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설교] 함께 지는 십자가

2025년 부활주일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요한복음 15:12-15

설교문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현실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크든 작든, 누구나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십자가' 하면, 우리는 먼저 고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연대가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진부령(陳富嶺)은 강원도의 인제군과 고성군 사이의 태백산맥을 넘는 험준한 고개입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한희철 목사님)이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진부령 고개를 넘어 다음 행선지로 향할 때의 일입니다. 모처럼 한적한 길이 나왔습니다. 편안하게 걷던 중 길 옆 잣나무 숲에 큰 물체가 보였습니다. 바위 같기도 하고 곡식더미 같기도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예수님의 조각이었습니다. 커다란 화강암을 쪼아 만든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제목은 <예수 키레네 시몬의 도움 받으시다>입니다.

키레네(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7:32, 누가 23:26) 가만히 화강암 조각 작품을 바라보니 예수님도, 시몬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아마도 십자가는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고통에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있는 키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놓칠까 두 손으로 십자가를 꼭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시몬의 어깨와 뺨에 닿아 있습니다. 시몬의 뺨에 닿은 십자가는 '기꺼움'으로 여겨집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 억지로 지게 되었지만 시몬은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시몬과 예수님 사이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이지 알 수 있는 표지는 있습니다. 머리 위 후광이 아니라 가시면류관입니다. 두 사람 중 한 분이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시몬에게 넘긴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몬의 어깨와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무엇을 표현하고 계신 걸까요. 아마도 시몬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시몬, 내 십자가를 대신 져줘서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고마워하시고 미안해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은 또 다른 예수님과 키레네 시몬에 관한 작품입니다. '현대 종교미술이 거장'이라 불리는 독일의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 신부님의 그림입니다. 지거 쾨더 신부님은 강력한 색채와 풍부한 상징성에 영적이고 신학적인 통찰을 더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강론한 사제"라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는 여러 모습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십자가의 길> 중 하나입니다.

두 얼굴, 두 몸, 네 개의 손, 무거운 들보 하나가 보입니다. 두 사람은 짐을 지고 나르는 데 익숙한 듯이 그 무거운 십자가의 들보를 목에 걸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무거움을 버틸 수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이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둘러싼 팔, 다른 이를 감싸고 있는 팔의 힘에 의해 그 무거운 십자가의 들보를 어엿하게 어깨에 지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왜 시몬을 붙들어 갔을까요? 교회에 내려오는 한 전설에 따르면 키레네 사람 시몬은 계란 장수였고, 그날 예루살렘 성에 계란 팔러 올라갔다가 병사들에게 붙들려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른 후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후 그의 닭들이 황금알을 낳아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부활절 계란도 그런 축복을 받은 황금알이라고 생각하고 드십시오.

병사들은 왜 시몬을 붙들어 갔을까요? 남루한 시몬의 표정에서 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향한 동정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몬이 예수님과 알고 지내던 사이었기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걸까요?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치와 모욕과 고문을 당한 그분은 누가 보더라도 불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들어 나릅니다.

그런데 쾨더 신부님의 작품에서는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습니다. 작가는 과감하게 복음서의 기록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입니다. 시몬은 예수님 앞에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나란히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모습입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모습입니다. 갑자기 우리 안에 새로운 눈이 번쩍 뜨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쩌면 이토록 닮아있을까요? 얼굴의 윤곽, 눈, 코, 입은 물론 콧수염마저 닮아 마치 쌍둥이처럼 보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파란 옷을 입은 남자에게서는 거친 노동자의 얼굴빛이 묻어나고, 붉은 옷을 걸친 분의 창백한 얼굴에는 고문당한 굴욕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등 뒤로 팔을 둘러 서로의 몸을 감쌉니다. 꽉 감쌉니다. 그 힘으로 그 무겁고 무서운 십자가를 가뿐히 들고 있습니다.

두 쌍의 눈이 작품을 보는 우리의 두 눈을 바라봅니다. 오른쪽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강제로 내게 십자가가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기꺼이 십자가를 감당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 고통 받고 있는 이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우리는 짐을 나눠지며 서로를 지지할 것입니다." 왼쪽에 있는 예수님은 눈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는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나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한 이 싸움에서 저들은 나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이 수난의 길을 갈 것입니다. 시몬, 나와 함께 이 길을 갑시다! 시몬, 나와 함께해줘서 고맙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은 마치 친구와 같습니다. 아니, 둘은 친구가 맞습니다. 예수님은 경비병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 15:12)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요한 15:13)

사실 주님은 평소에도 우리를 '친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 11:19)라 불리셨습니다. 사랑하던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서 그를 깨울 겁니다"(요한 11:11, 새한글성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배신하여 무리를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와서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출 때 예수님은 그를 보고 "'친구야,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서 하여라"(마태 26:50 현대인의성경)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는 제자까지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를 끝까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말뿐이 아니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매 맞고, 대신 침 뱉음을 당하고,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정말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는 것, 그 이상 사랑을 증명할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크든 작든, 누구나 자기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삽니다. 십자가 들보를 목에 걸고 삽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내 삶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고 힘들어 여기에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벗어버릴 수는 없을까요.

다시 지거 쾨더의 그림을 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 나란히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모습입니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나의 얼굴을 그려 넣고, 시몬의 자리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넣어 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가 8:34, 공동번역)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혼자 내 십자가 지고 가게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키레네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나란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간 것처럼, 예수님은 나와 '함께' 나란히 나의 십자가를 지어 주십니다. 한 번 뒤집힌 쾨더 신부님의 그림을 한 번 더 뒤집어보십시오. 내 무거운 십자가 들보 아래 내 친구가 되시는 분이, 친구를 위하여 정말로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이 나와 함께 그 십자가 들고 계신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가 두 눈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안다. 너의 힘든 것을. 내가 다 안다. 네 삶의 십자가가 이렇게 무겁구나. 내가 같이 질게. 그러니 힘을 내. 자, 팔을 쭉 펴서 서로 붙들자. 꼭 감싸자. 이 힘으로 같이 가보자. 이 길을 너와 함께 함께 갈 수 있어서 참 좋구나. 친구여, 고맙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사하시려고 십자가 지셨으나 다시 사셨네."(찬송가 171장 1절)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망 권세 물리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님이 나의 참 소망과 친구가 되어주시니 내 십자가가 가벼울 뿐입니다. 그저 가벼울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연대가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 '함께' 지고 가듯이, 주님이 나의 십자가 '함께' 지어 주시니 그 사랑이 끝이 없습니다. 그 은혜가 한량없습니다.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 권능과 사랑의 주님이 이제 우리의 갈 길 인도하시니 내 삶의 모든 여정에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늘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부활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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