믿는다. 믿지 않는다면 인간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 『참회록』은 세계 3대 참회록의 하나입니다. 우울증과 자살의 충동 앞에 선 세계적인 대문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쓴 작품입니다. 그 과정은 자기 치유의 과정이자 인간의 오만함을 내려놓는 겸손의 여정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바로 이러한 치유의 과정이자 겸손의 여정입니다. 고행의 길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신을 내려놓고 우리의 은밀한 죄책을 부끄러워하며 죽음과 소멸의 길에서 생명과 영원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희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6)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고 가까이 계실 때 그분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했습니다. 사순절이 바로 그런 때요, 바로 그런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 4:17) 하셨습니다. 천국이 임박했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인생의 순례자를 친히 행복의 길로 이끄신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시며]"(이사야 53:4, 새번역)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는 자에게 기쁨이 되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소망과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참회의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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